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영혼은 달궈진 쇠처럼 물렁하기 때문에 삶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환경이 그 쇠를 두들겨 모양을 결정한다. 특히 방어구조가 견고해지기 전인 인격 형성기에 거의 형태가 정해진다. 이 시기에 우리는 자신과 현실에 대한 구조화된 혹은 고착화된 인상, 즉 성격을 발달시킨다. 성격은 영혼의 껍질 층을 이루고, 우리는 점점 그 껍데기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내면의 신성과 분리되어 간다.
--- 「들어가기 전에」 중에서
문제의 해답을 바깥에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할 때, 나를 충족시켜줄 것 같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특정한 양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 내면의 공허함을 메우거나 이 공허함을 회피하기 위해 주의를 딴 데로 돌리지 않을 때, 마침내 인생의 바퀴의 위대한 반전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의 경험을 실제로 결정하는 내면의 세계와 우리 의식과 똑바로 그리고 진실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 「1장‘내부 삼각형과 추락’」 중에서
우리의 정신적인 차원, 즉 우리의 본질적인 바탕과 단절되는 것은 성격과 동일화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 말은 최소 인류의 99퍼센트가 그렇다는 뜻이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껍데기를 넘어선 삶을 산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삶의 껍데기를 살면서 그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일은 이미 사회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문명인이 되는 데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되는 과정, 즉 우리의 심원과 단절되는 과정도 포함된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잠에 빠지고 자기를 망각하는, 이런 인간적응 또는 조정 과정이 에니어그램 9번 유형으로 예시화된다.
--- 「2장‘에니어그램 9번 유형-게으른 자아’」 중에서
‘본질’이 인간 내면의 본성이라는 인식이 없으면 자기가 지반이 결여되어 있다고 경험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약하고 무력하다고 느낀다. 자기를 몸 그리고 몸의 본능과 동일시하게 되어 자신에게 유일한 보호수단은 커다란 뇌밖에 없는, 털 없는 동물이라고 경험한다. 몸은 질병과 죽음을 겪는다. 만일 우리의 존재를 곧 우리의 몸으로 받아들인다면 실제로 우리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실재’를 인식하지 못하면 삶은 덧없고 무상하며 영속적인 의미가 없다. ‘실재’와 더 굳건히 연결되어 ‘신성한 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수록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영원불멸하며 몸의 영고성쇠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된다.
--- 「3장‘에니어그램 6번 유형-두려운 자아’」 중에서
과거에 근거한 자신과 객체 관계 속에서 사는 삶만 보여주는 홀로그래피 영화를 모두 놓아버리면 현실과 직접 접촉하게 되고, 과거 대신 현재에 반응하게 된다. 선입견과 감정적인 반응이 사라지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단순하고 비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면 자신이 ‘실재’의 개별적인 발현임을 의식 속에서 이해하고, ‘실재’와 연결되어 ‘실재’를 아는 채로 삶을 살 수 있다.
--- 「4장‘에니어그램 3번 유형-허영적인 자아’」 중에서
자신에 대한 경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성한 완벽’은 우리가 본래부터 무조건적으로 완벽하며, 오직 있는 그대로 올바르고, 무엇을 더하고 뺄 필요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런 이해가 통합되면 내적 작업에 대한 접근이 완전히 뒤바뀐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더 나아지거나 달라질 필요도 없으며,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직 해야 할 일은 본래의 완벽함과 연결되어 깨닫는 것이다. 1번의 깨달은 시각에서 보면 그것이 자신의 내적 작업의 목적이다.
--- 「5장‘에니어그램 1번 유형-분개하는 자아’」 중에서
4번이 내면의 내용물을 완전히 느끼면 느낀 만큼 이들의 의식은 그것을 꿰뚫고 들어가 그 뿌리를 밝힐 수 있고, 결과적으로 그 너머의 심원을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4번이 더욱 더 자기 안에 중심을 잡고 외부로 초점을 덜 돌리게 해준다. 비범하고 흥분되고 극단적인 것을 찾던 노력이 점차 고요함과 단순함을 음미하는 것으로 대체된다.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가 자신의 인간다움에 대한 인식으로 바뀌고, 자신이 그 자체로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 「6장‘에니어그램 4번 유형-우울한 자아’」 중에서
2번과 관련된 덕목은 겸손이다. 이카조는 겸손을 이렇게 정의했다. “몸과 그 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 머리는 자신의 힘에 대해 비현실적인 믿음을 갖는다. 몸은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겸손이란 우주의 규모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따라서 2번에게 내적 작업의 열쇠는 객관적인 자기관념에 이르는 것이다.
