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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학 교수가 들려주는 위안부 문제의 진실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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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저자 머리말

제1장 일본제국의 매춘 연계계약: 상업적 매춘 시장에서의 신뢰할 만한 약속

1. 개요
2. 학자들과 매춘부들
3. 매춘 관련 법규
4. 연계계약
5. 공창제의 종결
6. 결론

제2장 위안부들, 그리고 학자들

I. 여성 본인들
II. 전쟁 이전 일본과 조선의 매춘
III. 주장의 기원과 정치
IV. 정대협 문제
V. 결론

제3장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1. 개요
2. 전쟁 이전 일본과 조선의 매춘
3. 위안소
4. 결론

제4장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비판에 대한 반론

전시 매춘 연구에 관하여: 앤드루 고든과 카터 에커트 및 석지영에 대한 반론
A. 단서
B. 경제학적 오해
C. 예비적인 예시
D. 앤드루 고든과 카터 에커트
E. 석지영
F. 의심스러운 “합의”
〈제4장 부록 I〉
에이미 스탠리, 한나 셰퍼드, 사야카 차타니, 데이비드 앰버러스 및 첼시 센디 샤이더,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학술적 부정행위를 근거로 한 철회의 사례’에 대한 반론
A. 서언
B. 논박
C. 세부 사항
〈제4장 부록 Ⅱ〉
요시미 요시아키의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논평(Yoshimi 2021a)에 대한 반론
A. 서론
B. 요시미 요시아키에 대한 반론
〈제4장 부록 III〉
위안부 계약에 관한 정보

제5장 위안부 문제: 북한과의 커넥션(존 마크 램자이어 · 아리마 테츠오 공저)

I. 일본과 조선에서의 매춘 관련 규정
II. 위안소
III. 성노예설의 기원
IV.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
V. 학문
VI. 북한과의 커넥션
〈제5장 부록〉 위안부 계약에 관한 정보

부록A 램자이어-아리마-모건 3자 대담
부록B 한국 지식인들의 램자이어 교수 옹호 성명
부록C 램자이어 교수의 한국인에 대한 감사 인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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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4

존 마크 램자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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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로스쿨(Harvard Law School)의 일본법연구(Japanese Legal Studies)를 위한 미쓰비시 기금 교수(Mitsubishi Professor)다. 1954년생으로, 어린 시절에 선교사인 부모와 함께 18살까지 일본 규슈 미야자키 현에서 살았으며, 일본어에 능통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고센 칼리지(Goshen College)와 미시건대학(University of Michigan), 그리고 하버드로스쿨을 졸업했다. 로스쿨 졸업 후에는, 나중에 대법관이 되는 스티븐 브라이어(Stephen Breyer) 판사 밑에서 재판연구관으로 일했으며 이후 시카고 등
하버드로스쿨(Harvard Law School)의 일본법연구(Japanese Legal Studies)를 위한 미쓰비시 기금 교수(Mitsubishi Professor)다. 1954년생으로, 어린 시절에 선교사인 부모와 함께 18살까지 일본 규슈 미야자키 현에서 살았으며, 일본어에 능통하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고센 칼리지(Goshen College)와 미시건대학(University of Michigan), 그리고 하버드로스쿨을 졸업했다. 로스쿨 졸업 후에는, 나중에 대법관이 되는 스티븐 브라이어(Stephen Breyer) 판사 밑에서 재판연구관으로 일했으며 이후 시카고 등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학계로 진출한 후에는 UCLA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고, 1998년부터 하버드대학에서 교편을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리마 테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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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대학 사회학부 교수 재직하고 있으며, 매스미디어는 물론 미국과 일본의 방송사를 전공으로 하고 있다. 정부 공문서 연구의 전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은 책으로는 『‘위안부’는 모두 합의계약을 했다(「慰安婦」はみな合意契約をしていた)』(2021년), 『NHK 수신료에 대한 연구(NHK受信料の?究)』(2023년) 등이 있다.
류석춘은 연세대학교 사회학 교수다. 1986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Urbana)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7년부터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 분야는 발전사회학, 경제사회학, 동남아시아연구 등이다. 『한국사회학』 및 『동남아시아연구』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1993년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1999년 교토 동지사대학교, 2002년 필리핀국립대학교, 2009년 호주국립대학교 및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San Diego)에서 교환교수를 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2010~2015)과 박정희연구회 회장(2016~2017)을 역임했다. 가장 최근 출판한 글은 “만주와 이승
류석춘은 연세대학교 사회학 교수다. 1986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Urbana)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7년부터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 분야는 발전사회학, 경제사회학, 동남아시아연구 등이다. 『한국사회학』 및 『동남아시아연구』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1993년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1999년 교토 동지사대학교, 2002년 필리핀국립대학교, 2009년 호주국립대학교 및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San Diego)에서 교환교수를 했다.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2010~2015)과 박정희연구회 회장(2016~2017)을 역임했다. 가장 최근 출판한 글은 “만주와 이승만·박정희, 김일성”(『월간조선』 2019년 8월호) 그리고 가장 최근 출판한 책은 『박정희는 노동자를 착취했는가』(기파랑, 2018)이다. 자세한 경력과 연구업적은 http://sclew.yonsei.ac.kr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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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서 ‘조선시대-식민지기 산림소유제도와 임상의 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한국경제사 전공)를 받았다.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방문연구원, 규슈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교환교수를 지냈고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의 산림소유제도와 정책의 역사 1600~1987』(2010년), 『반일 종족주의』(2019년, 공저) 등이, 옮긴 책으로는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2020년),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性)』(2022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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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03일
쪽수, 무게, 크기
516쪽 | 152*222*35mm
ISBN13
9791192014098

