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쇼군은 본래의 ‘왕자王者’인 천황을 억누르고 권력을 장악한 ‘패자?者’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주자학에서 왕자와 패자, 왕도와 패도가 갖는 정치적 함의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후반 이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자, 본래의 왕자는 천황이며 막부는 그의 위임을 받아 대권을 대행하고 있다는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으로 자기 변호했다. 막부 로주老中이자 당대 최고의 유학자 중 한명이었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아예 일본 전국의 60여주는 천황으로부터 맡겨진 것이라고 명언했다. 오규 소라이나 아라이 하쿠세키는 한때나마 천황을 뛰어넘어 막부의 통치정당성을 사상적으로 확보해보려고 시도했지만 이 시기에 와서 막부는 아예 그런 시도를 포기한 것이다. 막부의 힘이 천황을 압도할 때에는 ‘대정위임론’에 새삼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없었지만, 이 논법은 ‘위임’의 종식과 그 ‘반환’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터놓은 것이기도 했다. ‘대정위임론’은 사실 그 후 100년도 채 안되어 일어난 ‘대정봉환론’으로 가는 길을 예비한것이었다.
--- p.22, 「대정위임론은 논리적으로 천황에게 권력이 돌아가는 대정봉환과 가깝기 때문에 쇼군에게는 위험했음」중에서
후쿠자와의 국회에 대한 낙관은 정부가 초연주의를 주장하고 의원내각제를 사실상 부정하는 상황 속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장차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 정당 내각이 실현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국회가 개설된 이후에도 몇 년 간은 ‘회의의 훈련’이나 ‘의사議事 연습’의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망 속에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무탈하게 보낼 것인가가 관민조화론의 초점이었다. 하지만 제국의회의 현실은 그의 기대를 계속해서 배신했다. 결국 후쿠자와는 정부와 정당 사이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관민조화론을 스스로 부정하는 듯한 국회 해산 등의 수단에 호소해 정당과 힘으로 대결하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 p.92, 「관민조화를 지향했으나 현실정치 속에서 종종 국권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중에서
문제는 이같은 일관된 인식과 정치활동이 내재적으로 완결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주지하듯 근대 일본의 역사는 한국, 중국 등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이기도 했다. 오쿠마의 시대 흐름에 대한 민감한 포착은 일본 국내에서의 헌정 실시에 대한 일관된 인식으로 나타났으나,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한 안이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우세로 전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오쿠마는 일본이 산동성, 나아가 양자강 지역까지 점령할 것을 주장하는 강경론을 내세웠다. 물론 오쿠마가 중국에 대한 침략 행위 자체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중일 간 우호 관계를 심화할 수 있다 보았다. 실제로 청일전쟁, 의화단 사건 이후 와세다대학은 청국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기관인 청국유학생부를 신설하는 등 중일 간 교류와 우호관계 수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21개조 요구를 강요한 것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쿠마 내각 시기에 이뤄졌다. 중국과의 우호 관계 수립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국익이라는 관점 속에서만 이해되었던 것이다.
--- p.143, 「주변국과의 공존을 지향하면서도 청일전쟁에서 강경하게 나아갔던 오쿠마 시게노부」중에서
그리고 슈타인이 본 일본의 이익 강역은 바로 조선이었다. 다만 그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육 · 해상 교전국에 대해 조선의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으로 조선의 중립은 일본의 권세 강역을 보전하기 위해 발생하는 모든 이익을 충족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일본은 조선 점령이 아닌 “조선의 현상을 보존”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일본의 이익 강역은 조선의 중립을 인정하는데 있으므로 적어도 이를 방해하려 하는 자가 있을 때는 힘을 다하여 이를 간섭해야 한다” 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하는 논리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은 적군의 통행 또는 일부 영토 점령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러한 경우에 전력을 다하여 막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병력을 파견해둘 수밖에 없다” 라고 하여 조선의 독립 유지 가능성을 부정하고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상주시킬 필요성까지 언급하였다. 이는 앞서 ‘군사 의견서’에서 확인한 야마가타의 대조선 방침 및 조선 인식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 p.207,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한 야마가타가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으로 정의하게 된 계기」중에서
메이지 국가 건설기 일본을 부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본이 문명국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본이란 국체를 시각화하기 위해서 미술이 소환되는 중요 장면마다 고운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미술가로 인정받아 태정관 차관과 동격인 종삼위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게 ‘국가 미술가’라는 호칭을 붙이기 조심스럽다면, 그것은 그에게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가 국가 건설에 기여한 바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국가’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지 못한 직인의 작업이 ‘국가의식’ 형성에 기여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국가에 필요한 것은 국가를 이성적으로 이해한 국민이 아니라 국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도 충성하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신을 모르고도 신앙을 키우는데 불상이 기여하는 바와 같이 국가를 모르고도 애국심을 기르는 데 고운의 조각이 천황을 매개로 기여한 것이다.
--- p.273, 「다카무라 고운의 기여에 대하여」중에서
나는 두 개의 J를 사랑하고 세 번째는 없다. 하나는 예수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다. 예수와 일본중 어느 쪽을 더 사랑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예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일본 때문에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국가적이고 협소하다고 미움을 받는다. 이로 인해 나는 친구를 잃을지도 모르지만 예수와 일본을 잃을 수 없다. 예수를 위해 어떤 다른 신을 나의 신이나 아버지로 삼을 수 없고, 일본을 위해 외국인의 이름으로 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다. 굶주림이 오고 죽음이 와도 나는 예수와 일본을 버릴 수 없다. 선교사들이 그 이름을 싫어하는 것을 알지만 나는 결단코 일본의 크리스천이다. 예수와 일본, 나의 신앙은 중심이 하나인 원이 아니라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다. 내 마음은 이 두 가지 소중한 이름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리고 한쪽이 다른 쪽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는 나의 일본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하고 순수하게 하고, 일본은 나의 예수에 대한 사랑을 명확히 하고 객관화한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나는 단순한 몽상가, 광신자, 부정형의 보편적인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 p.331, 「우치무라 스스로가 설명하는 두 개의 J」중에서
우메코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황실 및 화족여학교와의 관계를 끊는 배수의 진을 쳤다. 그것은 일본에서 15년 동안 누렸던 최고의 지위와 대우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대신 오랜기간 자신을 얽매었던 보수와 관습, 그것을 강요하는 일본 정부와 관료주의로부터의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계급과 관습과 이름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고백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계급과 관습과 이름에 얽매이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과 같이 우메코가 일본의 정부, 정부가 세운 여자학교와의 관계를 끊은 것이 결코 그들과 대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협력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도 그리고 일본 여성을 위해서도 우메코는 일본이라는 국가 혹은 그 정부 나아가 그것을 구성하는 남자들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협력하는 관계를 원했고 궁극적으로는 일본이라는 국가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미국 유학과 일본으로의 귀국을 거듭하는 남다른 여정을 경험했지만 그 모든 것이 일본 여자, 나아가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일본’을 위한 것으로 귀결되었던 셈이다.
--- p.390, 「쓰다 우메코가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는 과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