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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영웅 마하수

조선의 영웅 마하수

: 절의에 빛나는 장흥 마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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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2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284쪽 | 150*225*20mm
ISBN13 9788956657103
ISBN10 895665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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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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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 해전의 전초 기지가 된 장흥

12척(13척)으로 일본 수군 133척과 싸워 기적 같은 대승을 이끌었던 충무공 이순신 명량 해전의 전초 기지가 되었던 장흥부의 회령포진. 1597년 정유년, 당시 회령포의 회령진성은 이 충무공이 삼도수군 통제사 교지를 받은 후 수군 재건을 마치고 회령포에 도착한 후 삼도수군 통제사로서 취임식을 가진 역사적인 장소였다.

당시 회령포는 만호가 있었던 수군 진(鎭)에 불과했는데, 왜 하필이면 충무공이 회령포에서 수군의 해전 출정식을 거행했을까. 당시 남해안에서는 해남에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선두리)도 있었다. 동쪽으로 여수에도 전라좌수영(현 진남관, 내례만호진)도 있었다. 충무공의 과거 전라도와 인연을 따져보면 1580년에 2년간 보임했던 고흥의 발포만호도 있었다. 그때의 회령포진은 전라우수영의 속진으로 만호가 있던 19진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충무공은 수군 재건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보성을 거쳐 회령포에 기착, 거기서 해전 출정식을 거행했다.

왜 하필이면 회령포였을까. 충무공이 단순히, 무작정 남해안 쪽으로 잠행하다 보니 우연히 도착한 곳이 회령포여서였을까? 사전 전쟁 준비에 철저했고, 조정의 도움 없이 거의 자력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무엇보다 천재적인 지략가였던 충무공이 무작정 잠행하다 보니 어쩌다 회진포에서 이르렀기에 거기서 그 역사적인 출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당시의 상황을 소환해보자. 1597년 2월 26일 충무공이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그로부터 5개월 후 새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元均)은 1597년 7월 15일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대패함으로써 일본 수군이 사실상 해상 제해권을 독점, 이제는 왜군이 마음 놓고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서진(西進)하고 이어 전라도는 물론 한양 가까운 인천 해안까지도 유린할 수 있는 국면이 조성된 상황이었다. 이후 충무공이 백의종군 중 진주(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 집)에 머무는 중에 삼도수군통제사 제수를 받게 되는데, 이때가 칠천량해전 대참패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1597년 8월 3일이었다.

충무공이 진주에서부터 수군의 재정비를 위한 잠행을 떠날 때, 충무공 곁에는 고작 군관 9명, 병졸 6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충무공의 1차 목표는 수군의 재건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병사와 병선, 군수물자와 군량미 확보였다. 충무공은 이처럼 수군 재건이라는 큰 목표로 잠행에 나섰던 것이다. 이리하여 충무공은 진주 → 하동 → 구례 → 곡성 → 옥과→ 순천→ 보성 조영창 → 보성 → 장흥 군영구미 → 회령포에 이르기까지 15일간 수군 재건을 위한 잠행길에 나선 것이다.

충무공이 왜 전라도 쪽으로 잠행을 감행했을까. 우선은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1551~1599)이 판옥선 1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 남해로 도피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경상도 해안은 이미 일본 수군에 장악돼 있었던 형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기 위해서는 전라도 남해 연안에서 왜군과의 대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충무공의 2차 목표는 수군 재건을 마친 후에, ‘과연 어디서 해전에 출전할 것이냐? 어디를 해전의 전초 기지로 삼을 것이냐?’였을 것이다. 이것이 충무공의 두 번째 과제요 주요한 현안이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충무공은 남해안의 사정과 지형 지세 등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가장 먼저 전라도 남해 연안 중 ‘울돌목 해전’을 고려했을 것이다.

KBS1 ‘불멸의 이순신’ 제94회 방영분 중, 1597년 8월 명량 해전 한 달 전, 통제영을 진도의 벽파진으로 옮긴 후 가진 긴급 참모 회의에서 충무공은 “울돌목은 최후의 보루(堡壘)입니다. 그마저 내준다면 이제 더는 조선의 안위를 생각 할 수 없으니, (울돌목에서) 수군으로 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소이다 … ” 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TV 드라마 방영에서는 울돌목 해전의 중요성이 나오긴 하지만, 실제적으로 충무공도 울돌목의 지형적인 이점, 즉 소수의 배로 수백 척의 일본 수군과 대첩해 승리 가능성이 큰 지형의 장점을 너무나 잘 알았을 것이고,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아마 밤낮으로 울돌목의 전투를 수없이 상상하고 구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충무공이 울돌목 해전을 가정했다면, 그 다음으로 울돌목에서 가장 가까운 연안의 어딘가를, 즉 보성만, 득량만, 강진만 중 해남과 진도간의 해협과 가까운 곳, 일본 수군으로부터 정보도 차단하고 효과적으로 은둔할 수 있는 내항이면서 수군진이 있는 곳으로 해남현과 강진현, 보성군 사이의 유일한 부사 고을이던 장흥부의 회령포를 생각했을 것이다. 즉 장흥부 관할의 유일한 만호수진인 회령포진을 ‘해전 출정식’의 장소로, ‘해전 전초 기지’의 최적지로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장흥부는 서남해안에서 대표적인 부사 고을이었다. 또 충무공과는 아주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충무공의 병참 참모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고, 자신이 옥에 수감되었을 때 선조 왕에게 나아가 목숨을 내걸고 자신의 방면을 주청했던 반곡 정경달이 바로 장흥 출신 문관이었음을 충무공이 모를 리 없었다.

또 정유재란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장흥은 ①임란 때 네 아들 원개(元凱)·영개(英凱)·형개(亨凱)·홍개(弘凱)와 사위 백민수(白民秀), 조카 희개(希凱) 등과 함께 창의했으며, 자신은 군량을 조달하여 전라좌의병군(全羅左義兵軍)의 성주성 수복전(收復戰)을 승리로 이끌게 하였던 문위세(文緯世)의 고을이었고 ②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자신의 막하로 들어와 한산도 해전에서 전사했던 위방(魏?)을 배출한 고을이었으며 ③충무공 자신의 막하에서 조전장으로 옥포, 적진포, 율포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던 위대기·신용호·변홍달 등의 수많은 의사(義士)들을 배출한 고을이었다. 그처럼 수많은 의사들을 배출했던 고을이 바로 장흥이었음을 충무공이 모를 리가 없었다.