책 속으로

매춘업소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서 매춘부들을 덜 착취했다는 데 대해 놀랄 필요는 없다. 결국, 매춘업소들은 경쟁 시장에 있는 지속적인 플레이어였다. 매춘부들을 비교적 공정하게 대한다는 평판을 쌓은 매춘업소들은 매춘부를 더 적은 비용으로 채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일부 매춘업소는 신규 매춘부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역 경찰서에서 승인한 표준 계약의 양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 「제1장 일본제국의 매춘 연계계약: 상업적 매춘 시장에서의 신뢰할 만한 약속」 중에서

미국 위스콘신 주의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는 일본군이 “인간사냥식으로” “14세에서 20세 사이의 여성 20만 명”을 끌고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관련해서 중국 쪽 소식통은 이를 40만 명으로 부풀리고 있다. 당시 조선의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의 10대 소녀들이다. 자료에 따르면, 1935년 당시 조선에 살고 있던 15세에서 19세 사이의 소녀는 1,048,514명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 학자들은 일본군이 조선의 소녀 5명 중 1명을 매춘부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 「제2장 위안부들, 그리고 학자들」 중에서

이용수는 처음에는 역사학자들에게 자신이 한밤중에 친구와 함께 가출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증언은 한국의 학자들이 생존 위안부들의 전기(biography)를 모으던 1990년대 초에 수집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이용수의 친구(분순이)가 그녀에게 “(집에서) 가만히 나오너라”고 재촉했고, 그래서 그녀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자신의 친구를 따라갔다고 했다. 한 일본인 남성이 그녀에게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든 꾸러미(보퉁이)를 건넸고, 그녀는 너무 흥분해서 “선뜻” 그리고 “다른 생각도 못하고” 그 남성을 따라나섰다.
첫 증언 이후 약 10년 뒤, 이용수는 일본 측에 보상금과 사과를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첫 증언과는 다른 증언을 하고 나섰다. 그녀는 2002년에 일본 국회를 방문하여 “14세의 나이에 총검으로 위협받아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는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미국 방문 직후 도쿄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는 “일본 군인들이 어머니를 부르지 못하게 내 입을 막고 집에서 끌고 갔다”고 했다.
--- 「제2장 위안부들, 그리고 학자들」 중에서

