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나 알게 된 너와 나
자주 만나 정이 들고
마침내 서로 눈먼 바보가 되었다.
우리 사랑만은 영원하리라고
누구도 갈라놓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약속했지만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세월 가면 모든 것이 그렇고 그러하듯이
우리 사랑도 세월 따라 시들고
이제 한 줌 추억으로 남았다.
사랑 뒤에 오는 눈물 젖은 이별
내 능력을 초월한 절벽
발아래 공포되어 가슴을 뒤집는다.
사랑은 기적을 남기고 떠나가고
떠난 사랑은 마음에 별이 되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되었다.
내 사랑만은 영원하리라 믿었다. 스치는 옷깃의 인연으로 만나 눈먼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연인이 되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이유 없이 좋았다. 하루가 한 시간 같고, 한주가 하루처럼 흘러갔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고 또 십 년이 지나더니 어느 새 오십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함께 했던 많은 시간들이 이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 텅 빈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만나 수다를 떨던 시간들,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 봄 오는 길목에서 함께 보았던 숱한 꽃과 잎새들 그리고 함께 공유했던 감정들, 경포대 여름 바다에 몸을 담그고 살결을 부딪치며 물장구치던 순간들,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함께 봤던 로맨스, 유원지로, 고궁으로,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쏘다니며 나눴던 유치했던 대화들, 팔짱을 끼고 함께 걷던 휘황찬란한 명동거리, 덕수궁 돌담길, 인사동 뒷골목 허름한 음식점에서 파전을 시켜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시간들 이제 모두가 우리들 사랑의 역사가 되어 추억으로 남아있다.
함께 하는 것은 바로 기쁨이요, 희망이요, 행복이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즐거웠고, 완벽했다. 바로 우리들의 유토피아였다. 이 대로 세상이 종말이 된다고 해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었다. 삶이 매일 지지 않는 무지개였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던가? 여름 바다가 한산해진 가을비 내리는 어느 날 그녀는 “안녕~”이라는 쪽지 한장 달랑 남기고 떠나갔다. 장난인 줄 알았다. 그 뒤로 하루가 멀다 하고 주고받던 소식이 순간에 끊긴 것이다. 실성한 사람처럼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다. 응답도 없었다. 아! 이럴 수가? 그토록 밝던 세상이 순간 어둠으로 변하고, 희망은 절망으로, 기쁨은 슬픔으로, 천국이 지옥으로 바뀌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고통이요, 숨 쉬는 것도 힘이 들었다. 사랑이 열병이라면 이별은 차가운 죽음이었다. 모든 생각과 사고가 정지되고 떠난 이유와 원인이 궁금했다. 내가 뭘 잘 못 했지?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그렇지 않다면 싫어졌나? 그 이유는? 영원히 사랑하자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나? 이런 의문들이 머리에 가득 채워졌다. 남의 머리가 내 머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만나서 자초지종이라도 묻고 싶었다. 전화를 걸어 물어보자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원이니 딱 한번만이라도 만나보자고 내 생애 가장 비굴한 편지를 써서 보냈다. 답신이 없다.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응답이 없다. 여러 번 시도 했으나 역시 무응답이다. 전화를 받지 못할 만큼 몸이 많이 아픈 건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했다면 지금쯤 높은 자리 한나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께 이런 열정을 쏟았다면 효자 소리라도 들었을 것이다. 며칠이 지난 후에 답신이 왔다. “그동안 너무 즐거웠다. 우리들의 만남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했으면 좋겠다. 고마웠고, 미안하다” 짤막한 내용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가 잘 다니던 장소에도, 함께 거닐었던 거리도 가보았다.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상사병이 이런 것인가 보다. 만나지 못하면 당장 미쳐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다 못해 창피함을 무릎 쓰고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마지못해 만난 둘은 지난날과 같은 친근감과 다정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색하게 서서 겸연쩍은 모습으로 마주 서 있는 것이 마냥 부자연스러웠다. 잠시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가 “그동안 자~알 지냈어?”라는 말로 말문을 열었다. 대답 대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고 싶던 사랑했던 그녀가 지금 내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 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왜 연락이 없었어?” 말이 없다. 어디 아프진 않았지? 그녀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나를 피하는데? 또 대답이 없다. 대신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마음이 미어진다. 가까운 다방에 가서 커피나 한잔하자며 뒤돌아섰다. 그녀가 말없이 따라왔다. 자주 들렸던 다방에 도착하여 익숙한 창가의 자리에 마주 앉았다.