충무공은 또 서남해 연안 중 유일한 부사 고을인 장흥을 충절의 고장이요 선비의 고장이요 더없이 의로운 고장으로 이해했을 것이고,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선비들로부터 큰 지원과 협조가 있을 것을 고려도 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정유년 충무공이 장흥부로 잠행하는 중에 미리 장흥의 선비들에게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명을 내린 것이 정명열의 ‘정유년 일기’에서 확인된다.

지금 곧 이통상(李統相-충무공)에게 적 탕진(蕩盡)의 명을 받았다. 남은 배나 군사(軍師)가 박약하고 군량미도 부족하다. 도움을 받지 못하면 적을 막을 수 없다. 만일 적을 섬멸하는 데 공이 될 수 있다면, 피란선 일척과 양미 오석이라도 이통상(충무공)에게 보내드려야겠다. 이때는 정문(呈文 : 하급 관아에서 동이계통의 상급관아로 올리는 공문)도 있어 편하다. 則李統相受命於蕩敗之 餘舟師甚盡 單兵糧不足 未可以禦賊不如助 基萬一以成殲賊功遂 以 避難船 一隻 糧米五石送呈 于李統相 時有呈文以逸(ⓒ 『齊岩集』 (정명열), 106쪽)

충무공이 장흥고을에 진입하면서, 혹은 진입하기 그 전에 미리 “군세가 미약하고 군량미도 부족하다. 도움을 받지 못하면 적을 막을 수 없다.”등의 내용과 적을 함께 탕진하자는 등을 요청하는 공문을 정명열에게만 보냈을까. 아마 장흥부에 있는 거의 모든 선비들에게 보냈을 것이다. 정명열의 경우만 보더라도, 충무공은 이미 ‘의향의 고을’인 장흥부에는 의사(義士)로 나설 선비들도 많고 이들로부터 능히 지원도 받을 수 있었을 것으로 거의 확신했음이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충무공 막하로 장흥의 수많은 의인(義人)들이 모여들었다. 백진남(白振南), 정명열(丁鳴說), 문영개(文英凱) 등 장흥의 지사 10여 명이 향선을 이끌고 후원군으로 참여했으며 이들 외에도 장흥의 많은 선비들과 수많은 상민들까지 의병으로 또는 후원군으로 참여하지 않았던가. 또 안양면 동촌 출신의 초계변씨인 변홍주·변국형·변국간·변국경 등이 전선 10여 척과 노를 젓는 사람 300여 명을 데리고 통제사의 군영에 합류하지 않았던가. 또 60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노익장 마하수도 네 아들 성룡(星龍)·위룡(爲龍)·이룡(而龍)·화룡(和龍)과 함께 후원군으로 참여하지 않았던가. 또 조선 해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후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온 전선 중 부서진 8척을 장흥 출신 김세호가 장흥 의인 300여 명과 함께 수선하여 명량 해전에 참전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하여 충무공은 당초부터 장흥부의 회령포에서 ‘해군의 기포’를 작정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정유재란 때 충무공의 공식적인 해전 출정 선포로, 장흥부 산하 회령포진과 회령진성은 역사적인 명량 해전의 전초 기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수많은 장흥 출신 의사들이 충무공의 막하로 모여들었거나 또는 후원군으로 대거 참여하여 결국에는 기적 같은 명량 해전의 대승을 일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회령포는 정유재란 때 실로 충무공의 대승전(大勝戰)의 기폭제가 되었던 곳으로 ‘의병 장흥’의 상징 같은 곳이 될 수 있었다.

장흥이 왜 ‘문림의향(文林義鄕)’인가

오랫동안 장흥군에서는 장흥을 상징하는 수식어로 ‘문림의향(文林義鄕)’이 대표적인 표현인데. 이 표현이 장흥인의 자긍심을 대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림(文林)’은 곧 ‘장흥문학’을 말한다. ‘의향(義鄕)’ 역시 이순신 장군의 명량 해전 시발점인 된 회령진성을 비롯하여, 정경달의 반계사, 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동학 최후 격전지인 석대들 등 의향(義鄕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적 자원과 역사적인 정체성에서 비롯된 말이다. 장흥군의 정체성은 바로 이 문림(文林)과 의향(義鄕)이었던 것이다.

‘문림의향(文林義鄕)’은 ‘문(文, 문학)이 숲을 이룬다’는 문림(文林)과 ‘의로운 고을’이라는 의미의 의향(義鄕)이 합해진 어휘다. 여기서 문림은 조선조 장흥에서 성행한 가사문학으로 인해 소위 ‘장흥가단(長興歌壇)’으로 불리울 정도로 가사문학이 발흥되었던 장흥문학의 전통이 오늘날에 그대로 전승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한국 현대문학의 거봉인 이청준·송기숙·한승원·이승우·한강 등 유명한 문인이 배출되었다. 장흥 출신으로 문단에 데뷔한 문인이 자그마치 250여 명에 이를 정도이다. 이에 따라 장흥에 널리 산재한 문학 자원도 풍부하여 지난 2008년 4월 24일 전국에서 최초로 ‘정남진 장흥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지난 2021년 1월에는 ‘정남진 장흥 문학관광기행특구’가 재지정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학 고을로서 역사성과 정체성으로 장흥은 자연스럽게 ‘문학의 고을’, ‘문학관광기행특구’로 불리어지니, 그 대표적인 통칭어가 바로 ‘장흥 문림(文林)’인 것이다.