소정희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다른 어떤 서구의 학자들도 옛 위안부들이 했던 증언의 신빙성 여부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 “성노예 서사”를 정당화하고자 보여 주고 있는 그 모든 집착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대신에, 상당수 학자들이 옛 위안부들의 증언을 검증하려는 여러 시도들을 “선을 넘는 일이다”라고 강변하며 비난한다. 단지 눈치 없고 무례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어떤 학자는 “이 서사에서 ‘증언’이 갖는 지위야말로 바로 이 서사를 민족주의적이고 여성주의적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학자는 “성노예 서사”의 진실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여성들의 증언을 하찮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성폭행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어쨌든 성폭행 피해자들이 동의를 했던 것처럼 묘사하여 피해자들을 불명예스럽게 만들려는 상투적인 전략”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 「제2장 위안부들, 그리고 학자들」 중에서

1995년 일본이 옛 위안부들에게 처음으로 보상을 제시하자, 정대협은 옛 위안부들을 확실하게 위협했다. 다가오는 한국과 일본 간의 화해를 방해하기로 결심한 정대협은 옛 위안부들에게 보상금을 거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래도 일부 옛 위안부들은 어쨌든 보상금을 받았다. (……)
일본이 1995년도에 아시아여성기금(Asian Women’s Fund)을 통해 보상금을 제시하자, 61명의 옛 위안부들이 정대협 대표의 명령을 무시하고 보상금을 받았다. 그 61명의 여성들은 일본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녀들 중에 7명은 이름이 공개됐고 그녀들은 불명예의 여생을 보내야 했다. (……)
한국계 미국인 인류학자 소정희도 역시 옛 위안부들의 두려움을 확인했다. 비록 일부 옛 위안부들은 뉴스에 계속 등장하기 위해 새로운 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다른 옛 위안부들은 정부의 인증을 위한 초기 조사 이후에는 더 이상의 관련 증언을 단호히 거부했다.” 소정희는 “그녀들은 혹시 ‘말실수’로 인해 피해자 등록이 취소되고 이로 인해 복지 지원금 지급이 중단될까 봐 침묵을 지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 「제2장 위안부들, 그리고 학자들」 중에서

우리 서구인들의 “성노예 서사”에 대한 집착은 한국이나 일본의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학문적 의제와 더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서사는 세 배의 효과를 냈다. 한 학자의 표현대로, 그 서사는 “성차별, 인종차별, 제국주의”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학자들의 주장처럼 그 서사는 “최악의 남성성, 인종차별, 국가주의”가 결합된 단일 사건을 만들어 냈다. 우리의 학문 세계를 이렇게 심각하게 자극하는 서사를 접했으면서도 그간 우리는 관련되는 사실관계를 제대로 따져 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서사를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부정론자”라는 딱지를 갖다 붙이고는 정대협과 같은 위안부 지원 단체의 뒤에 그만 숨어 버렸다.
--- 「제2장 위안부들, 그리고 학자들」 중에서

일본인 가라유키와 마찬가지로, 젊은 조선인 여성들도 해외에 진출했다. 결정적으로, 1932년 상하이의 몇몇 매춘업소가 최초로 허가된 “위안소(comfort station)”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조선인 여성들은 매춘부로 일하기 위해 해외로 나갔다. 다시 말해, 위안소 때문에 젊은 조선인 여성들이 해외로 나가 매춘부로 일하게 된 것이 아니다. 조선인 여성들이 매춘부로서 해외로 나가 일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앞선 수십 년 전이다.
조선인 여성들은 이미 1920년대부터 매춘부로 일하기 위해 만주에 진출해 있었다. 1929년 대만에서는 196명의 조선인 여성이 공창 또는 사창으로 일했고, 1924년 중국 다롄(大连, Dailin)에서는 67명의 조선인 여성이 일했다. 아마도 어떤 여성들은 일본인 고객을 위해 일했을 것이고, 일부는 조선인 고객을 위해, 또 다른 여성들은 중국인 고객을 위해 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위안소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조선인 여성들은 계속해서 오랫동안 해외로 나가 사창으로 일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들은 상당히 다양한 고객들을 상대했다. 예를 들어, 1937년에 중국 톈진(天津)의 이민자협회는 조선에서 온 81명의 사창에 대해 보고했다. 1938년 한 달 동안에 90명의 조선인 여성들이 중국 지난(濟南, Jinan)시에서 사창으로 일하도록 허가해 달라고 조선총독부에 청원했다. 그리고 1940년에 12명의 조선인 여성들이 상하이의 위안소에서 일했지만, 527명은 상하이에서 사창으로 일했다.
--- 「제3장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중에서

