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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참견하지 않는 마음

전영관 | 삼인 | 2024년 01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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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92쪽 | 334g | 145*210*12mm
ISBN13 9788964362587
ISBN10 8964362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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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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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에 매화가 있는데 그 아래에 서면 향기에 적셔지는 것만 같았기에 향기는 날아가는 게 아니라 쏟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는 3층에 산다. 창밖 매화 향기가 내게로 솟아오르는 것 같아 누군가에게라도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어림도 없는 망상이지만 천사로 채용된다면 행인들의 슬프고 다정함이 다 보이는 3층에 근무하고 싶다. 슬픈 사람 없도록 하겠다는 게 아니라 다독임 받지 못한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소망을 세우고 싶다.
--- p.15~16

우리 식구를 길거리에 주저앉게 한 사람이 찾아온 적 있었다. 그해 열다섯에 세상의 참혹을 다 겪었다. 아버지 동업자인 그이의 죄책감인지 후회인지 지금도 모른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았다가 “밥 먹고 가” 하시고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국졸 학력의 아버지는 성인 현자도 아니고 당신의 무력감을 절감한 것도 아닐 테다. 나이 들어서는 그이가 ‘운명의 상징’이었다고 생각했다. 운명이 찾아온다면 밥이나 사주련다. 그 밥은 상가의 육개장쯤이나 되겠지.
--- p.26

안정제 먹고 자니까 기절한 셈이지만 언제 또 쓰러질지 몰라 겁난다는 아내는 수면제조차 거부하고 뜬눈으로 지새우는 날이 많다. 안쓰럽고 무참해서 의존성 없는 수면유도제라도 먹으라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 그럴 수는 없단다. 둘 다 약기운에 정신 놓고 자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깨울 거냐고 맥 놓는다. 눈물 많은 구급대를 자처하겠다는 심사다. 신은 자신을 흉내 내는 것 같아서 지극히 선량한 사람은 싫어할 거라고 히죽거렸다. 그러니 당신은 영영 불러주지 않는다고 웃어주었다.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이라서 뇌경색에도 살아남았다고 으쓱거렸다.
--- p.28

희망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추레함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힘이 생을 끌고 간다
--- p.36

갈망하던 손목시계를 책상의 잘 보이는 자리에 놓았다. 나갈 일이 없으니 벽시계 노릇을 한다. 그런데 포장을 풀었을 때의 감흥이 사나흘 지나면서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다. 책 읽다가 시계도 읽으며 뿌듯해하고 드디어 손에 넣은 나 자신을 칭찬해주었다. 가라앉는 감정에 대한 보상작업이고 ‘좋아라’ 했다가 시들해진 것을 합리화하는 일이겠지. 이게 바로 소유한 것에게 소유당하는 일이다. 일종의 역습이다. 집착은 자신까지도 해치는 일, 애착은 그것을 보는 사람도 흐뭇해지는 일이겠다. 집착도 애착도 버리기로 했다.
--- p.39

전력질주보다는 빠르고 팔을 휘저으며 걸어도 못 미칠 속도다. 아마조네스 전사처럼 그녀가 전동카트로 달려간다. 배터리가 용량에 매인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멈춰 설 것이다. […] 야쿠르트 배급소에 모여선 전동카트를 보며 배달구역의 넓이와 생계의 무게가 이루는 함수관계를 짚어보곤 한다. 제복을 입으니 차림새의 편차가 없고 마음 편하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관계없는 사람이더라도 궁색한 차림새를 보면 서늘해진다. 없이 자란 후유증일까. 도울 생각보다 쓰린 기억을 먼저 떠올리니 인간은 영원히 자신에게 갇힌 존재인 것 같아 다시 서늘해진다.
--- p.52~53