‘의향(義鄕)’ 역시, 조선조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마치고 수군 재정비를 위한 15일간의 잠행 끝에 장흥 회령포진에 도착, 그 회령진성에서 명량 해전 승전의 시발점인 된 12척의 판옥선과 120여 명의 수군을 중심으로 ‘해군 기포’를 감행했던 역사성으로 시작된다. 또 당시 장흥부 소속의 수많은 선비들 즉 마하수·마성룡·마위용·백진남·김성원·정명열·문영개·문홍개·임영개·김세호·변홍원·변홍량·변홍달·변홍적 등을 비롯해 수많은 의병이 이곳 회령진으로 모여들어 이순신을 종군하며 이순신의 해전에 참여했고 후원하여 명량 해전 대승을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 갑오동학혁명 때는 동학 최후의 격전이 치러질 만큼 동학농민군의 위세가 전남도에서는 가장 드높았던 고을이 장흥이었으며 또 일제강점기를 맞아서는 김재계, 고영완 등 수많은 독립 투사들이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

이와 같은 장흥의 ‘문향(文鄕-文林 고을)’과 ‘의향’으로서 전통은 고려 인종 때인 13세기부터 조선조 말까지 8세기 동안 장흥이 전남 서남 지역의 유일한 중심인 부사고을로서 입지해 온 역사성에서 가능했다. 부사 고을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중앙 고위직 관리(종3품 이상)들이 임란(壬亂) 당시까지만 해도 거의 3세기 동안 장흥에서 부사로 재직하는 역사가 지속되었고, 중앙의 그 고위 관리와 지역의 향토 선비들 간의 유대·공유가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당대의 유교와 유학이 중심이 된 정치·사회·문화 체제 아래에서, 장흥부는 전남도 서남부의 중심지로서 입지할 수 있었고, 그러한 연유로 장흥 지역에는 유별나게 ‘유림(儒林)·사림(士林)’의 문화가 자연스레 융성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림(士林) 문화는 다시 가사문학 등 ‘문림(文林)의 부흥’으로 이어졌으며, 또 사림(士林)의 핵인 군자도(君子道)와 선비 정신의 고양으로 국란 등을 맞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창의(倡義)하고, 또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내건 동학혁명 때는 그 동학 정신의 발현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장흥은 의향이요 문향으로서 역할과 역사적 전통을 고수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장흥이 ‘의향(義鄕)’인가

“왜 장흥이 의향인가. ‘의향(義鄕)’이란 옥편이나 사전 등 그 어디에도 없었던 새로운 합성어로, 1982년 5월에 필자가 장흥군수로 있을 때 처음으로 필자가 직접 만들어낸 장흥군의 군호(郡號)이자 대명사이다. … 의향(意鄕)이란, 의로운 고을 또는 의로운 고장을 일컫는다. 장흥군이 지니는 의향의 의미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과거적 의미의 의향으로, 정의(正義)를 위하여 싸우는 병사를 의병(義兵)이라고 하는데, 장흥에는 예로부터 나라를 위하여 다른 고장보다 유난히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절의(節義)를 지켜온 고장으로, 특히 조선왕조 시대의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정유재란과 선조 29년 충청도 이몽학난(李夢鶴亂), 인종 초 때 이괄의 난, 정묘호란(丁卯胡亂)·병자호란(丙子胡亂), 영조 4년 이인좌난(李麟佐亂), 철종 때 삼정문란(三政紊亂), 고종 때 병인양요(丙寅洋擾)·갑오 왜구(甲午倭寇)와 동학혁명·을미사변(乙未事變)·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일본의 경술(庚戌) 국권 박탈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국난이 있을 때마다, 군민이 일어나 이를 평정했던 역사적 위업(偉業)의 전통을 선양(宣揚)하는 뜻이다.”
ⓒ신계우, 「의향 장흥 -그 칭정(稱情)의 의의를 중심으로」, 『장흥문화』, 제6호, 1984, 44쪽.

상기에서 인용한 글은 1982년 장흥군수로 재임하던 신계우(申季雨) 군수의 글 ‘의향 장흥 -그 칭정(稱情)의 의의를 중심으로’의 논고 서두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이다. 이로써 장흥의 상징으로 표현된 ‘문림의향’에서 ‘의향義鄕)’이라는 말이 신계우 군수 때부터 사용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장흥이 의향이 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는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의 하나로 조원래(趙援萊, 순천대 교수)의 ‘임진왜란과 장흥의병’ 주제의 논고에서 확인된다.(『장흥문화』, 제8호, 1986).

조원래 교수는 이 논고의 서문에서 “장흥읍내 어느 고목 앞에 세워진 ‘의향장흥(義鄕長興)’이라고 새겨진 빗돌(현재는 장흥군청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을 보고, ‘이 비명(碑銘)이 혹시 임진 의병 활동과 연관이 있는가 하는 의문점으로, 이를 역사적으로 확인해보고 싶어 『호남절의록』을 분석하여 본 글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조원래의 분석에 의하면, 『호남절의록』에 등재된 ‘전라도 중요 15읍’의 의병 지도자는 총 465명이었다(전라도 전체 53읍의 71%). 이중 가장 많은 의병 지도자는 영광(60명, 인구 12,672명), 나주(50명, 인구 17,858명)), 광주(49명, 인구 8.299명), 남원(46명, 10,782명), 장흥(35명, 7,901명) 등의 순이었다. 그러므로 장흥은 15읍 중 상위 5위에 해당됐지만, 인구수에 비례하면 최상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위 영광군의 경우, 특별한 경우다. 즉 영광 군수가 상을 당하여 영광군을 비우게 되자 53명의 선비가 향토 방위에 나섰는데, 이때 참여한 인사 모두가 『호남절의록』에 등재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영광 다음으로 나주가 50명으로 2위인데, 당시 나주를 장흥과 비교하면 인구수에서 나주가 장흥보다는 곱절보다 3천여 명(나주 인구 17,858명 / 장흥 인구 7.901명)이 더 많아, 정작 인구수에 비례하면 장흥이 나주보다 많은 셈이라는 것이다.