계약 자체는 “신뢰할 수 있는 약속(credible commitments)”이라는 게임이론의 기본 원칙을 따랐다. 매춘업소 업주들은(군대가 아니다) 새로운 매춘부를 대부분 일본과 조선에서 대거 고용했다. 여성들은 매춘업소 업주들이 그녀들이 얻을 수 있는 수입을 과장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임금의 많은 부분을 미리 전차금으로 받기를 원했다. 매춘업소들은 이에 동의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전선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최대한 짧은 기간으로 계약하기를 원했다. 매춘업소들은 여기에도 동의했다. 또한, 여성들이 업소 측으로부터 감시받지 않는 공간에서 불성실하게 일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매춘업소들은 여성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유인을 부여하는 계약 조건을 원했다. 여성들은 그에 동의했다. 여성들과 매춘업소는 1년 또는 2년의 계약 기간과 거액의 전차금을 결합하는 연계계약(indenture contract)을 체결했다. 전쟁의 마지막 몇 달 전까지, 여성들은 계약 기간을 채우거나 빚을 조기에 갚으면, 집으로 돌아갔다.
--- 「제3장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중에서

조선에서의 위안부 총검 강제연행설은 일본인 작가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의 1983년 저서에서 비롯되었다. 그 책에서 요시다 세이지는 한 무리의 군인들과 함께 당시 조선의 제주도로 건너가 젊은 여성들을 총검으로 위협해 체포하고 강간한 다음 위안소로 향하는 배에 싣고 갔다는 경험담을 들려준다. 일본의 대표적 신문인 「아사히신문」은 이 이야기를 다듬어서 길게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은 요시다 세이지가 책 내용 전체를 날조했던 것이다. 그는 긴 대화로 구성된, 읽기 쉬운 회고록을 썼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들은 처음부터 이 책 내용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Hata Ikuhiko)라는 학자가 실제 현지 조사를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요시다 세이지 본인이 대규모 인간사냥 중 하나를 수행한 곳이라고 밝힌 바 있는 촌락을 찾아갔지만, 마을의 누구도 그러한 습격에 대해 기억하지 못했다. 한 노인은 이곳은 작은 마을이라고 설명하면서 일본군이 매춘부로 삼을 여성들을 이곳에서 납치해 갔다면 누구도 그런 사건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과 한국의 다른 역사가들과 기자들도 그 뒤를 이어서 조사에 나섰다. 그들 중 누구도 요시다 세이지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요시다 세이지는 처음에 그 사건이 실화라고 주장했지만, 결국은 다 지어낸 이야기였음을 자백했다.
--- 「제4장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비판에 대한 반론」 중에서

