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과 함께 실제 거리로 나가 벽이나 전신주에 붙은 벽보나 포스터, 표식, 간판 등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의 관찰을 시작했다. 그것이 또다시 다른 가지로 뻗어나가 현대예술 놀이가 생겨났다. 즉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목재나 그 이외의 생활용품이 일상을 초월한 상태, 도로 공사로 생기는 구멍이나 쌓아 놓은 흙, 점멸하며 반짝이는 표식 등을 보며 “앗, 현대예술이다!”라고 손으로 가리켜 외치면 그것이 개념이 되었다. 더불어 이것은 화랑이라는 공간에서 숨 쉬며 획득하는 예술 스타일을 향한 아이러니기도 했다.
--- p.14~15, 「아카세가와 겐페이, 「나는 어떻게 노상관찰자가 되었는가」」중에서
이렇게 우리 노상관찰은 예술과 박물학을 그리운 고향으로 삼고, 고현학을 어버이로 여겨 탄생해 성장했으며, 전문 분화 학문에서 벗어나 소비제국과 싸우고, 또한 피를 나눈 형제인 공간파와도 안녕을 고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장소에서 혼자 외롭게 떨고 있었다. 이곳은 시대의 끝인가, 낭떠러지인가, 도대체 어디인가!
--- p.41, 「후지모리 데루노부, 「노상관찰이라는 깃발 아래에서」」중에서
미나미 화랑에서 뛰쳐나와 다양한 예술을 발견하는 일은 단순히 엄청 재미있습니다. 즉 처음에는 그저 패러디죠. 현대예술이다 뭐다 해도 밖에 굴러다니는 이런 것들과 같지 않느냐고 하면서 깔깔대는 게 현대예술 놀이예요. 그러다가 그런 놀이의 시선이 예술가 본인과 동일해집니다. 즉 평범한 사회인은 그런 시선을 가지지 않았기에 보통은 하지 않죠(웃음). 맨홀 뚜껑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일은 평범하지 않아요(웃음). 이건 거의 예술가죠.
--- p.55, 「「거리가 부른다」」중에서
아카세가와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 가치가 없는 것에 자기가 직접 가치를 매기는 일은 정말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 p.115, 「「거리가 부른다」」중에서
후지모리 아이의 눈은 그런 걸 발견하죠. 그러니 노상관찰의 기초는 아이의 눈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신도 될 수 없고 우주인도 될 수 없지만, 소년 시절로는 돌아갈 수 있습니다.
--- p.153, 「「거리가 부른다」」중에서
수면에서 눈을 들어 그쪽을 쳐다보려는데 스윽 하고 강 한가운데를 무언가가 천천히 떠내려갔다. ‘앗, 태아다!’ 그것은 비웃음을 피하려고 자기에게 하는 농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명치를 꽉 누르는 듯한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환각이다, 환각.’ 하고 되뇌었다. 그런데 ‘환각이다, 환각.’ 하고 되뇔수록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태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기분 나쁜 느낌은 들지 않았다.
--- p.183, 「미나미 신보, 「고현학 숙제─1970년 7월에서 8월」」중에서
최근 거리에서 자유롭게 풀어놓고 기르는 방목견을 만나면 내 걷는 방식이 개와 아주 비슷하구나 생각한다. 특별히 따라 하지는 않지만, 길 주변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면서 평면적으로 사물을 보는 방식이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단조로운데 아직까지 싫증이 나지 않아 신기하다. 그렇더라도 내가 개와 비슷하다고 깨달은 뒤부터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텔레비전 병에서 탈출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는데 이번에는 개처럼 걷는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 p.206~207, 「하야시 조지, 「거리를 걷는 올바른 방법」」중에서
어제까지 높이 솟아 있던 굴뚝이 발아래에 무수히 많은 벽돌 파편이 되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작은 파편을 하나 주워들었다. 검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날마다 멀리에서 바라보았던 굴뚝이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적어도 이 벽돌 파편만이라도 남겨두어야겠다 싶어 소중히 안고 돌아왔다. 그 무렵 전후해서 집 근처에 있던 경찰서나 소방서도 재개발로 철거되어 그곳의 파편들도 마찬가지로 주워 왔다. 그렇게 나의 파편 모으기가 시작되었다.
--- p.241, 「이치키 쓰토무, 「건물 파편을 줍다」」중에서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은 정의(定義)가 아니라 실례(?例)다. 이와 같은 훌륭한 격언을 서두에 넣고 싶었다. 박물학에 대략 다음과 같은 사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미리 독자에게 밝혀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물학자는 근시고 사생활이 비참해야 한다.
--- p.367, 「아라마타 히로시, 「박물학은 노상관찰의 아버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