특히 당시 읍세(邑勢)를 보면, 장흥의 경우 호수는 15읍 중 9위, 인구는 10위, 토지 면적은 10위였고 이를 다시 전라도 전체 53읍으로 확대하여 비교하면 장흥의 호수는 10위, 인구는 16위, 토지 면적은 11위에 속하였다. 이처럼 장흥 읍세는 대체로 10위권을 벗어나 있음에도 의병 지도자 배출은 5위권이었다. 그런데 실인즉, 이것 역시 1위 영광을 배제하고 2위 나주와 비교하면, 인구수가 나주가 장흥보다 훨씬 많아 인구 비례 측면에서 보면, 장흥이 광주 다음 정도의 최상위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관군 부대 협찬 집단을 봤을 때, 이 부문 역시 장흥의 의병 고을로서 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흥양(고흥)이 83명(사마 출신자1, 무과 출신자 42명, 전체 인구 9,977명)으로 1위, 2위는 장흥 42명(문과 출신자 1, 사마 출신자2, 무과 출신자 11명, 전체 인구 7,901명), 3위는 나주 40명(문과 출신자 1, 사마 출신자 2, 무과 출신자 24명), 4위는 순천(40명, 무과 24명), 5위는 무안(27명) 순이었다. 여기서 흥양이 1위인 것은 무과 출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고 조 교수는 분석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으로, 읍세에서 10위 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장흥이 흥양 다음으로 많은 관군 협찬자를 내놓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의병 지도자나 관군 협찬자 양쪽에서 모두 5위 권에 속한 고을은 오직 나주와 장흥뿐이었다. 그런데 읍세에서 나주는 세 가지 통계(호수, 인구, 토지 면적)에서 모두 장흥의 갑절을 넘어서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장흥의 의병 지도자 배출이며 관군 협찬자 등 의병 활동상이 나주보다 앞선 고을이었다는 것이 확인이 된다. 이로써 당시 전라도에서 장흥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의병 고을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조원래 교수의 이 논고가 시사해 주는 것은 첫째, 『호남절의록』에 나타난 의병 활동상으로 봤을 때 비록 의병 지도층에 한정된 것이었다고 해도, 당시 지도층의 의병 활동(당시 양반이고 선비인 의병 지도자가 창의하면 친인척, 자식은 물론 가솔들도 모두 따라 나섰다)으로 인하여 당시 지역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각 지역(15개 읍)의 의병 활동상도 능히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둘째, 장흥 의병은 지도층 인사들 거의 대부분이 전라좌의병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장흥의 의병은 단순히 향토 방위성을 띈 의병이었다기 보다, 국난 극복 자체를 지향한 의병이었다는 점에서 가히 장흥이야말로 진정으로 의향, ‘의병의 고을’임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장흥의 의병의 활동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도 아주 두드러진 자취를 남긴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장흥 출신 의병 지도 집단은 그 소속 별로 보면, 고경명 휘하 1명, 김천익 휘하 2명, 황진 휘하 4명, 최경회 휘하 1명, 최경장 휘하 4명, 임계영 휘하 13명, 기타 9명으로 나타나 있다 또 당시 장흥 출신 관군 협조자의 그 소속을 보면, 권율 휘하 9명, 전라병사 이복남 휘하 2명, 어가호종(御駕扈從) 8명, 나머지 26명은 모두 이순신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가운데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장흥 의병들의 활약상

보다 구체적으로 당시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의 장흥 출신 의병의 주요한 활동만 살펴보자. 문위세(文緯世,1534∼1600)(南平人)는 죽천 박광전(朴光前)·임계영(任啓英)과 함께 창의하였다. 제자, 자식(5남), 사위, 조카까지 동원하여 200여 명의 의병을 모았고, 거기다가 집안 노복 100여 명까지 이끌고 출전하였다. 문위세는 전라좌의병대의 군량미 확보와 조달의 총책을 맡았으며 장수·무주·금산· 성주·개령 전투에 참전하며 흰옷 입은 의병장인 ‘백의 의병장’으로 불려지며 명성을 떨쳤다. 용담현(龍膽縣)의 현령이었을 때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아들, 사위, 조카 등과 함께 500여 명으로 구성된 수성군을 결성하여 왜병의 퇴로를 격퇴하고 적을 무찌른 공으로 1600년 67세 때 파주목(坡州牧)의 목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문위세의 재종질(7촌) 문기방(文紀房, 1548∼1597)(南平人)은 전라병마절도사영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종재 명회(明會)와 그리고 여섯 아들과 4명의 사위에게 명령하여 2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고경명, 권율 막하에서 활동하였다. (문기방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매우 위급하게 되자 장흥에서 데려온 가노 수백 명과 함께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부사령관으로서 남원성 북문을 지키던 중 왜군과 맞서게 되었다. 이때 적삼소매에 혈세를 쓴 뒤 갑옷을 벗어 하인 조감쇠에게 넘겨주고 육박전으로 싸우다 순절하였다.)

위방(魏?,1532∼1593)(長興人)은 임진란 때 노비, 명 가솔 등 100명을 이끌고 충무공위 막하로 들어가 흥양원을 제수하니 향병으로 고흥 나로도(羅老島)를 사수하였다. 이때 왜적 수백 척이 앞바다를 에워싸고 물밀 듯이 들어오며 한산의진(閑山義陣)이 무너지고 이어 나로도의진도 붕괴되면서 공은 노비 100여 명과 함께 순절하였다위대용(魏大用,1530∼1610)(長興人)은 노령이어서 의병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호남모곡도우사가 되어 군량미와 무기 등을 모아 진중으로 보냈고 종제 대기(大器)·대택(大澤)·조카·순정(舜廷) 등을 창의, 각 의병장 막하 등에서 활약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위대기(魏大器,1559∼?)는 김표(金標)·위공달(魏公達)·노홍(魯鴻) 등과 의병을 일으켜 충무공 막하에서 그리고 웅치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위대경(魏大經,1555∼1623)도 전라병마절도사 황진을 따라 웅치·상주·이현 전투에서 전승하였다.

정명세(鄭名世,1550∼1593)(晉州人)는 임란 후 충청 해미 현감으로 부임, 호서지방의 의병장이 되었으며 1593년 진주성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한 후 군사 5,6명과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는데, 이때 진주성 전투에서 그의 아우 명립(名立)·명진(名振)도 같이 순국하였다. 또 정명세의 또다른 아우 정명원(鄭名源,?∼1593)도 임란 때 청안(淸安) 현감으로 부임한 이후, 괴산·음성이 적에게 붕괴된 후 거의 혼자서 왜적을 맞아 수많은 왜적을 참살한 후 순절했는데, 결국 정명세 4형제가 모두 순절한 것이다.

강윤구(姜謂龜,1542∼1592)(晉州人)도 의병장 조헌(趙憲) 막하로 아들 봉령(鳳翎)과 함께 장병 50명을 모아 의병장 조헌(趙憲) 막하에서 조공의 종사관으로 참여하고, 금산(錦山) 전투에서 적을 방어하다 고군분투 끝에 부자(父子)가 순절하였다.

