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겠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이를 오래 지켜본 의사들은 그 순간을 동시에 느낀다. 상한 아이의 몸이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영원히 아쉬울 부모의 마음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초라한 심폐소생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간은 특별히 더 천천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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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고통이 지배하는 시공을 마지막까지 추스르는 것은 대체로 아버지들이었다. 온정신을 부여잡으며 가족들에게 전화하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슬픈 소식을 전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서류를 정리하고, 병원비를 결제하고, 영안실 직원과 장례 절차에 대해 건조한 대화를 나누는 일. 보이지 않는 사이에 아버지들이 해야 했던 그 많은 일들을 나는 어째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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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일을 겪을수록 감정은 무뎌지고 복잡한 삶은 많은 기억을 지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아이를 잃은 부모의 뒷모습에서 아버지의 어깨를 먼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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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소아응급실에서 때로 보살핌이 필요한 것은 아기보다 엄마, 아빠인 순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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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지원하는 전공의들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히 5년째, 간격이 고른 계단처럼 착착 줄어드는 전공의 숫자는 똑같은 숫자로 착착 줄어드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의 예고편이다. 아이의 혈색, 숨소리, 목소리 하나로도 위험을 잡아낼 수 있도록 수년에 걸쳐 이미 충분히 훈련된 전문의들마저 소아청소년과 진료 현장을 떠난다. 경험의 축적과 전수가 사라지는 소아청소년과, 노인이 사라지는 바다.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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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치료하는 내내 사심 가득 담아 아이들의 보들보들한 손가락을 만지고, 상담하는 내내 욕심껏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에게 건강과 생명을 선물하는 일이고, 세상에서 우리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그렇게 나는,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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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따뜻한 마음을 가진 ‘슬기로운 의사’들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다고 환자들은 호소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 현실의 말과 행동으로 병원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부디 현실 감각 없는 소아청소년과 마니아들이, 쓸데없이 공명심 넘치는 흉부외과 마니아들이, 태아의 심장 소리만 들어도 좋아 죽는 산부인과 마니아들이, 프라모델 오타쿠처럼 작은 장기와 선천성 기형에 집착하는 소아외과 마니아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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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의학은 불완전하고 사람이 하는 일은 어떤 것도 모든 순간 완벽할 수 없다. 그 자연과학의 법칙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누군가 나쁜 짓을 했으니 죽었을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 사회의 무의식이 의사들은 때로 두렵다. 언제부터인가 협력자가 아닌 적이 되고 만 의사와 환자 관계를 생각하면 슬픔과 안타까움, 공포와 주저하는 마음이 동시에 밀려온다. 나는 오늘도 평소처럼 일터로 나가고 아직은 내가 배우고 믿는 대로 일할 테지만, 이런 판결이 반복된다면 앞으로는 어쩌면 조금씩 더 비겁해지고 용기를 잃게 될지도 모르겠다.
--- p.149
법적으로 완벽하게 안전한 수술을 받을 것인가, 의학적으로 현실성 있는 최선의 수술을 받을 것인가. 확률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작용이나 합병증을 해결하려면 최고의 보상금이 필요한가, 최적의 후속 치료가 필요한가. 우리 사회에는 오래된 질문이 있고 우리는 어쩌면 답을 이미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 p.174
몇 년 전만 해도 소아청소년 진료는 날마다 행복하고 기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는데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이제는 좀 지겹다. 다른 직업이라고 쉽겠는가마는, 힘들다기보다 슬프고 화가 난다기보다 상처받는 날들이 너무 많아졌다. 퇴근하는 길마다 쓸쓸하고 공허한 마음. 직업에 실연이라도 당한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축복일까 어리석음일까.
--- p.199
나는 지금도 수많은 동료들의 도움과, 지원과, 응원을 받으며 환자들을 본다. 때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간혹 서로 욕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우리 사이에 환자가 있을 때 우리는 진심이라는 것을.
--- p.209
신고하거나 하지 않거나, 학대 가능성이 있거나 없거나. 나에게 주어진 선택은 그뿐 중간은 없다. 나는 오늘 그렇게 또 학대의 방관자 또는 동조자가 되었다.
--- p.224
어떤 날은 희망을 말하고 또 어떤 날은 침묵해야 하는 나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 또 어떤 결정적 장면으로 남을지 몰라 애써 말을 고르고, 사진으로 상황을 이해시키며 눈물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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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요.” 전공의 3년차였던 어느 가을, 소아중환자실의 보호자가 나에게 건넨 말이다. 그 말은 나의 인생을 바꾸었다.
---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