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었다. 윤오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기 모르게 이럴 줄은 몰랐다. 헌수는 누가 뭐래도 윤오가 가장 친하다고 자부하는 친구였다. 보나는 아직 그녀의 마음까지는 얻지 못했지만 윤오의 전파가 가장 많이 미치고 있는 이성이다. 말하자면 헌수와 보나는 윤오에게 전부라는 얘기다. 물론 그 두 사람이 윤오와 각각 가깝다고 해서 둘이 따로 친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지만 헌수가 누구인가. 그는 여자라면 친구로서도 경계해야 할 신부이다. 보나는 또 어떤가. 그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의 얼굴로 남자는 만나보지도 못한 듯 윤오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꺼렸다. 그런데 두 사람이 윤오 모르게 따로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거였다.
인간은 몇 겹의 베일을 벗겨야 그 본성이 드러나는 걸까? 그 베일이 얼마나 두터웠으면 그렇게 새까맣게 모를 수 있었을까? 윤오는 헌수가 끝까지 교회의 율법을 따를 신부님이라 여겼고, 보나는 지금은 비록 윤오가 그녀의 주변인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그녀의 남자가 될 거라 스스로 규정지어 놓았었다. 그러니까 윤오는 베일에 싸여진 환상만 보고 그 두 사람을 자기만의 잣대로 판단하고 상식적인 틀에 가둬두었던 것이다. 환상이 사라진 이상 헌수는 좋은 사제가 아니었고 보나도 더 이상 정숙한 여자가 아니다. 본성대로 살아가는 그저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 p.65
주방에서부터 은은한 커피 향이 흘러나왔다. 그때 헌수는 엉뚱한 상상에 빠졌다.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 집에 오래 머무르고 싶다는. 그녀가 생선구이 한 밥상을 들어 나르고, 바나나를 까먹으며 트롯프로를 보고, 집 앞 공원에 나가 저녁 산책을 하는, 그닥 행복하다고도 불행하다고도 할 수 없는 딱 그저 그런 평균치의 삶을 사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라면. 그러나 누가 뭐래도 자신은 신부였다. 그 정도 삶에 흔들릴 것 같았으면 사제가 되지도 않았다.
--- p.81
그날 밤, 보나는 현관 앞에 쓰러져 있는 다두 신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으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처음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다두 신부가 보나를 찾아왔던 것에 대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 보나는 그의 사제 생활에 오점을 남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취해 돌려보내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윤오를 부를까도 생각했으나 왠지 긁어 부스럼 같았다. 그래서 방으로 끌어들였다. 편한 잠자리를 위해 외투와 양말도 벗겨주었다. 그때 그가 보나를 안았다. 보나가 미동이 없자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그는 너무 취해 여자를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만취해 정신을 놓은 그 순간에도 자신이 사제라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얽혀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보나가 안았다. 다두 신부는 정신을 놓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절박감에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은 보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용기를 더욱 부추켰다. 벌은 내가 다 받을 것이다. 그 순간 다른 열락이 찾아들었다.
--- p.115~116
윤오는 요즘 들어 부쩍 헌수 생각에 파묻혀 지냈다. 전에 없이 자주 헌수 꿈을 꾸고 그가 보고 싶었다. 전에도 헌수가 윤오의 의식을 떠나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그건 그냥 몸속에 박혀있는 한 종기처럼 통증 없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그 종기가 곪아터지려는 것처럼 헌수에 대한 연민과 걱정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윤오는 좀 더 일찍 찾아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와서, 사람 사는 건 다 그런 거라고,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상처주고 상처받고 그런 게 청춘이라고, 그러니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할 것도 없고 누가 누구를 용서할 것도 없는, 용서와 죄는 다 하느님이 알아서 주는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었더라면 헌수는 입가에 묻은 맥주 거품을 손바닥으로 쑥 훔치며 자식,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네, 하며 가슴속 응어리를 툴툴 털고 그냥 그렇게 아침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윤오는 자기 상처를 싸매기에 급급해 헌수의 아픔을 외면했다. 다른 사람의 죽을병보다 내 손가락 끝 종기가 더 아프다는 말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믿었던 친구에게 잃은 윤오의 아픔도 컸지만 사제직을 내어놓아야만 했던 헌수의 박탈감은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윤오는 그것을 진즉에 헤아리지 못했다.
--- p.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