김기해(金起海,1549∼1619)(金海人)도 임란 때 군량미를 모으고 의병장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수백의 적을 참살하며 ‘흑권장군(黑拳將軍)’으로 불렸고, 김기해의 종제(從弟) 김기서(金起西,1558∼1633)도 함께 종형 김기해를 따라 권율 막하에서 수많은 적을 참살하여 적들이 공을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

김여중(金汝重,1556∼1630)(靈光人)도 임진년에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의병정 임계영(任?英) 진중으로 수송하고 임공의 막하에서 금산, 무주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동년 9월에는 변사정(邊士貞)이 의병을 일으키자 또 다시 정병 300명과 군량 300석을 마련하여 변공을 지원하고 변공의 진주 전투에서 적을 수십 명 참살했다. 이때 김여중의 종제(從弟) 김여홍(金汝弘,1552∼1628)과 김여강(金汝剛,1572∼1597), 김의룡(金懿龍,1574∼1627)도 임계영 막하와 변사정 막하에서 의병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김여강은 정유재란 때 삼협(三峽) 전투에서 종횡무진으로 적을 참살하다가 순절하니, 공의 나이 26세였다.

김율(金慄,1529∼1628)(靈光人)도 임란 때 군량미를 모으고 장자(長子) 김여숙(金汝璹,1564∼1648), 종제(從弟) 김여건(金汝健,1664∼1605)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을 모아 의병장 권율(權慄) 막하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다.

김응원(金應遠, 1569∼1638)(慶州人)도 정유재란 때 형 응규(應?,1542∼1620)과 함께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왜적이 침입하자 토구동(??洞)에 매복해 있다가 적을 물리쳤다. (김응원은 이괄의 난 때 모병모유사로 의병 군량미를 모아 큰 공을 세웠다).

또 장흥의 관군 협조자 중 유일하게 문과 급제자인 정경달(丁景達)은 임란 초전 때 선산 부사로 있으면서 금오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다시 죽령(竹嶺)에 6진을 설치하여 요격전을 펼쳐 전승을 거두었다. 그는 훗날 이순신의 추천으로 그의 종사관으로서 활동 또한 뛰어났다. 또 반곡의 아우인 정경수(丁景壽)와 정경달 아들 정명세(丁景說) 역시 육전, 혹은 해전에 참가하여 쌓은 공이 적지 않았다.

그 외에도, 임진왜란 때 호종(扈從) 자, 전투 공훈 자(초계 변씨 의사義士들은 별도 소개) 등은 제외하고, 의병으로 참여해 순절한 장흥부 출신 의사(義士)들 몇몇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상인, 농민, 노비, 머슴 등 ‘무명 의사義士’들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고삼춘(高三春,생몰?)(長澤人)은 숙부 첨정(僉正) 고언장(高彦章)을 따라 의병장 최경장(崔慶長)을 도와 영남 전투에서 순절 ▶고수위(高守緯,1531∼1593)(長興人)는 임진란에 창의하고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막하의 진주성(晉州城) 전투에서 싸우다 순절 ▶김대복(金大福,?∼1597)(淸州人)은 의병으로 참여하여 한산도 부산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데 이어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순절 ▶김사원(金士遠,1584∼1622)(光山人)은 임란 때 고향으로 쳐들어 온 왜선 10여 척을 발견하고 의병에 참여, 중과부족으로 왜선과 함께 침몰하며 순절 ▶김성장(金成章,1559∼1593)(淸州人)은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막하 금산(錦山) 전투에서 용전분투하다 순절 ▶김헌(金憲, 1561∼1592)(光山人)은 임란 때 의병장 조헌(趙憲) 막하에서 의병으로 참여 3회나 적을 격퇴하고 분전 중에 순절 ▶남응개(南應凱,1545∼1593)(宜寧人)는 임란 때 임계영, 김천일과 창의를 결행하고 왜적을 무수히 참획하고 큰 공훈을 세웠으며 진양(晉陽) 전투에서 투신 순절 ▶남은개의 재종제 남응길(南應吉,?∼1592)도 충무공 막하의 성주(星州) 싸움에서 수백 명의 적을 참살하고 순절 ▶선세신(宣世臣,1562∼1597)(寶城人)은 충무공이 공을 장사(壯士)로 선발하였고, 충무공 막하의 한산싸움에서 순절 ▶신용호(申龍虎,1568∼1598)(平山人)는 임란 때 위대용(魏大用)의 막하에서 참전, 율포(栗浦)싸움에서 위대기(魏大器) 등과 적선 50척을 불태웠으며 정유재란 때 한산싸움에서 아우 신용준(申龍俊)과 함께 순절 ▶신용호의 아우 신용준(申龍俊,1573∼1598)도 형 용준과 함께 충무공 막하의 한산싸움에서 순절 ▶안극지(安克智,1546∼1593)(竹山人)는 임란 때 의병장 조헌(趙憲) 막하의 금산(錦山) 전투에 참여 중 순절 ▶양헌(梁軒,생몰?)(淸州人)은 임란 때 임계영의 격문을 보고, 자신은 늙고 병이 깊어 주부(主簿)인 아들 양자하(梁自河)에게 군량미 100여 석을 마련토록 하여 대신 참전케 했으며, 양자하는 영남 임계영 진중에 군량미를 전해주고 성주에서 왜적을 추격 중 순절 ▶이맹(李孟, 명종조∼1592)(仁川人) 임란 때 단신으로 행재소(行在所) 들어가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평양성 싸움에서 많은 적을 참살하고 순절 ▶이경주(李擎柱,1564∼1594)(慶州人)은 충무공 막하에서 정의(正義) 수문장으로서 한산도 싸움에서 많은 적을 격파하고 순절 ▶이귀희(李貴希,?∼1597)는 이경주(李擎柱) 손자로 명량해전 현장으로 달려가 충무공에게 이경주 손자임을 밝히고 참전, 적과 접전 중 순절 ▶장의백(張義栢,생몰?)(興城人)은 1597년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으며, 같은 해 9월 우수영 전양의 병사 모집에 다시 참여, 우수영 전투에서 순절 ▶장경남(張景男,?∼1594)(興德人)은 임란 때 종형(從兄)인 경홍(景弘), 이지득(李止得)과 함께 창의, 여러 차례 왜적을 격파하다가 장흥포 싸움에 이어 고흥포구까지 적을 추격 중에 공과 종형 경홍, 이지득 모두 순절 등이다.

