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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우리 삶은 이미 아름다운 것임을

: 사납고 거칠고 치열했던 여름을 견뎌낸 저 들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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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576g | 152*225*20mm
ISBN13 9788957753125
ISBN10 895775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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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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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대리석을 다루는 석수장이였다. 돌을 알아보는 눈썰미가 남다르고 돌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던 그는 ‘석산의 귀재’로 불리며 석산주와 동료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대부분의 동료가 부모님 연배의 어른들이었다는 점도 그가 귀여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망치와 정으로 돌을 쪼개고 깎아 갖가지 문양과 모양의 조각상들을 만들고, 비석과 현판 등에 글씨를 새기는 젊고 유능하고 부지런한 석수였다. 솜씨가 뛰어난 데다 심지어 성품까지도 다정하고 순했으니…….
--- p.9

높아지는 성자의 목소리에 철수가 입을 열었다.
“그 약속…… 어떻게 지키면 되는데요?”
“때 되면 벌초하고 때 되면 찾아가 문안하고 수시로 민석이가 누군지 어떻게 죽어 거기 묻혔는지 말해주고요.”
“알았어요. 약속할게요.”
다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알겠다고 답하는 철수 앞에 성자가 백지 한 장을 내밀었다.
“여기 각서 쓰세요. 일 년 안에 형들에게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이 약속 못 지키면 이 결혼은 무횹니다. 만약 아이가 생길 경우 아이의 친권도 포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여동생에게 전하세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요. 내 눈에 띄면 오징어 먹물 발라내듯 그 주둥이를 토막 쳐서 으깨 버릴 거라고요. 그러니 평생 내 눈에 안 띄게 조심, 또 조심하고 살아라 하세요.”
--- p.43

아내가 임신을 하고 방앗간을 차려 자립의 길을 열면서, 술에 취하면 좀비처럼 살아나던 철수의 폭력은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 사이 시간이 흘렀고 철수는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들이 형들처럼 몽둥이를 휘두르진 않았지만 철수가 그들에게서 입은 상처는 깊고 컸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희의 배는 점점 더 불러오고 해산달이 다가오는데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에 실패한 철수에게서는 숨어서 홀짝거리던 예전의 음주습관이 되살아났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은밀하게 취한 철수의 눈이 먹잇감을 발견한 짐승의 그것처럼 번득이는 빛을 발했다. 영희는 그 눈빛 안에 갇혀 떨고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다가오는 위협, 아무도 모르게 가해지는 폭력, 그리고 저항할 힘이 없는 피해자, 또 그 안의 보호받지 못하면 사라지고 말 생명. 영희는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위기감에 몸을 떨었다.
“야! 내가 너랑 놀아주니까 네 친구로 보이냐?”
철수가 영희를 향해 물었다.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아랫배를 감쌌다
--- p.78

“나, 이발소에 좀 갔다 올게.”
영희를 따라 차에서 내린 철수가 말했다. 영희는 그러라고 했다.
‘그래. 심란할 땐 머리칼이라도 가지런한 게 좋지.’
영희는 이발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철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 저렇게 짜부라졌을까? 축구공처럼 통통 튀어 감당이 안 되던 저 남자가 공황장애라니. 가슴이 녹아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떡집에 계셔 주세요. 저쪽 가게 좀 들여다보고 올게요.”
떡집을 시동생에게 맡기고 쌀국숫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쌀국숫집에 도착하니 최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최가 주문한 식자재들이 입고되어 쌓여 있었다.
‘무슨 뜻이지? 미리 작정을 한 건 아니란 뜻인가?’
--- p.148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건 철수 각시 영희가 아니라 영희 신랑 철수였던 거야. 철수가 아무리 똥손에 똥발, 똥대가리여도 그들이 영희를 응원해 온 이유는 단 하나였어. 철수가 무사히 살아 있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어. 잘난 영희가 똥손 철수의 보증이 아니라 똥손 철수가 잘난 영희의 보증수표였던 거야. 영희가 자신이 신용의 아이콘이라는 믿음 아래 ‘철수 당신 이러면 안 돼’를 외치는 내내 그들이 응원한 건 오직 하나였어. 철수하고 살아내 보겠다고 애쓰는 게 고마웠던 거야. 영희 너, 이걸 착각하면 안 돼.
‘아! 나 지금껏 뭐 하고 산 거냐? 등신같이 잘난 척이나 하고…… 등신! 천하에 다시없는 등신!’
때늦은 깨달음에 요동치는 영희의 마음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와중에도 그녀의 남편 철수는, 한결같이 우울모드 일색이었다.
--- p.191

해감. 펄에서 사는 조개 속에는 펄이 고입니다. 이물질이 낍니다. 오랜 가뭄에 시달린 작물은 화상을 입습니다. 사나운 폭풍우에 맞선 나무는 가지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습니다. 영희와 철수와 성자들이 암담한 시간 속 척박한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동안 가슴에 억울함이 고이고 원통함이 쌓였습니다. 그렇게 힘들었어요? 누군가 물어주기를. 정말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어요? 누군가 비난이라도 해주기를. 그리하여 조개가 펄이나 이물질을 뱉어내듯 고이고 쌓인 억울함과 원통함을 해감해낼 수 있기를.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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