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초 무슬림 군대가 반도 내 비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려고 작정을 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저항 세력을 근절하지는 않았다. 8세기와 9세기에 반도 북쪽에서 일련의 신생 기독교 제후국들(principalities)이 생겨났고, 그것들은 후에 크고 강력한 왕국들로 발전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이슬람의 정치적 지배에 도전하게 된다. 1492년 무슬림들의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기독교도들이 정복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게 되는 이 길고도 복잡한 갈등과 팽창의 과정을 역사가들은 대개 레콩키스타(Reconquista), 혹은 재정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용어는 그것이 두 라이벌 종교 간의 항구적인 적대와 갈등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잘못된 명칭이다. 사실 무슬림 영토의 재정복이 항상 기독교도들의 전략적 사고를 지배한 것만은 아니다. 기독교 국가들과 알 안달루스 간의 관계는 결코 항구적으로 적대적이지 않았고, 둘 간의 정치적 동맹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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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년 즉위 당시 펠리페 2세는 이미 1543년 이래 여러 번에 걸쳐 부왕(父王)을 대신해서 스페인의 여러 영역을 통치한 경험이 있었고, 1554년 잉글랜드의 여왕 메리 튜더와의 혼인 이후에는 ‘여왕의 배우자’로 활동한 바도 있는 경험 많은 지배자였다. 처음부터 스페인은 펠리페 2세의 지배 영역들 가운데 중심이었고, 펠리페 2세는 1559년 네덜란드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한 번도 반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돌며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 부왕과 달리 펠리페는 신중한 태도와 한곳에 머물러 있는 관료제적 통치 스타일로 유명했다. 1561년 그는 반도의 지리적 중심에 가까운 마드리드를 자신의 항구적 수도로 정하고, 2년 후부터는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48킬로미터 떨어진 곳, 과다라마산맥 남쪽 사면에 거대하고 음울한 엘 에스코리알궁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엘 에스코리알궁은 예로니모회 수도원이었고, 학문의 중심이었으며, 또 통치의 중심이기도 했다. 펠리페는 봄과 여름 동안 엘 에스코리알에 있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가능한 한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그는 사람들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꼼꼼히 국정을 챙겼다. 그 결과 왕은 하루 종일 서류 더미에 묻히게 되었으며, 국왕의 개인비서 곤살로 페레스는 “정책 결정이 너무나 더디게 진행되어서 절름발이도 그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다”라고 불평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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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이 이베리아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고, 1808년 5월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신 조셉 보나파르트를 옹립하려고 한 나폴레옹의 조치는 스페인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지배층은 뒤로 물러나 있었지만 민중들은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중략) 이 지방들의 봉기는 스페인인들이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6년에 걸친 야만적인 전쟁(영국인들은 이를 ‘반도 전쟁’으로, 프랑스인들은 단지 ‘스페인의 궤양’으로 불렀다)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애국자들의 봉기’는 결코 동질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점령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선 사람들 중에는 장기적인 정치적·사회적 개혁에 헌신하고 있던 자유주의적 급진주의자, 플로리다블랑카나 호베야노스 같은 계몽주의적 절대왕정의 공복들, 그리고 구체제의 전통적 특권을 완강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이들에게 개혁 이념은 저주였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맨 나중 집단 중에는 호세 데 팔라폭스(Jose de Palafox)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1808년 봉기 직후 사라고사에서 개인 독재 체제라 할 만한 것을 수립했다. 이 운동에는 다수의 민중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운동에 대한 그들의 열렬한 지지는 신(神), 왕, 국가에 대한 충성심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영주 체제에 억압당해 온 사회적 불만과 증오에 의해서도 추동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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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헌정 시스템의 붕괴는 1920~1930년대에 나타나게 되는 자유 민주주의의 더 큰 위기의 징후였다.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다른 지역의 사회적·경제적 엘리트들에게 권위주의 정부는 완전한 정치적 민주주의 혹은 노동계급의 떠오르는 힘을 막아 줄 성채로 여겨지게 되었다. 프리모 데 리베라의 쿠데타는 처음에는 임박해 보이는 볼셰비키 혁명을 두려워한 군대, 산업가, 지주와 성직자뿐만 아니라, 왕정 복고 체제의 효력이 끝났고, 시급한 쇄신이 필요하다고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쇄신파’ 지식인 엘리트들로부터도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프리모 데 리베라는 호아킨 코스타가 원했던 ‘강철 외과의사’였고, 부패한 정치꾼들에 의해 파괴되어 온 스페인을 회복 혹은 정화하고, 그러고 나서 자신의 과업이 완수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 이전 시기의 혼란과 폭력 사태를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권위주의적인 방식의 일 처리─1876년 헌법의 보류, 언론의 자유와 배심원에 의한 재판의 억제, 파업의 불법화와 정치 활동의 제한 등─가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스페인이 삼키지 않으면 안 되는 쓰디 쓴 약이라고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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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노동당의 지배하에 스페인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많이 변했다. 수아레스 때 시작된 유럽공동체(EC) 가입을 위한 협상이 재개되었는데, 사회노동당은 이 기구에 가입하는 것이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주고, 근대화 과정을 촉진시킬 것이며, 스페인 모든 지역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것은 또 우파 일부가 그렇게도 즐겨 사용했던 “스페인은 유럽 이웃국가들과─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다르다’”라는 상투어구가 사실이 아님을 입증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과정이 고통 없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스페인의 산업이 외국 시장에서 좀 더 경쟁력을 갖도록 계획된 산업 재편 정책은 대규모의 실업 사태를 가져왔고, 그것은 북부 지역의 철강과 조선 산업 중심지에서 특히 심했다. 1985년경에는 경제자유화를 위해 도입한 여러 정책으로 실업률이 22%에 이르렀다. 같은 해 스페인은 오랜 협상 끝에 유럽공동체 가입 조약을 체결하였고, 1986년 1월 1일, 비록 회원국으로서 완전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7년을 더 기다려야 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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