이순신 막하에 참전하여 명량해전 등에서 세운 사례도 있다. 백의종군하게 된 충무공이 장흥 회진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12척과 120여 명 군사를 얻어 전열을 정비할 때 마하수(馬河秀), 변홍건(卞弘建)과 그의 두 동생, 문영개(文英凱), 백진남(白振南) 등과 더불어 향선 10여척을 인솔하고 충무공 막하에 나아가 명량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움으로써 소위 이순신의 명량 해전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그밖에 회령포의 지포를 비롯하여 당포, 명량 대첩, 노량 해전 등에서도 장흥 출신 의병들은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초계 변씨 13인 의열(義烈)’ - 유례없는 의병 활동
초계 변씨 13충훈 유허비
16세 17세 18세
변국형
변국형
변국형 변홍원
변홍제
변홍주 변덕황
변국간
변국간
변국간
변국간 변홍건 변덕장
변홍달 변덕일
변홍적
변홍선
변국경 변홍량
? 변종영 변공의

*고딕자 13인 : 초계 卞氏 13충훈 유허비
*마산출신 변연수·변립 부자 포함 15인 : ‘임란 조계 변씨 15충의사’
*마산출신의 변연수(1538∼?)·변립(∼1597)도 임란 때 순절, 이들 2인을 포함하여 초계 변씨15인을 ‘임란 조계변씨 15충의사“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장흥을 의향(義鄕)으로 지칭할 수 있는, 보다 특별한 사유이자 장흥의 의병 정신을 가장 크게 돋보인 대표적인 사례가 있으니, 바로 초계 변씨(草溪卞氏) 일문의 ‘초계 변씨 13의열(義烈)’의 의병 활동이다. 이 충무공의 어머니 초계 변씨(草溪卞氏)와의 관계로 장흥 안양면 비동리 동촌 일원에 거주하던 초계 변씨 가(家)는 충무공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종군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당포(唐浦), 지포(芝浦), 남해 등지의 여러 해전에서 모두 순절하였다. 이 변씨들 중 특히 ‘변국형·변국간· 변국경’ 3형제 집안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충청도 태생으로 동복현감을 지낸 13세 변온(卞溫,1474~1554)이 지금의 안양면 동촌에 입촌하여 입향조가 된다. 이후 16세 때 변국형·변국간(1527~1591)?변국형 3형제 대에 이르러 동촌마을 변씨의 성세가 두드러진다. 이 3형제 중 변국간은 특히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 7곳의 병·수사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들 3형제의 아들대인 17세, 손자들인 18세 후손들이 임진왜란 때와 명랑해전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장남 변국형은 홍원·홍제·홍주 3남을, 차남 변국간은 홍건·홍달·홍적·홍선 4남을, 삼남 변국경은 변홍량을 두었다. 그런데 이들 17세인 8종형제 모두가 다 명량해전 등에서 충무공을 돕거나 장흥 지포해전 등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나서다 순절한다. 그리고 18세 중 〈표〉에서 보듯, 17세 변홍주의 아들 변덕황, 변홍주의 아들 변덕장, 변홍달의 아들 변덕일과 이들과 종형제로 알려진 변공의(부는 17세 변종연)까지 18세 4명의 종형제 역시 모두 정유재란 등의 전장에서 순절한다.

초계 변씨들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참전과 순절은 충무공의 모친이 초계 변씨여서, 이른바 충무공의 외척인 이들이 충무공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국난 극복에 앞장서면서 장흥을 ‘의병의 고을’로서 입지를 더욱 탄탄히 다졌음을 보여주었다고 할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하여 17세 8인, 18세 4인에 16세 변국간이 명종 때 북병사로 오랑캐를 수차 무찔러 7도 병마사를 역임하였는데, 이 변국간까지 포함하여 ‘13인 충의사’가 탄생되기에 이르렀고, 후인들이 그들 변씨들의 고향인 동촌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장흥군 안양면 수양리에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13인의 의열비’ 즉 ‘초계 변씨 13충훈유허비’를 세우니, 그 유허비가 지금도 실존해오고 있다. (이후 병자호란 이후 출전 인사를 비롯, 장흥 동학 운동, 한말의 의병 활동, 일제 강점기의 항일 운동 등의 의향 관련 부문은 생략한다.)

어쨌든, 장흥은 이처럼 임진왜란·정유재란 등을 계기로 ‘의향’이요, ‘의병의 고을’로 우뚝 입지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정유재란 때, 충무공의 후원군으로 참여, 네 아들과 함께 고사 위기에 직면한 충무공을 구하기 위해, 무장도 되지 않은 후원군의 향선이었음에도, 혈기왕성한 30, 40대 젊은이도 아닌 60 고령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물론 향선에 딸린 수십 명의 가솔과 네 아들의 목숨까지도 내걸고, 오로지 충의(忠義) 정신 하나로, 단숨에 적진으로 향선을 내몰아 겹겹이 포위된 적진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숨진 마하수 공이야말로 ‘장흥의 의병’ 정신에 정점을 찍은 숭고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마하수 공의 순절의 의미

정유년 1597년 명량 해전에 후원군으로 참여한 마하수(馬河秀)의 전장 활동을 묘사한 사서(史書) 등의 주요 내력은 아주 간단하다. 다음의 3건의 내용을 보자.

