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을 가두고 하늘을 향해
쉼 없이 오른 편백扁柏의 노동이
거대한 군락의 발화점이 되었다
제방의 물길이 어디로 흐르는지
힐끔힐끔 목을 내밀며 그려낸 나이테는
벌써 백 번의 원심력으로 시도되고 있다
이민족을 위한 생명수가 마련된 거처
강제한 이식의 역사 속으로
뿌리를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게다
한 뼘씩 식민의 아픔을 속죄하며
고백하듯 뿜어내는 피톤치드는
오늘의 숨결을 바로잡는 성사聖事였다
그 키 높이만큼 이어진 순례길
변하지 않는 기도의 꽃말처럼, 저만치
물의 지문들이 성큼성큼 찍혀오고 있다
---「김요아킴, 성지곡 수원지」중에서
새벽녘, 아파트 입구 편의점을
기습한 멧돼지 소식에 당황한
증거들이 현장에 널브러져 있다
산에 있어야 할 야성을
어찌 이곳까지 옮기려 했는지
지나온 족적이 궁금하다
산자락에서 박살 난 유리문까지는
가늠할 수 있는 세월에 반비례해
난무한 욕망의 뻘밭을 지나야만 한다
분명 콘크리트로 다져진 단단한 신념과 냉정하게 가로지른 아스팔트의 무거운 침묵, 그리고 골목 담장 높이 견제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무사히 횡단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 관문을 통과해야 할 한 생명의 욱신거림이 고스란히 CCTV에 매달려 전해온다
매번 등산화 동여매고 역으로
그 길을 탐문할 때마다, 곳곳의
그 흔적들을 이어 붙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김요아킴, 백양산자락을 이어 붙이다」중에서
눈 감으면
투박한 도그리브어*
헝가리어나 이누이트어로 속살대는
바람의 찬트
눈뜨면
기울어진 능선 타고
끓어오르는 바다
보여주렴, 모두에게,
예배당, 텅 빈,
끝을, 전부를,
돌려받고 싶었어,
갓 태어난 세계의 잡동사니
제자리에 놓인 다리는 어디에도 없고
큰소리로 마지막이 결정됐느냐고 묻고 싶지만
검은 공동空洞 가득 파도를 채우고
온몸을 흔들며 눈빛[雪光]을 털어봐도
희망은 역시 빈자리로 흘러든다
냉혹한 중력
왜곡된 각운과
분명해진 불꽃이 슬금슬금 다가올 때
담담한 마오리어
헬라어나 리보니아어*로 흥얼대며 하루 한 번
뒷머리 빗은 카이로스가 달려오지만
벌거숭이가 흘리고 간 칼자루를 주워
뒤늦게 꼭대기마다 오르는 건 언제나 사람
내가 잘 아는 뒷모습이었다고 쓴다
아홉 개의 고비와
아홉 밤의 절정마다
어제 삼킨 해와 달
밤에 부순 목숨들 떠올리며
깎아지른 절벽 아래
입이 없는 한 사람
울음 다한 눈으로 가라앉은 수평선을 좇는다
뜨겁게 손발을 닦는다
* 「배송원들」, 『에어리얼』 실비아 플라스, 진은영 역. 엘리(2022)
* 도그리브어Dogrib: 캐나다 노스웨스트 준주의 도그리브족 1,735명이 사용하
는 언어(2016년 기준, 위키백과).
* 리보니아어l?vo k??: 북유럽 라트비아의 리보니아족의 언어. 2013년 6월 6일
마지막 사용자 그리젤다 크리스티나가 향년 102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사어
가 되었으며 현재 제2외국어로 약 40~220명이 사용 중이다(위키백과).
---「정은영, 혼자 아홉 개 검은 알프스의 모든 꼭대기에서」중에서
가정假定과 부재不在의 날들 속에 핀
미세한 보풀을 찾아
손톱을 세워 뜯는다
평형추는 어제보다 가벼워
떨거나 심지어 혼자서도 비틀거리지
무얼 지키던 중인지 모르고
내일을 꿈꾸지만
비가 와도 정화되지 않아
누구와도 공감되지 않아
함께하면 더욱 허기가 지고
나를 죽이고 싶은 나와
내가 죽은 내가 만나 만들어낸 침묵은
홍수 속에 우뚝 솟은 유일한 미끄럼틀
줄지어 매달린다
오르락내리락
태양은 높고
모자람 없이 빛나는데
은총의 빛을 받기 위해
열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이렇게 너는 살아 있다
---「정은영, 있다」중에서
장미는 별을 보며 붉어간다지
문장을 넘길 때마다
장미는 겹겹 불의 이파리였다지
완성된 불꽃을 건네줄 애인도 없이
나는 혼자서 시를 읽네
시들기 전에
한 문장 한 문장을 꽃잎처럼 뜯어내면서
오래된 시의 집을 허물고 있네
별이 된 시인과 장미에 대해 생각하네
별들은 어둠을 겹겹이 입고
꽃잎은 붉은 향기를 위해 겹겹 쌓이고
꽃잎을 버리고
봄밤을 견디는 시절이 지나가고 있네
---「김미옥, 겹겹」중에서
우리는 백사장에 둘러앉아 모래의 책을 읽고 있었다 한번
읽으면 다시 읽을 수 없는
어떤 페이지 속에선 희고 곱고 여리디여려 금방 무너져
내릴 모래성을 쌓기도 하였다
바닷물에 밀려가고 밀려오는 가벼워질 슬픔은 잊기로 했
다
야! 눈이다
해변 저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너무 가까워 보이지 않는 떨림으로 허공 가득 눈이 내리
고 있었다 부드러운 동작으로,
춤을 추듯 내려앉는
먼 곳의 낱말들
오래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저마다 갖고 있던 마음의
볼륨을 낮추며 우리는 잠시 말을 버렸다
첫눈은 금세 멎었고
우리는 다시 모래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김미옥, 모래의 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