현재까지 영어권에서 조선인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가장 사려 깊은 연구는 인류학자인 소정희에 의해 이뤄졌다. 소정희는 옛 위안부들의 증언이 “틀에 박힌(paradigmatic)” 증언에 수렴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관련 연구를 진행했다. 그녀는 옛 위안부들의 증언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언이 어떻게 변했는지 검토했다. 소정희에 따르면, 옛 위안부들은 초기에는 부모의 압력이나 높은 급여 때문에 그 직업을 택했다고 증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군이 총검으로 위협해서 인간사냥식으로 강제연행했다는 증언으로 변모했다. (……)
나는 잠재적인 독자들에게 이 주제에 신중하게 접근하라고 충고한다. 당신이 어느 편에 서건, 그 때문에 당신을 히스테릭할 정도로 미워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중간 입장을 취하려고 하면 양쪽 모두의 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양측 모두 자신들이 믿고 있는 모든 것이, 명백히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결과적으로, 이 논의는 매우 정치적이고 인종 지향적인 논의가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이 논의는 당신의 하루를 수도 없이 망칠 것이다.
--- 「제5장 위안부 문제와 북한의 커넥션」 중에서

국내 언론의 호들갑과는 달리,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은 실은 ‘위안부=매춘부’를 입증하고자 하는 내용의 논문이 아니다. 논문은 성노예설의 시각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위안소 업주와 위안부 간의 독특한 계약 형태 및 계약 조건을 게임이론의 ‘신뢰할 만한 약속(credible commitments)’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다. 논문은 일본과 조선의 국내 매춘업에서 업주와 여성 간에 왜 거액의 전차금(前借金)을 주고받는 연한(年限) 계약을 맺었는지, 업주와 여성 간의 독특한 수익 분배 방식은 왜 생겼는지를 법경제학적 관점에서 구명하였다. 더욱이 위안부의 경우는 그 상대가 평시 군인도 아닌 전시의 군인이기에 선금, 임금, 기간 등 모든 조건이 민간인을 상대하는 기존 매춘부와는 다른 존재였음도 논증하였다. (……)
램자이어 교수 논문의 논증이 과연 철저하였는지, 또는 그 어떤 학문적 결함이 있는지는 후속 논문과 관련 학술 토론을 통해 앞으로 차근차근 가려질 것이다. 상아탑은 사회와는 일정 부분 독립되어 ‘위안부 문제’처럼 사회가 터부시하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도 치열한 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 자체가 사회 전체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공개적이고 엄밀한 논쟁은 필경 건전한 학구적 과정의 반석이다.

--- 「[부록 C] 한국 지식인들의 램자이어 교수 옹호 성명」 중에서

출판사 리뷰

2021년 초,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 「법경제학국제논총(IRLE)」에 위안부 문제 관련 기존 통설인 ‘강제연행’설과 ‘성노예’설을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존 마크 램자이어(John Mark Ramseyer) 하버드로스쿨 교수. 마침내 그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론과 입장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

