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행성대에서 제일 평화롭고 안정적이라는 인디콜에도 여러 유형의 범죄가 존재합니다. 특히 납치는 은하 공용어를 모르는 성민, 또는 일상 적응 초기 클론을 표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찰 당국이 언급한 탈출하는 “클론 부류”는, 일상에 완벽히 적응하다 못해 더 많은 권리를 원하게 된 클론에게 해당하는 경우이니 마야에게 대입하기에 무리가 있는 추측이지요. 냉정히 판단했을 때, 암암리에 끊이지 않는 클론 불법매매일 확률이 더 높았습니다. 조사를 위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암시장이었습니다. 초기 인간족이 인디콜의 대륙 대부분을 차지해버린 것에 비하면, 암시장의 크기는 점 하나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시장과 그 주변에 형성된 마을에는 저와 같은 존재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제거하거나 감추고서 살아가는 혼종 인간족들이요. 그림자로 지내며 낮과 밤의 온갖 비밀을 기척도 없이 듣는 데는 도가 텄다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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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는 이를 악물고 돌담을 붙들었다. 집 뒤쪽 측백나무에는 축대가 있어 가시철조망을 하지 않은 듯했다. 다행인가, 아닌가. 겨우 위로 올라선 동해는 밭은 숨을 내쉬며 집 가까이로 다가섰다. 숨을 크게 들이키며 위를 보는 순간, 2층 창에서 한 여자가 나타났다. 너무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엔 표정조차 없었다. (...)
“저 여자 뭐야?”
두려움에 질려 작게 읊조렸는데도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문이란 문은 다 열어보던 도희가 동해를 돌아봤다. 동해의 시선을 따라 2층 창을 보지만 조금 열린 창문 너머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급히 물었다.
“어디요?”
“2층, 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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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시죠? 그 뇌 옮길 때마다 정체성 문제 생기는 거요. 지금 뇌를 바꾸면 적응 시간이 또 한참 걸리고, 반만뜬백조날개 타자성 지수가 너무 올라서 힘드실 텐데.”
“반만뜬백조날개 뭐요?”
“타자성이요. 이것도 콩나무 잭 박사의 이론이에요. 콩나무 잭 박사가 유년기에 콩나무를 타고 콩나7우주로 올라갔을 때 경험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면서 만들어낸 이론이죠. 나는 나고 남은 남이어야 하는데, 뇌가 바뀌면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 재정립 기간이 필요하거든요. 그때 반만뜬백조날개 타자성 지수가 올라가면서 남과 내가 잘 구분되지 않아요. 남의 고통과 기쁨을 자기 걸로 착각하는데 특히 고통에 예민해요. 지구에서 반만뜬백조날개 타자성 문제를 겪으면 예후가 좋지 않아요. 지구인들은 고통을 좋아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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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선희가 한국 사회에 제공해온 서비스였다. 나쁘진 않았다. 유행에 약한 한국인답게 흉은 흉대로 보면서 외국인 예능을 즐기는 건 꽤 재미있기도 했다. 게다가 선희는 한식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다. 얼굴에 고생한 티 안 나는 사람들이 선희가 잘 아는 음식에 대해 이래저래 말을 보태는 모습을 보는 건 확실히 재미있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얘기를 낯설게 보이는 사람이 굳이 새롭게 하는 것. 그것도 백선희라는 필자가 취급하는 품목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살지 않는다. 가끔은 에미 노릇도 해야 하는 법이었다. 선희가 가진 정체성 중에 요즘 제일 골치를 썩이는 것은 역시 어머니 역할이었다. 선희는 딸과 썩 가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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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룬체첵이 여자 일만 잘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보르후가 남의 집 가축을 치는 동안에 이제는 출룬체첵이 얼마 안 되는 자기 집 가축들을 너끈히 건사하고 다녔습니다. 힘이 워낙 세서 고집 센 짐승들도 고집을 피우지 못했고, 가축을 지키는 게 아이 혼자라면 당연히 꼬일 법한 심보 검은 개놈들도 그 아이가 소를 구렁에서 잡아 끌어내고 바윗돌을 밀쳐 치워버리는 걸 보게 될 땐 주춤했습니다. 이웃 아저씨, 할아버지가 출룬체첵에게 돌팔매와 활 쏘는 법을 가르쳐주어서 출룬체첵은 가축을 돌보면서 눈에 띄는 대로 사냥도 해왔습니다. 활 솜씨는 그다지 좋지 못해도 돌팔매는 아주 적성에 맞아, 그녀가 던지는 돌은 일직선으로 화살보다도 더 빠르게 날아가 표적을 묵사발로 만들었습니다.
--- p.193
“한국전쟁 피난 때, 밥도둑컴퍼니 초대 사장님이 옆구리에 끼고 부산까지 피난 갔다던 그 김칫독이요. 막내아들은 못 챙겼는데 그 김칫독은 챙겼다잖아요. 저 60주년 기념 김칫독도 전설의 김칫독을 미니어처 버전으로 만든 거고요. 정말 모르세요?”
안하민은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 두 눈을 끔벅였다. 장수민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설명을 이었다. 분량은 적지만『밥도둑컴퍼니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김칫독은 500년 전에 만들어졌어요. 떨어뜨려도 절대 깨지지 않고 신기하게도 굉장히 가볍다고 해요. 무엇보다 그 김칫독에 김치를 담구면 헛것이 보이고 숨을 쉬지 못할 만큼 김치 맛이 끝내주게 익어요. 비늘김치, 배깍두기, 덤불김치, 부추김치, 파김치… 뭐든요. 그래서 환상적인 김치찌개, 김치찜,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김치전을 만들 수 있게 한다고요.”
“그, 그, 그런 김칫독이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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