--- 「7장‘에니어그램 2번 유형-아첨하는 자아’」 중에서
이카조가 내린 순수함에 대한 정의이다.“순수한 사람은 기억, 판단, 또는 기대 없이 매 순간에 새롭게 반응한다. 순수한 사람은 현실과 그 흐름에 연결된 자신을 경험한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순수함이 의미하는 바는 과거라는 가리개 없이 매 순간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매 순간을 우리 인식에 선입관을 갖게 만드는 기억들 없이 경험한다는 뜻이다. 인식에 영향을 끼치는 과거가 없으면 영혼은 정말로 새롭게 순수하다. 우리의 연상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로워져 그 순간의 경험이 우리 영혼과 직접 접촉하고 영향을 미친다.
--- 「8장‘에니어그램 8번 유형-복수하는 자아’」 중에서
5번이 공허함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경험할 수 있게 될수록 자신이 잃는 것은 오직 자신의 두려움과 자신과의 거리뿐임을 깨달을 것이다. 이렇게 내적 대면을 하면 조금씩 자신과 더 연결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며, 더 강하고 살아 있다고 느낄 것이다.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면 놓을수록 더 많이 갖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놓는 것은 전부 정신적 구성체이고 자기와 타인에 대한 내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메마른 내면의 사막은 점차 광대하고 충만해져서 ‘실재’의 영역에 있는 내면의 보물들이 모두 드러날 것이다.
--- 「9장‘에니어그램 5번 유형-인색한 자아’」 중에서
람 다스의 딜레마는 7번 현상의 모든 표식을 지니는 60~70년대 초반의 히피운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베이비붐 세대가 환각제의 화학적 도움으로 성격을 우회해 지나감으로써 자신의 심원에 눈떴다. 그들이 본 것은 많은 정신적 학파들이 수천 년 동안 가르쳐온 내용, 즉 우리의 근원적인 본성은 사랑이고 우리가 단일체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히피들이 약에 취했을 때 접촉한 진리가 다시 일상으로 내려왔을 때 통합되지가 않았다. 성격의 방어막들을 정신적 작업을 통해 뚫고 지나가지 않고 건너뛰었기 때문에, 그 필연적인 결과로 소화되지 못한 성격의 어두운 측면들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다. 깨달음을 얻은 방식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한 사람의 영혼이 실제로 변하는 것을 대신할 순 없었다.
--- 「10장‘에니어그램 7번 유형-계획하는 자아’」 중에서
내적 작업에 자기 소울차일드를 자각하고 통합하는 과정이 없다면, 그 역시도 활기 없고 성취감을 주지 못한다. 그러면 소울차일드는 좀더 성장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으로부터 점점 달아나 결국 내적 성장에 가장 큰 방해물이 된다. 내가 아는 한 소울차일드에 대해 언급하는 정신적인 가르침은 없다. 그러나 이 구조를 의식에 통합시키지 않고서는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소울차일드를 자각하고 숙고하는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이 내면의 아이와 동일시된 채로 남겨져 절대로 완전히 성숙할 수 없다.
--- 「11장‘내부 흐름과 내면의 아이 소울차일드’」 중에서
에니어그램은 단지 지도일 뿐이다. 에니어그램과 그것이 밝히는 인간의 영혼과 그 영혼의 진화에 대한 정보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니며, 끝이 될 수도 없다. 에니어그램을 분해하고 해독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무리 매혹적이어도, 이 정보가 직접적인 체험과 개개인의 의식 성장을 돕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정보일 뿐이며 그 역할은 우리의 내적 작업에서 방향을 잡아주고 안내하는 것이다. 그 지식을 활용하지 않으면 아무 혜택도 얻을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지식으로만 남는다면 정신을 자극하고 흥미로운 기분전환과 오락을 제공하긴 하겠지만 실질적인 변화의 작업과 혼동해선 안 된다.
--- 「책을 끝내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