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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엽서

: 재미동포 이성재 작가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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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2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232쪽 | 441g | 152*225*20mm
ISBN13 9791156345664
ISBN10 1156345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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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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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사랑한 세 여인이 있었다. 바람둥이라고 해도 좋다. 아내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내로남불이라고 하더니 그것도 자랑이라고 하는 것이냐 해도 상관없다. 나는 오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실은 병석에 누운 아내의 권유로 나가는 장소다. 아내는 “당신 그녀를 사랑하잖아요. 당신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해요.” 뜻밖의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근데 여보 난 당신을 사랑해” 나의 말에 아내는 이렇게 응수했다. “알아요, 그렇지만 당신은 그녀도 사랑하잖아요.”

아내가 만나라고 한 다른 여자는 실은 나의 어머니였다. 미망인이 되신지 벌써 몇 년이 되어 외롭게 사시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어머님은 모르시지만, 특히 지난 3년간은 췌장암으로 생명이 위독한 아내를 돌보느라 어머니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혹시 나쁜 일이라도!” 우리 어머니들은 저녁 늦게나 특히 아침 일찍 전화가 걸려오면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해지는 세대의 여인들이다. 잠시 후 어머니는 “그러자꾸나.” 하셨다. 다음 날 저녁 일을 끝내고 차를 몰고 어머니를 모시러 갔다.

금요일 밤이었고 나는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기분에 휩싸였다. 데이트하기 전에 갖게 되는 가슴 두근거림이라고나 할까. 도착해 보니 어머니도 다소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집 앞에 나와 계셨는데 근사한 옛 코트를 걸치고 머리도 다듬으신 모양이었다. 코트 안의 옷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두 분의 마지막 결혼기념일에 입으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얼굴이 환한 미소로 활짝 피어 있었다. 차에 오르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수진이는 안 왔어?”였다. 아내의 병을 숨기고 있는 나는 수진이는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다음에 같이 오겠다고 둘러댔다. 모처럼 아들과 하는 외출에 마음이 들떠있는 어머니는 “친구들에게 오늘 밤에 아들과 데이트하러 간다고 자랑했더니 모두 자기들 일인 양 좋아하더라.”

어머니와 함께 간 식당은 최고로 멋진 곳은 아니지만, 종업원들이 기대 이상으로 친절히 대해 주었다. 어머니는 내 팔을 끼었다. 영부인이라도 되신 기분으로 정중히 내밀어 받치는 의자에 앉으셨다. 웨이트리스가 메뉴판을 어머니께 먼저 드렸다. 어머니는 “내 눈이 옛날 같지가 않구나” 하시며 나에게 메뉴를 읽어 달라고 했다. 메뉴를 반쯤보다 눈을 들어보니 어머니는 향수에 젖은 미소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계셨다. “네가 어렸을 때는 내가 너에게 메뉴를 읽어 줬는데! 오늘은 내가 읽어 드릴게, 엄마!”

그날 밤 나는 어머니와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특별한 주제도 아니고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에 또 오자구나”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 다음번은 내가 낸다는 조건이고 수진이와 같이 와야 한다.”라고 하셨다. 어머니를 다시 댁에 모셔다드렸다. 돌아서려는 발길이 무거웠다. 어머니를 안고 볼에 키스하며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멋진 저녁이었어. 그렇게 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아내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었어.”

몇 개월 후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병원 응급실에 입원해 계시니 빨리 오라는 것이다. 너무 순식간이었고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하여 30분도 채 되지 않아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연세가 90이 되도록 건강하게 사시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시지도 않고 아버지 곁으로 가신 어머니가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3년을 넘게 암으로 고생하는 아내와 간호에 지쳐있는 내 모습을 어머니는 모르고 가셨으니 다행으로 생각되었다. 아버지 옆 산소에 장례를 마치고 문상객을 대접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아내가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동생에게 손님 대접을 맡기고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아픔을 호소하며 울고 있는 아내 옆에서 1주일을 보냈다. 오늘은 아내가 통증도 호소하지 않고 밥도 조금 먹었다. 머리를 빗겨드리겠다는 간호사를 물리치고 나의 손에 빗을 잡혀 주며 빗겨 달라고 했다. 가끔 미소도 지으며 딸 영희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일요일인 오후 오늘에 아들딸 가족 모두가 엄마 앞에 모였다. 아내는 손주들이 앞에서 노는 모습을 보며 많이 기뻐했다. 그날 밤도 나는 아내 옆 간이침대에서 기도하며 밤을 새웠다. 새벽녘에 아내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통증을 호소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달려와 진찰을 하고 진통제를 투약했다. 잠이 든 것 같은 아내는 얼마 후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의사가 오늘 몇 시 몇 분에 돌아가셨다는 선고를 마치자 하얀 홑이불이 얼굴을 덮고 머리끝까지 감추어졌다. 이렇게 불과 1주일 사이에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모두 잃었다.

다음 해 가을 어느 날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데이트 한 식당에서 편지가 왔다. 어머니께서 맡겨둔 편지와 물건이 있으니 아내와 함께 직접 와서 찾아가라는 내용이었다. 무척 궁금해졌다. 딸 영희가 살아있었다면 나를 좀 태워다 줄 겸 함께 가자고 했을 것인데 그 딸마저 몇 개월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불과 1년 사이에 사랑하는 세 여인을 잃은 불행한 남자가 되고 말았다. 아내와 딸마저 가고 없으니 나 혼자 어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접하려고 그 식당을 찾았다.

종업원이 내 이름을 확인한 후 두 사람이 앉는 준비된 테이블에 안내했다. 테이블 위에는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내 이름이 적힌 하얀 편지 봉투가 그 옆에 놓여 있었다. 어머님께서 이미 와인과 식사를 주문해 두셨으니 아내분이 도착하는 대로 준비해 드리겠다고 웨이트리스가 친절히 알려주었다. 갑자기 몸에 경련이 일고 슬픔에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사랑하는 세 여인; 어머니도 아내도 딸도 없는 이 자리는 너무 슬펐다.

떨리는 손으로 열어본 편지에는 “아무래도 다음번 데이트 약속은 지킬 수 없을 것 같구나. 정말 그럴 것 같다. 그러니 이번엔 너와 네 처 둘이서 너와 내가 했던 것처럼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 너희들 식사 비용은 내가 미리 다 지불했다. 그리고 너와 내가 함께 했던 그날 저녁의 시간이 내겐 얼마나 행복하고 뜻깊은 일이었는지 네가 꼭 알아주면 좋겠다. 사랑한다! 엄마가”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그리고 늦기 전에 그 사랑과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내어 무언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할 것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내가 사랑한 세 여인을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내가 사랑한 세 여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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