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까지 쳐서 객지 생활을 한 지난 10여 년, 어머니가 아파 귀향한 것은 처음이었다. 집 밖에 나가 일 없이 발목이나 팔이 삐어 돌아오는 게 부모가 늙어가는 증거라는데, 앞으로 이런 귀향 이 더 드물잖게 될지 모른다. 어쩐지 그는 하룻밤 새 자신이 어른스러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성 장은 그의 내적인 것보다 부모의 늙음에서 오는 상대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 p.39~40
그는 돌연한 적개심에 휩싸였다.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걸어 병실 구석으로 패대기치고 싶었다. 아버 지에 대한 오랜 동안의 감정이 이리 깊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 왜 우리 엄마를 괴롭힙니까! 엄마의 그 많은 병들이 다 당신 때문이 아닙니까? 무책임하게 낙태할 거면서 왜 여섯째까지 임신시켰습니까? 아니 우리 자식들 사이사이에도 낙태가 몇 번이었습니까? 왜 엄마 생리일 안 지켜주고 왜 콘돔 안 썼 습니까? 엄마 자궁의 물혹도, 요강의 불그죽죽한 잦은 하혈도 다 그 때문이 아닙니까? 이렇게 많은 자식 낳게 한 아버지는 엄마한테 할 말 없어요. 엄마를 식모처럼, 애 낳는 기계처럼 부려먹고 살다가 언제부터 당신이 엄마를 이리 위했습니까? 결국 가사 노동력 때문이잖아요. 말년의 따뜻한 밥 맛난 고기 반찬 때문이잖아요. 눈이 멀어도 엄마가 머는 겁니다. 지금 누구보다 실의에 차 있는 사람을 왜 이리 사납게 몰아세웁니까? 그는 마음속을 휘젓는 분노로 주먹이 다 쥐어졌다.
--- p.72
무엇인가를 남기고 떠난다는 것, 사람의 죽음은 제 물질적 육체를 거두어 땅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지 만, 그 외 가져갈 수 없는 다른 모든 것들을 남겨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오늘은 서울을 떠나며 분홍색 팬티 한 장을 남겼지만, 머잖은 미래에 어머니가 서울이 아닌 이 지상 전체에서 훌쩍 자취를 감추며 이 한 장의 팬티와도 같이 사소하고 새록새록 저마다의 분명한 빛깔을 지닌 어머니 생애의 물 건들을 남기게 된다. 어머니는 사라지고 없지만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빨래 방 망이를 눈앞에 쳐들어보고 어머니의 낡은 텔레비전을 어루만지며 어머니의 흠집 많은 안경을 닦아보 며 어머니가 즐겨 먹은 겨울초 나물무침을 먹어보며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어머니의 코 고는 소리를 그리워하며 울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 걸려 있는 어머니 팬티와의 적나라한 대면처럼 어머니의 모든 사물들은 사물 본래의 사소함을 뛰어넘어 자식들을 단숨에 어떤 무시무시한 인연의 비의로 이끌어갈 것이다.
--- p.173
처남, 참 이상한 게 말이다. 아버질 선산에 묻고 집에 돌아와 며칠 잠도 잘 자고 잘 지냈는데, 어느 날 방 안에 누워 있으니까, 그때만 해도 형님들은 돈 번다고 외지 나가 있제, 엄마는 안방에서 주무시 제, 그러니까 집이, 세상이 문득 적막강산이라. 있으나 없으나 말 없는 아버지가 없는 것뿐인데, 아무 소리 없이 벙어리 같은 아버지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질 낀데, 그게 아이라. 그래도 화장실 가는 소 리, 기침 소리, 세수하는 소리, 자전차 끌고 나가는 소리…… 이래저래 아버지 소리가 났던 거라. 근 데 이제 집 안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같이 괴괴한 거라.
--- p.225
그가 혜희에게 외쳐댄 것은, 그 극적이고 과시적인 열변은, 결국 자신을 못 믿어서였다. 그는 그고 혜 희는 혜희였다. 어머니는 어머니,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그는 자신 말고는 알지 못했다. 미래를, 세상 의 일을, 제 몸 밖의 일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두렵다. 무엇보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이 두려웠다. 어 머니가 죽고 없어진다는 것이 겁났다. 죽고 나면 얼마나 미안해질지가 두려웠다.
--- p.241
추억, 기억이 아니라니까! 더 열렬히 살고 싶은데 왜 과거의 것, 추억, 기억인가. 아니 그의 추억과 기 억은 미래를 향한 것이다. 지나간 추억과 기억도 소중하지만 그것을 이어갈 미래의 그것들, 그 하나하 나를 정신 차리고 바라보겠다는 결심, 그 미래의 모든 결심 대상들, 미래 그 자체를 이 비상한 현재에 서부터 시작하여 제대로 한번 완성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럼 추억, 기억 아닌 다른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 무엇을 아니 이 무엇을 어떤 말로 불러야 할까. 희망일까. 소망일까. 상상, 꿈? 그것들,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그러나 곧 어떤 모습을 갖추어서든 현실화될, 그 모든 하나하나, 그의 몸속에 남게 될 그것들, 지금 눈앞의 사람이 그래서! 소중하고 지금 이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그래서! 더욱 값진 그 무엇, 바라보기, 껴안기, 헤쳐가기, 날아가기.
--- p.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