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말이야…….”
나는 지금도 리이치로를 ‘당신’이라고 부른다. 이상한 건가? 물론 달콤한 ‘당신’은 아니고, 어미에 ‘말이야’가 반드시 붙는 설교 투의 당신이다.
“이혼한 부부가 결혼기념일에 같이 식사한다는 것에 위화감은 못 느껴?”
“못 느껴.”
“그럼 좀 느껴줄래? 난 말이지, 디저트로 멜론이 나올 때쯤 우리 이런 식으로 자꾸 만나면 안 되는데, 부도덕한 짓인데, 라는 생각이 들거든.”
“어차피 생각할 거면 디저트 나올 때쯤이 아니라 레스토랑에 오기 전에 생각하지 그래.”
“그게 맛있거든, 고베산 비프스테이크.”
“결혼기념일이 이상하면 이혼기념일에 만날까?”
그날은 밸런타인데이다.
--- p.017
1년 3개월의 결혼 생활.
이혼 서류를 앞에 두고 ‘우리, 각자의 인생을 다시 살아보자’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이 과연 각자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잘 지내?”
“좋은 남자 찾았어?”
만나면 늘 그런 식의 인사를 했다. 센터거리 던킨도너츠 안쪽의 2인용 테이블 석에 앉아 바나나머핀을 앞에 놓고 서로 근황을 보고 하는 관계. 물론 용건은 그녀가 부탁한 책이 들어왔으니 전달해준다는 거였지만 무의식중에 서로가 만날 구실을 찾았다.
--- p.028
“그러니까 나 같은 건 빨리 잊어버려.”
하루도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음울한 목소리로 들이대는 듯한 말투에 나도 불끈 화가 치밀었다.
“이봐 잠깐, 애원하는 옛 애인을 뿌리치는 듯한 말투는 좀 삼가지 그래.”
“헤어진 남녀가 밤 한 시가 넘은 이 시간에,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데?”
“네가 공연히 과민 반응을 보여서 사랑싸움하는 꼴이 됐잖아. 술 취해 돌아가는 길에 들른 도넛 가게에서, 너와 사귀던 때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을 뿐이야. 그 어떤 여자보다도 오랜 시간 함께한 건 사실이니까.”
“잊어버려.”
“잊었어.”
“나 같은 건.”
“너 같은 건.”
--- p.061
“어떤 책에 쓰여 있었어. 이혼은 《아기돼지 삼형제》의 집짓기와 같다고.”
“늑대가 덮친다는 이야기 말이지?”
“맞아. 요컨대, 이혼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남편과 함께한 그때까지의 집을 부수고 새롭게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이다. 세상의 모진 풍파와 때로는 늑대의 그림자까지 어른거리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 볏단 집을 지을 것인가, 나무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릴 것인가…….”
“언니는 어떤 집을 선택했어?”
아직 재료도 못 고른 상황이지
--- p.113
“기껏해야 타월이니 바지 같은 걸로 싸우고 싶지 않았거든.”
“싸우면 좀 어때! 남자랑 여자가 어린애 같아지는 것이 부부라면 우리는 좀 더 싸웠어야 했어, 애들처럼!”
--- p.178
‘리이치로의 아이를 다시 한번 낳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리이치로와 다시 시작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야. 그런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엄마는 되지 않을 거야. 또다시 사랑은 하게 될지 모르지만, 결혼은 안 할 거라고.’ 그래서 내가, 그럼 뭐야, 이혼한 상대에게 평생 절개를 지키면서 살 생각이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하루는 ‘그래, 리이치로가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행복하게 결혼하고 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는 먼발치에서 지켜봐 줄 거야. 그이의 행복을 마음으로 축복해줄 거야.’ 그렇게 말했다고, 하루는.
--- p.314
“하루 씨가 이혼하고 싶단 말을 꺼내고, 사산하던 날 밤의 외로움을 이유로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리이치로는 그날 밤 일을 말하지 않았어요. 털어놓을 기회를 놓쳤겠죠. 새삼 ‘그날 밤 사실 신노스케 옆에 있었어’라고 말할 수 없었던 거예요. 사산이라는 상처를 계속 안고 가는 결혼 생활 속에서, 리이치로는 하루 씨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도 없었고, 그 상태로 어떻게 밝고 즐겁게 살아야 할지 몰랐던 거죠.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는 생각도 못 했고……. 어쩔 수 없이 약한 녀석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껍질에 갇혀버리고 만 남자. 녀석은 하루 씨가 헤어지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었던 거예요. 그러기 위해선 ‘사산으로 힘들었을 때 자신이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라는 알기 쉬운 이유가 하루 씨에게 필요하다고, 녀석은 생각한 거죠.”
--- p.467
리이치로가 결혼한다. 내 곁을 떠나가버린다. 나는 어쩌다 이런 곳에서 이런 말을 외치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다…… 급기야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뺨을 적셨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오열. 식장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문 가까이에 있던 시즈카는 이 사태를 대체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신랑 측 맨 앞자리에 앉은 모리이치 씨와 교코 씨가 애처로운 나머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신부 측 하객 대부분은 내가 리이치로의 전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미코 씨의 아버지는 기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pp.479~480
“우리 말이야.”
가사를 몰라서 허밍으로 부르게 됐을 때쯤 하루가 말했다.
“관계의 거리라는 걸 잘 모르는 남자와 여자였나 봐.”
“관계의 거리?”
“항상 강한 남자와 강한 여자로 있고 싶었으니까, 서로가 정말 힘들거나 슬플 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어. 상처 입은 사자가 서로 상처 부위를 핥아주는 것처럼 우린 왜 못 했을까.”
“자존심이었겠지.”
“저런 바보 같은 여자에게는 위로받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바보 같은 여자 아니야, 너는. 너무 완벽한 아내였어.”
“그래서 더 자신의 약점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 아냐?”
“시비 걸지 마.”
“시비 거는 거 아니야. 알고 싶을 뿐이야.”
--- p.525
나는 그 뒤에 연결되는 문구를 알고 있었다. 결혼식에 어울리는 말로서 아카사카의 목사님이 알려주신 것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아버지는 성경 책을 덮은 것 같았다. 자애로운 눈빛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간절히 기도하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평안한 행복을 네 손으로 붙들기 바란다. 알았지, 하루?”
내 이름을 불렀다.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전화 상담자가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언제부터였을까?
--- p.532
“너를 행복하게 하는 거, 다시 한번 시작하는 거…… 한 번 실패한 우리라서 겁쟁이가 되어 있었어. 또 실패할지도 몰라. 아니, 우리니까 분명 실패투성이에다 너를 또다시 상처 입히고 말 거야.”
소심하게도 말끝이 잦아들고 말았다.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용기를 북돋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고, 다시 한번 하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너에게 두 번 다시 등 돌리지 않아. 네가 울 때 옆에 있어 줄게. 네가 원한다면 손을 뻗어서 머리를 쓰다듬어줄게.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면 두 손으로 감싸줄게. 혼자서 슬퍼하게 하지 않을 거야. 그 대신 네가 즐거울 때는 기쁨을 나눠줘. 행복을 독차지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나는 너랑 같이 웃고 싶고 같이 울고 싶고 화내고 싶고 같이 잠들고 싶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사랑해, 하루.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젠 헤어지고 싶지 않아. 너를 행복하게 해줄 때까지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나 노력해보고 싶어.”
--- p.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