물 잔을 앞에 놓고 둘이 앉았다. 한참 침묵이 흐린 뒤에 주문한 커피를 다방 아가씨가 가지고 와 우리 앞에 놓았다. 커피에서 김이 모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커피향이 오늘은 유난히 쓰다. “나 많이 보고 싶었어. 왜 전화해도 안 받았어?”라는 질문에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를 사랑한다면 다시는 묻지 말고 놓아달라고 했다. 그녀도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고, 고민도 많이 했으며 당신 이상으로 괴로웠다고 했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은 것이 더 좋다며 그간 우리의 소중했던 시간은 추억 속에 간직하며 살자고 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인가? 속이 답답하다. 답답하다 터질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선 데리고 무인도나 먼 나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더는 묻지 말고 놓아 달라고 하니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사랑하니까…… 이렇게 우리들의 첫사랑은 추억이 되었고, 추억은 늙어 그리움이 되었다. 그리움 너머 또 그리움이 되었다.
---「사랑이 그리움 되어」중에서
그리워할 것이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메마른 삶 속에서 보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냥 그리워할 이유가 없다. 그리워할 사연이 있기에 그리워하는 것이다. 잊지 못할 애절한 사연이 있기에 그리워하는 것이다. 만나면 해결되는 문제가 그리움이다. 그러나 보고 싶어도 당장 보지 못하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거나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기에 그리움을 병처럼 앉고 살고 있다.
누구나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존경하던 스승이 될 수도 있고, 소꿉쟁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짝사랑했던 여인이 될 수도 있고, 사랑하던 연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사람들이다.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이 바로 그리움이다.
내게도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은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찾아가 만나면 그리움이 사라지겠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도 있고, 소식이 두절되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렵기에 망설이다 더 그리워지는 사람도 있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빚어진 그리움을 잃을까 싶어 겁이 나는 것이다. 실망이 된다 해도 딱 한번 만이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만날 길이 없다. 그러기에 더 그리운 사람이다.
내가 그리워하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도 나를 그리워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래도 상관은 없다. 내 그리움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그리움에 목말라하고 애달아 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겐 기쁨이요 행복이다. 물론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도 날 그리워해 주면 좋겠다. 짝사랑도 좋지만 둘이 사랑하는 것이 더 좋듯이 그리워하는 것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함께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걸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아직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까닭은 잊지 못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핀 5월 어느 화창한 봄날 대학 캠퍼스에서 우연히 내 사람을 만났다. 사랑이 봄 바람 타고 날 찾아온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봄과 함께 꽃이 피기 시작했다. 순풍에 돛 단 듯 우리 사랑은 그렇게 봄여름이 지나갔다. 초가을 바람이 소슬하게 불던 어느 날 밤 불빛이 휘황 찬란한 명동거리를 거닐며 했던 약속이 지금 마음을 태우고 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던 시간 부귀영화는 아랑곳없이 그저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로 한 약속이었다. 가식도 없고 수식도 없이 그냥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했던 약속이었다. 약속이라기보다 언약이 더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른다. 약속은 지키기 위하여서 하는 것이라는 데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고 말았다. 낙엽이 지기 시작하던 10월의 마지막 날 만남을 끝으로 우린 서로 헤어져야 했다. 그 후로 반백 년이 지났다. 세월은 흘렀어도 그리움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아직도 생각나는 그 약속 가만히 읊어 본다.
가을엔 사랑하자고 했지요?
그 말씀 찰떡같이 믿었는데
그 가을이 쑥떡처럼 가고 있습니다.
기다리라고 했지요?
가을엔 꼭 돌아온다고
단풍이 지는데 홀로 쓴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행복이라고 했지요?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날 지경인데
밤하늘에 외기러기는 왜 저리 슬피 울며 날아 가는가요
추억이 익으면 그리움이 된다고 했지요?
그리움이 깊어 가슴이 타 가는데
임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입니다.
가을밤은 깊어가고
추억은 그리움으로 익어 가는데
그리운 이는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다 잊고
그리운 사람
그리운 대로 그리워하렵니다.
---「그리운 것들은 그리워하며 살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