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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28*188*20mm
ISBN13 9791197926211
ISBN10 1197926216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3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친구들은 바위를 타고 내려가 밤바다 가까이로 다가갔다. 칠흙이 친구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파도가 반복해서 덮쳐 올수록 검은 바다는 점점 더 검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를 멀찌감치 두고 연석에 앉아 등을 돌렸다. 바다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어둠이 또렷하다는 것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친구들 목소리가 한참 동안 멀리서 웅웅 울렸다. 친구들이 다시 바위를 타고 올라와 몸에 묻은 흙을 털면서 다가올 때 비로소 나는 혼자가 된 것 같았다.
---「배시은, 화롄」중에서

아이를 맡았다. 맑은 날, 지저분한 도시에서였다. 그는 자신을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소개하곤 이 아이를 잠시 맡긴다고 했다. 유아차 손잡이는 따뜻했다. 유아차 안 아이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유아차는 희디희고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걷다 보니 강가에 다다랐다. 물과 빛은 물과 빛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 물결이 그날의 온 빛을 꼼꼼히 빨아들인 듯했다. 너무 아름다워 아이에게도 그 광경을 알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찬 바람이 들어가 아이의 잠을 깨우지 않도록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 줄 뿐이었다. 그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유아차를 밀고 처음 그와 만났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은 전과 같고 조용했다. 그가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철제 계단 앞 햇빛을 받으며 정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다른 나라, 라는 말을 발음해 보았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 뒤통수를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었다.
---「배시은, 다른 나라」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계절의 공기가 바뀐다. 여름에서 가을로 겨울에서 봄으로. 나는 바뀐 공기 속을 걷다가 이 투명한 구체를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것에 관하여 생각했다. 이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고 어쩌면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며 우리가 모두 사라진 후에도 반복되는 것이라는 아주 평범한 진실에 대해 생각했다. 음식을 파는 트럭들이 도로에 늘어서 있다. 축제 전처럼 들뜨는 거리 위로, 무방비한 사람들의 말간 얼굴 위로 봄이 내린다. 봄이 내린 얼굴은 얼마간은 덥고 또 얼마간은 추운 것이라 아리송한 얼굴일 수밖에 없다. 봄이란 아리송한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계속 오는 중인 것이다.
---「지곡, 희미한 축제」중에서

나는 이곳의 주민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잠깐만 살다가 갈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어김없이 걷고 있습니다. 하천 건너에서 축제를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양손에는 짐이 가득했습니다. 가장 힘이 약한 사람도 종이로 된 장식물 정도는 들고 걸어가야 했습니다. 축제를 기다리는 사람보다 어떻게든 대충 때우거나 그냥 넘어가고 싶은 사람이 더 많았지만 축제는 매년 열려왔고, 특별히 취소할 사유 또한 명확하지 않았기에 축체가 취소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축제는 언제나 하천 너머 공터에서 열려 왔는데 공터까지 건너가는 다리가 무척 부실하였습니다. 커다란 짐을 들고 하천을 건너는 일은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리에는 구멍이 너무 많아서 애들 다리가 자주 빠졌습니다. 하천 너머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천사가 서 있습니다. 천사는 멀뚱히 서서 늘 안쓰러운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나, 천사의 눈부시게 새하얀 손가락은 영원히 구부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
---「지곡, 축제」중에서

꿈을 꾸었다. 배를 타고 있었다. 달빛이 출렁이는 바다 위였다. 나는 뱃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다가왔을 때 나는 슬퍼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정한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내 이야기를 했다. 오래전에 여기서 칼을 잃어버렸다고. 바다에 떨어뜨린 칼을 되찾으려고 여기에 있다고 했다. “어리석지요?” 내가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뜰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그가 말했다. “저는 뱃전에 서 있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내가 말했다. 그가 귀 기울여 들어주는 동안 나는 왠지 칼을 잃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는 넓고 높이 뜬 달은 휘영청 밝았다. 우리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각자 한 손으로 뱃전을 붙들고 묵묵히 마주한 채로.
---「조원규, 각주구검」중에서

“어느 면으로는 선이 무너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내가 어디서 보고 언제부터 기억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한 번씩 그리운 듯 떠올리는 문장이다.

사그라드는 얼굴, 이라고 생각하자, 남쪽 절들을 보러 다녔던 여름이 기억난다. 선암사, 선운사, 내소사, 송광사, 화엄사. 배롱나무를 많이 보았다. 백 일 동안 꽃이 피고 또 핀다는 목백일홍.

백 일로는 부족해서 사람의 얼굴은 사그라든다. 얼굴을 돌려 다른 데로 향하면서, 다른 길은 없겠는가 하다가 결국은 사그라든다.

공원에서 문득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는 나와 같은 사람들.
---「조원규, 얼굴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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