『하버드대학 교수가 들려주는 위안부 문제의 진실』(미디어워치 출판사)은 화제의 논문인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2021년), 해당 논문을 둘러싼 비판에 대한 반박(2022년), 그리고 역시 해당 논문의 근간이 된 일제시대 상업적 매춘 시장에 대한 연구(1991년) 등 램자이어 교수의 위안부 문제 핵심 논문 5편을 엮은 모음집이다. 그 중요성과 가치 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이 논문 모음집의 한국 출간을 위해 그간 국내에서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 앞장서 온 전문 연구자 류석춘 전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와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팔을 걷어붙였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일본과 조선 바깥 군 기지 인근의 매춘업소로 자국의 공창(公娼)제도를 확대했다. 공창제도는 국가가 관리하는 매춘으로 특히 위생 관리에 유리하다. 일본군은 이로써 성병으로 인한 군사력 약화를 방지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시책에 따랐던 국가(군) 관리 매춘업소를 ‘위안소’라고 불렀다. 이 위안소에서는 ‘위안부’라고 불리는, 일본과 조선에서 모집된 여성들이 일했으며, 위안소와 위안부는 당대 공창제도하 매춘업소와 매춘부 사이에서도 일반적이었던 ‘연계(年季)계약(indenture contracts)’을 맺었다. 이 계약의 핵심은 바로 여성을 위한 고액의 전차금(선금), 그리고 끝이 정해진 수년의 근로기간이다.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진실은 실상 이처럼 램자이어 교수의 설명처럼 싱겁디싱거운 것에 불과하다. 문제는, 오늘날 서구와 한국, 일본의 학계 중 일부 목소리 큰 세력이 위안부를 전혀 학계답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램자이어 교수가 겪은 필화(筆禍)의 배경이다. 이런 배경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지난 세기말, 극좌파적 사고를 가진 일군의 학자들과 운동가들은 일본군이 평범한 조선의 여성을 위안소로 ‘강제연행’했고, 위안부는 곧 ‘성노예’였다고 주장하며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위안부 문제를 ‘전쟁범죄’로 특정 지은 이 새로운 개념은 1983년도에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라는 일본공산당 출신 작가의 거짓말에서 시작됐다. 이 거짓말은 특히 1990년대를 풍미하면서 한국에서는 북한과 연계된 한 위안부 지원단체(정대협)를 중심으로 마치 진실인 양 수용됐고, 관련 소동은 결국 몇몇 옛 위안부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과의 관계 개선 압박, 그리고 근현대사 관련 연구 부족이라는 혼란 속에서 일본 정부가 관련 사과(고노담화)를 하는 지경에 이르고, 어쩌면 그저 해프닝으로 끝났을 문제는 그야말로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일본의 굴복을 확인한 유엔에서도 일본을 규탄하는 두 개의 보고서(쿠마라스와미 보고서, 맥두걸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세기가 지나면서 한국과 일본 양국 관계는 위안부 문제로 인해 파탄 일보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법경제학을 전공한 학자인 램자이어 교수는 권력과 정치라는 요소를 배제하고서, 당대 ‘위안부’라고 불렸던 여성들이 어떻게 위안소로 가게 됐는지 그 실상을 계약구조의 논리로 담담히 설명한다. 그 경로는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동일했다. 물론, 여성들 중 일부는 사기꾼 모집업자에게 속아서 그 일을 하게 됐다(이는 특히 조선에서 심각했다). 또 일부는 학대하는 부모의 압박에 시달려 그 일로 내몰렸다. 그러나 상당수는 공창제도하 다른 민간 매춘부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그 일을 택했다. 관련한 압도적인 사료들은 램자이어 교수가 소개하는 게임이론의 ‘신뢰할 만한 약속(credible commitments)’ 개념이 매춘부 문제뿐만 아니라 위안부 문제에도 명백히 적용됨을 가리킨다. ‘강제연행’도, ‘성노예’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행여 독자들은 이러한 학문적 결론이 옛 위안부들의 고통 어린 증언 내용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라 놀랄 수도 있다. 램자이어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질적이거나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제에서 증거가 서로 상충되는 경우는 종종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학자들은 관련된 증거를 면밀히 조사하고 어떤 결론에 도달한 뒤, 자신들의 논리로 이 문제를 설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독자들도 증거와 논리를 스스로 따져 보고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해야 합니다. 학계가 제 기능을 하려면 어떠한 결론도 처음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버드대학 교수가 들려주는 위안부 문제의 진실』 한국어판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램자이어 교수의 위안부 문제 논문집 『위안부 성노예설을 램자이어 교수가 완전논파(慰安婦性奴隷説を ラムザイヤー教授が完全論破)』가 발간됐다. 실제로, 램자이어 교수가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 논문을 발표한 이래, 이 논문에 대해 다른 학자들의 통설을 그대로 반복하여 반론하는 이외에 어떤 믿을 만한 사료로 실증적 차원에서 반론이 시도된 경우는 국내외를 통틀어 전무했다.

램자이어 교수는 박유하·이영훈·지만원·류석춘·송대엽 등의 실명을 거론하며 “한국은 위안부 문제 통설에 도전하는 학자들이 잠재적으로 감옥까지 갈 수 있는 위험 국가”라고 경고한다. 한국에서의 언론·학문·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문제가 명실공히 세계 최고 권위의 대학 교수에 의해 폭로된 것이다. 어쩌면 위안부 문제의 진실보다 우리 사회가 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진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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