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은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툇마루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나는 툇 마루에 걸터앉아 있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마당에 대한 시각적 기억은 아마 그곳에 앉아 있는 동안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무슨 이유에선지, 아마 신발을 신거나 벗다가였는지, 나는 툇마루 밑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루 밑에 도사리고 있는, 숨죽인 어둠에 진저리를 쳤다. 그것은 어둠을 발견하게 된 최초의 충격이었던 것 같다. 당시 어린 내게 공포였고, 일종의 자히르였다. 넓은 마당의 대기와, 툇마루 밑에 뭉쳐 있던 어둠의 콘트라스트.
--- p.17 「나는 문학을 따라, 이 세계에 거처를 갖지 못할 것이다」 중에서
시를 쓸 때, 나는 우선 무언가를 보려고 한다. 그것은 어느 한순간일 수도 있고, 장면일 수도 있고, 때로는 사건일 수도 있다. 흔히 생각하기에 보는 것은 아는 것이라지만, 백 번 듣느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다. 나에게는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비슷하기는커녕 차라리 대립적인 것이어서, 나는 보는 순간 ‘봄’에 미혹되어 그 무엇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역설적이게도 봄으로써 알지 못하게 되고, 알지 못함으로써 빠져드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보게 되고 흐려지는 어떤 막무가내의 절연지대랄까, 이러한 것이 언제부턴가 내겐 있어왔는데, 이것이 바로 시로 생각되는 것이다.
--- p.48 「뒤통수가 떨어져 나간 듯한 이 사람」 중에서
최정례 시인은 정말 특별한 사람으로 내게 각인되어 있다. 그는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내게 다가온 사람이다. 늘 먼저 말하고 벌써 움직이는 사람이다. 행동이 거의 부재에 가까운 나에게 는 희귀한 것이었다. 이를 가리키는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일단 직접성이라고 해두자. 그와 세계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중간에 어떤 걸림돌이 느껴지지 않는다. 보통 우리들이 무언가를 통해서 바라보는 세계가, 그에게는 투명하게 나타나는 듯 보인다. 그는 사물을 바로 직면하고 관통한다.
--- p.79 「불확실한 편린과 불확실한 리듬만이 반복해서 도래한다」 중에서
아이가 점점 어휘 구사와 표현력이 풍부해지고 글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신비한 느낌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여러 생각이 들곤 했다. 처음에 아이가 사물들의 이름을 익히고 입에 올렸을 때 그 발음은 물론 정확하지 않았다. 특히 아이가 우유를 ‘아꼬’, 달을 ‘까’, 2를 ‘에재’, 4를 ‘하’, 10을 ‘떼’, 다섯을 ‘아꿍’, 이게 뭐야를 “오예?”, 끝났지를 ‘꼬와까찌’ 등으로 희한하게 발음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슈퍼에 아이를 데리고 갔을 때 내가 다른 것을 고르고 있는 동안 아이가 “아꼬! 아꼬!” 하고 외쳐서 주인이 “아꼬가 뭐야?”하고 어리둥절해했다.
--- p.127 「까끼또자 빠떼빠떼 사다모미」 중에서
엄마 집에 다들 모였다가 떠날 때, 왁자지껄했던 공기가 식기도 전에 홀로 남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고 운전해서 돌아올 때면, 차 안에서 나는 엄마 특유의 그 묵묵함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고, 엄마는 표현하지 않으셨다. 한 번도 표현하지 않으셨기에 우리 형제들 역시 그것을 채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가슴속에 지닌 채 밖으로, 엄마에게 내보이지 않았다.
--- p.165 「엄마의 집」 중에서
슈퍼는 작고 애써 단아하고, 선반마다 비슷한 과자 봉지들이 언제나 똑같은 포즈로 늘어서 있다. 그 앞 의자에 간혹 한두 사람 앉아 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대개 의자는 비어 있다. 나는 늘 별생각 없이 그 앞을 지나가곤 하였다. 그냥 아, 칠성 슈퍼구나 하면서. 그러다 어느 날 안 으로 들어선 적이 있다. 그리고 물었다. 언제까지 열어놓으시나요, 한 바퀴 돌고 오다 들를까 하여. 그런데 안 주인이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며 대답은 않고 부스스 물었다. 술 들라우?
--- p.172 「칠성 슈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