“… 공(마하수)이 고을의 배들(향선 10여 척)을 모아 외양(外洋)에 배치하고 바라보니 이공(이순신이) 적들에게 포위되었으므로 칼을 빼어 들고 “대장부가 죽을 때이다.”하고 두 아들 성룡(成龍), 위룡(爲龍)과 함께 포위망 속에 깊숙이 들어가 힘껏 싸우다 탄환을 맞고 죽었다. 鳴梁之戰. 公聚鄕船排陣外洋望見. 李公爲賊所圍. 拔劍曰大丈夫死耳 與二子 成龍爲龍 ?圍 力戰中 丸而死”(『호남절의록』)

“… 왜군과 전쟁이 명량(鳴梁)에서 시작되었다. 마하수는 바다 밖(전투현장의 외곽)에서 진을 쳤다. 그러던 중 이순신이 왜군의 배로 포위된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에 공이 칼을 뽑아들고 소리치기를 “장부(丈夫)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두 아들 성룡(成龍)과 위룡(爲龍)도 함께 왜군을 향하여 돌격하였다. 힘써 싸운 지 한참 만에 (마하수는) 왜군의 탄환을 맞아 순절하였다. 鳴梁之戰 河秀列陣外洋。望見舜臣被圍。拔?曰丈夫死耳。與二子成龍,爲龍。突倭軍。力戰良久。中丸卒。(『硏經齋全集』)

“… 이공(이순신)이 왜적에게 포위되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공이 칼을 뽑아 들고 외친다. “장부에게 죽음이 있을 뿐이다!” 두 아들 성룡(成龍)과 위룡(爲龍)도 함께 적진을 행해 돌격하였다. 한참 동안 힘써 싸웠다. 그러나 공은 기어이 적의 탄환을 맞아 전사하였다. …望見李公爲賊所圍。拔劍曰。丈夫死耳。與二子成龍,爲龍。突入賊陣。力戰良久。中丸而卒。(『충무공전서』 마씨가장)”

마하수 공은 명량 해전 현장에서 후원군이었으므로, 당연히 먼 바다에 다른 향선들과 함께 진을 치고 있었다. 이는 왜적에게 충무공의 후원 세력이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아군에게는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일종의 전술 같은 것이었다. 그때 충무공이 왜선에게 포위되는 아주 절체절명의 위급 상황을 보게 되었고, 이를 목격한 마하수 공이 칼을 빼들고 포위된 충무공을 구하려는 마음 하나로 적진을 향해 돌격하였고, 이어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는 내용이다.

단순한 사건일 듯 여겨진다. 임진왜란이며 정유재란 때 전장에서 순절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얼핏 보면, 이것도 다른 전장에서 수많은 장병이나 의병들의 순절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듯도 싶다. 그러므로 명량 해전에서 순절했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마하수 공의 전후 사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실 몇 가지가 있고, 이것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아주 큰, 역대 어떤 전쟁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참으로 놀랍고 의미가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

첫째, 마하수는 전장에 투입된 병사나 의병도 아닌, 단순한 후원군이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당시 마하수 공의 나이가 60세였다는 사실이다.
셋째, 마하수 공이 명량 해전에 참전할 때 아들 넷을 모두 데리고 갔다는 사실이다.
넷째, 충무공을 구하려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갈 때, “장부에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굳은 결의를 나타냈다는 사실이다.
다섯째, 명량 해전에 참여한 마하수 공은 아예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한 출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다섯 가지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후원군은 말 그대로 전장에서 싸우는 전투군이 아닌 후방에서 후원하는 비전투요원이다. 명량 해전에서 후원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마하수 공도 명량 해전의 군사들에게 칼이나 화살, 의복 등 군수 물품이나 군량미 등을 지원해 주는 사람일 뿐이었고, 마공이 탄 향선도 그저 후원을 위한 피란선일 뿐이었다. 그래서 공은 충무공 막하로 들어가 전장에 직접 투입되는 일도 없었고 전장인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쪽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명량 해전의 인근 해변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전투를 구경하며 응원도 하고 소리치며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했다. 명량해의 해전 현장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때 후원군의 향선들도 이처럼 해변에서 전쟁을 구경하는 백성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 장흥에서 후원하는 향선이 10여 척이었고, 그 향선의 선주격인 후원인으로서 참여한 장흥의 의사(義士)들도 10여 명이었다. 그 10여 명의 의사들이 모두 그 해전이 치러진 날 그 후원군 향선에 승선해 있지는 않았다. 굳이 후원군 향선에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적과 대적할 일도 직접 싸울 일도 없이 그저 시위만 할 뿐인 향선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때 명량전의 후원군으로 마하수 등과 함께 참여한 정명열(丁鳴說)의 ‘정유년 일기’에서도 확인 된다.(『霽岩集』). 전사한 마하수 공의 시신을 실은 마하수의 향선이 육지(아마 회령포진이었을 것이다)에 이르렀을 때야 정명열도 비로소 마하수 공이 전사한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정명열 공이 해전이 치러진 날은 후원 향선에 함께 승선해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마하수 공은 굳이 전투 현장에 뛰어들 필요도 없는 후원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하수 공은 충무공의 위기 상황을 감지하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 현장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던 것이다.

둘째, 당시 공의 나이가 백발이 성성한 60세였다는 것 역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나이 60이면 최고령에 속했다. 최고령의 그 나이에 전투 현장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인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노령과 노구에도 불구하고 목전에 부딪친 충무공의 위기 상황을 보고는 죽음도 불사하고 그 전투 현장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인데, 그때의 그 절의(節義), 그 의기(義氣), 그 기상(氣像), 그 용기가 참으로 놀랍다. 과연 당대의 사정이 아무리 온 국토가 왜군에게 유린된 상황이었다고 할지라도, 백발이 성성한 60 노인이 칼을 빼들고 왜적과 싸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 경우는 아마 아주 드문 사례가 아니었겠는가.

