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태도 또한 변화해왔다. 1880년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가투약권(right to self-medicate)을 불가침에 가까운 권리로 간주했다. 어떤 약물이 당신에게 이롭든 해롭든, 그것을 먹을 건지 말 건지는 당신의 선택권이지 의사의 소관 사항이 아니었다. 지역의 약국에 전시된 수많은 특허약(이를테면 방사성 물로 만든 항암제에서부터, 아편이 섞인 시럽으로 만든 불면증 치료제에 이르기까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주체는 당신의 마음이었다. 당신의 선택을 만류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 의사들이 (처방전이라는 형태로) 대부분의 약물 투여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 처방약을 복용하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 p.9, 「서곡」 중에서
19세기 이전의 약물들은 ‘마녀, 주술사, 사제들이 밀실에서 말린 약초더미’ 플러스 알파였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는 의학적으로, 부분적으로는 마술적으로) 가공되고 결합되어, 펄펄 끓여 음료와 엘릭시르로 만들어지거나 알약으로 제조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라의 먼지’와 ‘유니콘의 뿔’에서부터 ‘진주 가루’, ‘건조된 호랑이 눈물’이 혼합되어 부유한 환자들을 위한 정교한 혼합물로 빚어졌다.
아편은 단연 최고의 구성 성분이었다. 그것은 술에 용해되거나 다른 성분들과 배합되어 혼합물을 형성할 수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 섭취하든―액체나 고체 상태로 복용하든, 콧구멍에 넣든, 기체 상태로 흡입하든―효능을 발휘했다. 한 가지 섭취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약간 빠를 수는 있지만, 어떤 식으로 전달되든 동일한 범위의 효능―졸게 하기, 꿈꾸게 하기, 통증 없애기―을 발휘했다.
--- p.28, 「1장 기쁨을 주는 식물」 중에서
한편 사상 최고의 킬러인 천연두는 결정적인 약점 때문에 1순위 박멸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첫째, 그것은 추적하기가 쉬웠다. 감염 후 이틀 만에 명백한 증상이 나타나므로, 널리 확산되기 전에 환자를 확인하여 격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둘째, 사람만을 감염시키는 병원체이므로 다른 동물을 감염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오지에 서식하는 동물 전염원의 몸속에 숨어 호시탐탐 재감염을 노리는 천연두 병원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그러나 다른 질병들, 이를테면 황열의 경우에는 병원체가 원숭이를 감염시킨 후 인간에게 다시 점프할 수 있다). 셋째, 최근 개발된 천연두 백신은 제너의 종두법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사용하기 쉽고 안전하므로, 대규모 인구를 단기간에 보호할 수 있었다.
--- p.95, 「2장 레이디 메리의 괴물」 중에서
그러나 개중에는 난치병을 앓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중에는 망령 난 노인(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치매의 일종, 이를테면 알츠하이머병 환자라고 부른다), 발달장애자(developmentally disabled), ‘현실과의 접촉을 완전히 상실하여 자신의 길을 되찾을 수 없는 사람’이 포함되었다. 후자―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몇 달 동안 움직이지 않거나, 의미 없는 말을 끊임없이 내뱉거나, 헛것을 보거나, 무슨 일을 하라는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조현병(schizophrenia) 환자라고 불린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질병의 원인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치료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한 전문가가 말한 것처럼, “1952년, 지구상의 마지막 미개척지는 ‘두 귀 사이에 있는 15센티미터’였다.” 그 당시의 불문율은, 그런 난치병자가 정신병원에 들어오면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 p. 185, 「6장 지구상의 마지막 미개척지」 중에서
둘째, ‘장기집권하는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만병통치약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방금 언급한 화이자의 두 가지 블록버스터의 공통점은 기저질환을 치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기장애와 관절병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주지만,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비아그라와 쎄레브렉스는 질병이 아니라 증상을 치료한다.
증상을 치료하는 ‘삶의 질 개선제’는 끊임없이 처방될 수 있다. 만약 환자가 복용을 중단한다면 증상이 재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질 개선제는 제약사(그리고 의사)에게 끊임없이 수익을 안겨준다. 엄청난 신약개발 비용을 감안할 때, 제약사들이 그런 식으로 수지타산을 맞추는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다. 이윤 추구는 개발될 약물의 종류를 왜곡시킨다. 이쯤 되면 제약사들이―인류가 절실히 요구하는 신규 항생제를 등한시하고―노화의 증상을 치료하는 약물에 큰돈을 쏟아붓는 이유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 p.249, 「7장 섹스, 피임약, 그리고 비아그라」 중에서
개인화된 의료의 가능성을 극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의 주장을 100퍼센트 신뢰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DNA 검사 결과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그에 따라 곧이곧대로 행동하는 것 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첫 번째 이유는 유전자와 질병의 관계가 선형적(linear)인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걱정하는 알츠하이머병, 암, 심장병을 생각해보라. 그 질병들은 단 하나의 유전자에 약점이 있어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유전자들의 상당한 시간에 걸친 상호작용’ 더하기 ‘환경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어떤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유전자검사 결과 말고도 따져볼 문제가 수두룩하다. 설사 한 유전자 결함이 잠재적 건강 위험을 약간 상승시키더라도 문제의 질병이 당신에게 실제로 닥쳐올 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반대로 그 유전자 결함을 아무리 걱정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해주는 치료법이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 p.355~356, 「피날레-신약개발의 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