반죽하는 아줌마 손등에서 표고를 떠올렸다. 테이블 다섯 개 노포老鋪라서인지 손님은 후루룩거리고 주인은 옆에서 반죽한다. 만두는 성격 눅진한, 가슴속에 잔뜩 품고 있는 총각이고 칼국수는 공부 많이 한 처녀다. 만두는 좋은데 말도 못 하는 숙맥이고 칼국수는 이래도 내 맘 모르겠냐며 허리를 뒤트는 깍쟁이다. 그러나 일단 허리를 잡히면 후루룩, 입안으로 안긴다. 밀고 당기기는 당기는 쪽이 이긴다. 사정없이 밀다간 엎어진다. 숙맥이라서 만두 시키고 깍두기마냥 단정한 당신은 칼국수 시켰다. 만두 빚는 쥔장 허리가 당신 두 배는 된다고 힐끔거리다가 사레들렸다. 쥔장하고 계산할 때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 p.59~60

노모에게 어떻게든 더 보여드리려는 딸의 뒷모습이 애잔했다. 일방통행으로만 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혼잡한 길을 찰싹 붙어 나란히 가는 청춘들이 부러웠다. 질서보다 사랑이 우선한다는 그런 치기가 또 부러웠다.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 절반을 감추고 하나같은 포즈로 손가락하트를 날리는 중년 여인들이 카메라 앞에서 야단이다. 멍때리기가 특기여서 비켜달라는 소릴 못 들어서 몇 번이나 눈총받았다. 손가락하트, 브이 같은 저런 상투적인 손짓들이 추억을 깊이 새겨주는 연장 아닐까 생각했다. 대략 7,000명이 오글거리는 잔도에 상투와 지극함과 깔깔거림이 물소리와 뒤섞이고 있었다.
--- p.75~76

비유는 사실관계를 반박 못 하게 피해 가는 기술이다. 경전이 비유로 가득 찼다는 것은 신을 논리 측면으로 몰박는 무신론자를 대비한 장치 아니었을까. 시인은 이룰 것도 없으면서 허깨비만 들이대는 도박중독자에 가깝다. 제 시집이 출판되면 세상이 뒤집힐 것만 같은 설렘을 가졌으니 도박이고 그걸 평생 반복하니 중독이다. 그 도박중독을 낭만으로 과장한다면 낭인浪人에 가깝다.
--- p.95

50명에게 강의한다면, 핵심적인 한마디를 강조한다면 그중 누가 그걸 뼈저리게 실감할 것인지 의문이다. 어떤 공통사항이라도 범위는 있다. 구멍가게지만 몇 년 강의한 경험으로 그 최대치는 다섯 명이라 생각했다. 다섯 명 정도면 선생이 하는 말을 전원이 실감할 거 아닌가. 가르쳐서 향상되면 ‘기술’, 애써 가르쳐도 나아지는 걸 모를 정도로 내부에서 변화한다면 ‘예술’이다. 자유로운 몸짓인 춤은 예술이고 일정한 순서와 반복이 반복되는 율동이 기술이다. 시는 춤, 산문은 행진이라는 말라르메의 비유와도 상통한다. 부언하건대 가르쳐서 나아지면 기술, 스스로 뛰어들어 해낼 수 있어야 이룬다면 예술이다. 진정 시 아니면 죽을 것 같은 분들께 한 말씀 올린다. 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물의 힘이 아니라 물이 바위를 두드린 횟수라는 것을 잊지 마시라.
--- p.106

어휘 몇 개로 젊음을 도금鍍金한 시중의 시편들보다 그 자체가 세월에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강이라서 편편이 자연스럽다. 과장이 아니라 청춘의 걸음걸이와 버금간다. 문장보다 시선의 탄력이 부럽다 못해 존경스럽다. 나는 겨우 환갑을 지났는데 문장이 늙을까 봐 스스로를 경계하는 깜냥이다. 시인을 부러워하다가 질투하게 되었다. 시에 대해 과문하지만 이렇게 정밀하게 쓰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가공加工도 도금鍍金도 화장化粧도 아닌 최문자 시인 본질의 시편들이 우리들 앞에 도착했다. 그 책상 곁에 앉아 연필 깎아드리고 싶다. 누구에게나 리토르넬로(일상반복)는 있으니 최문자 시인의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를 펼쳐볼 일이다. 싫증 나는데 친근해지고 미워하다가 닮아버린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지. 진달래는 저를 펼치느라 분주한 이 시절에 목련은 하 많은 사연을 참았는지 아무도 모르게 벙그는 삼월 스무 날 즈음에 『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를―.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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