셋째, 마하수 공이 후원군으로 참전한 명량 해전 현장에 네 아들도 대동하였다는 사실 또한 남다른 의미가 있다. 맨 앞에서 소개한 『충무공전서』며 『호남절의록』 등에는 당시 명량해에 첫째 성룡과 둘째 위룡의 이름만 거명된다. 그런데, 해남 ‘우수영관광단지’의 석동상(기념탑)에는 ‘마하수 오부자’ 명칭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존재 위백규가 쓴 ‘마하수의 사적(事蹟)’을 비롯해 ‘마하수의 행장’, ‘마하수의 유허비명’, ‘위성룡 행장’ 등에도 당시 명량 해전에 “네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과 구체적인 전투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당시 마하수 공은 네 아들을 비롯 가솔이며 노비들과 함께 명량해 후원군으로 참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충무공전서』 등에 두 아들 이름만 거명된 것은 셋째와 넷째가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기 때문인 것으로 유추된다. 당시 마하수 네 아들 중 첫째 성룡은 33세, 둘째 위룡은 21세, 셋째 이룡은 16세, 넷째 화룡은 10세였다. 네 아들 중 셋째는 약관도 안 됐고, 넷째는 고작 10세에 불과했던 것인데, 굳이 약관도 되지 않는 어린 두 아들의 이름까지 거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마하수 공이 당시 참전한 명량 해전이 후원군으로서가 아닌 의병 등으로 참전한 전투 현장이었다면 마하수 공도 아예 첫째와 약관을 갓 넘긴 둘째 정도만 대동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명량해 후원군으로서 참여하였기에 네 아들을 모두 대동했어도 크게 우려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후방에서의 비전투요원이요 후원군이었지만, 예기치 않게 충무공의 위기 상황과 맞닥뜨려 불가피하게 전투 현장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결국은 어린 셋째와 넷째도 전장으로 함께 뛰어든 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전후 사정이나 경과가 어찌 되었든, 마하수 공이 전투 현장의 후원 향선에 아들 넷을 모두 대동하였다는 점에서 마하수 공의 대단한 결기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위백규의 마하수 사적 기록에는 마하수 공이 단순한 후원군으로 참여한 것을 넘어, 전투까지 모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 정유년(1597년)에 왜적이 재침하니, 공은 창의(倡義) 계획을 세웠다. 이에 동참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 중 향촌사람 중에 의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백진남(白振男), 정명열(丁鳴說), 김성원(金聲遠), 문영개(文英凱), 변홍원(卞弘源), 김택남(金澤南), 임영개(任永凱) 등 10여 명이었다. 이들은 각각 피란선(避亂船)에 자제들과 자제들의 노복들, 군량미와 무기 등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우리는) 정세를 엿보아 적이 지쳐있을 때 전격적으로 적을 토벌한다는 계책을 세웠는데, 7월에 이통제(李統制, 충무공)가 복직되어 부임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장흥마씨대동보』 위백규의 마하수의 사적)의 내용이 그러하다. 이는 후원군으로서만 역할을 하는데서 더 나아가 “정세를 엿보아 적이 지쳐있을 때 전격적으로 적을 토벌한다”는 내용을 사전에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하수 공은 왜적과의 싸움도 사전에 계획하고 있었고, 그 왜적과의 싸움에 어린 두 아들을 포함하여 네 아들을 모두 전투현장으로 대동한 것이었으니, 명량해전에 임하는 마하수 공의 굳건한 결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장부에겐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전투 현장으로 뛰어든 60 노구의 그 의기(意氣)와 그 결행(決行)에 대한 의미이다. 실로 경이롭고 찬탄을 금할 수 없는 마하수 공의 결행이 아닐 수 없다.

전투 중에 적과 대적하다 죽을 수는 있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마하수 공의 경우는 적진으로 돌격하면 거의 100%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100%의 사지(死地)로 뛰어들어야 하는 형국이었다. 무장도 안 된, 전투병도 없는 향선으로, 그것도 다른 향선들은 나몰라라 하는데 단독으로, 완전무장한 충무공 전선마저 겹겹이 포위돼 있는 그 적진으로 돌격해야 하는 경우였다. 자칫 향선 자체는 물론이고 향선에 승선해 있는 네 아들이며 노비며 가솔들 모두가 한꺼번에 수장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돌격을 감행한 것이니, 어찌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거듭 말하지만, 단순히 후원군이었다. 게다가 60 노인이었다. 해변의 백성들처럼 전투 현장을 구경만 하다가 승패와 상관없이 그 현장을 빠져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마하수 공이 승선한 향선에는 병사들이 있지도 않았고 무장되지도 않은 단순히 피란선일 뿐이었다. 거기에다 공 자신의 목숨만 걸린 일이 아니었다. 그 향선에 타고 있던 수많은 가솔과 노비들 그리고 무엇보다 네 아들의 목숨까지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마하수 공은 거침없이 그 향선을 내몰며 전투 현장으로 뛰어든 것이다. 가히 ‘조선의 영웅정신’ 같은 절의(節義)와 결기(決起)요 기개가 아니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결행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죽음도 불사한 채 전투 현장으로 뛰어든 마하수 공의 결행은 결코 갑작스러운 결행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명량 해전의 후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충무공을 만난 후, 공이 지은 시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예(禮)·악(樂)·의관(衣冠)이 바른 성스러운 나라 / 禮樂衣冠聖祖基
추악한 오랑캐 쳐들어오니 어찌 말 달려가지 않으랴 / 那令醜虜肆驅馳
남아의 머리가 희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굳세도다 / 男兒白首心猶壯
문연(文淵)처럼 전쟁터에 나가 죽음을 맞이할 때이다 / 正是文淵?革時

이 시에서 마하수 공이 명량 해전에 임하는 마음의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곧 시 3,4구의 “남아의 머리가 희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굳세도다 男兒白首心猶壯 / 문연(文淵)처럼 전쟁터에 나가 죽음을 맞이할 때이다 正是文淵?革時” 라고 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이미 명량 해전에서 후원군으로 참여할 때부터, 마하수 공은 60 노구이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는 결의를 가진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마음가짐이 마하수 공으로 하여금 충무공의 위기 상황에서 의기(意氣) 넘친 결행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러한 마하수 공의 절의(節義)와 의기 넘친 결행이야말로, 장흥 ‘의병 정신’에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결행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그 수많은 전란의 전투 현장에서 이만큼의 의기 넘친 결행이 당시 조선의 땅 그 어디에서, 그 누구에게서 있었던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리하여 필자는 마하수 공의 명량 해전의 그와 같은 결행을 보고, 비록 결과적으로 많은 적들을 참살한 성과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공의 그 결행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위대한 의기 정신의 발현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공을 소개하는 이 책자에서 감히, 그러나 서슴없이 마하수 공을 ‘조선의 영웅’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마하수 공의 순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을을 표현한 정명열의 공에 대한 만장(挽章)의 글을 소개함으로써 이 글을 마친다.

공이 육십 세에 순절하시니
충렬의 위업을 해님이 비추고
혈강에 울화가 맺힌다
충절의 넋은 어느 곳에 의지할 것인가
벽파정 저문 썰물이 안벽을 치며 우는구나
(公年六十死於邦烈日秋霜照血腔鬱結忠魂何處托碧波亭下暮潮撞鳴呼)
---「‘의병의 고을 장흥’과 조선의 영웅 마하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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