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종교는 중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여기 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예수가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결함이 단지 피상적인 것이 아니며 자신의 마음이
심각하게 만신창이가 되어 스스로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강함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당신이 꿈을 성취할 가능성이 꽤 크다고 생각하는 한,
당신은 내면의 공허함을 “의욕”이라고 생각하고 불안함을 “기대”라고 느낄 것이다.
누구나 ‘나는 이것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있는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신에게 그 목적이 예수가 아닌 다른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을 실망시킬 것이라고 예수는 주장한다.
예수와 마르다와의 만남에서 그의 신성과 능력을 엿본다.
바로 다음 순간에 그는 마리아의 슬픔의 무게에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신성이 인간의 나약함과 만나는 것을 목격한다.
그의 사랑이 그를 끌어내려 눈물 흘리게 한다.
예수가 누구인지, 그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가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어떻게 세상에 왔는지, 보라.
비록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슬픔 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다가오는 기쁨을 마시라.
당신의 마음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오직 한 사랑, 오직 한 잔치뿐이며,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진정한 기독교는 결코 “기독교가 우리 삶에 적절하니까 믿으라,”
혹은 “그게 당신 마음에 드니까 믿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 정도로 빠져나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기독교가 흥미진진하고 실용적이고 삶에 적절하다는 이유 때문에 믿지는 말라.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으라. 만약 진리가 아니라면
결국에는 실용적이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유혹과 세례를 분리하지 말자.
예수가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즉 임무를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사탄이 예수에게 온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도록 돕고자 할 때,
혹은 동정과 섬김의 행위를 통해 가난한 이웃을 사랑할 때,
그 지점에서도 우리는 사탄과 싸우는 것이다.
예수는 그저 우리가 죽어야 했던 죽음을 죽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을 살았다.
어둠 속에서 당신을 위해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라.
그 사랑이 당신을 녹여 그의 모습으로 빚게끔 하라.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우리 모두 긴장을 풀고 평안을 누려도 된다는 걸 의미한다.
모든 종교는 그 종교만의 독특한 주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주장은 특별히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주장이 진리인 경우,
우리는 그에게 무릎을 꿇는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