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순식간에 끝났다.
1위는 2번마 야호프레즈, 2위는 10번마 칼라하리, 3위는 6번마 보성제일.
4번을 단 차밍걸의 이름은, 경주 내내 한 번도 불리지 않았다.
경주에 자주 나서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는 말. 바로 차밍걸이다.
이 경주는 차밍걸의 98번째 경주였다. 8세인 차밍걸은 이날 경주에 나선 열한 마리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차밍걸은 열한 마리 중 7위 정도로 달리다가 결승 직선주로로 접어들면서 두 마리에게 추월당하며 아슬아슬하게 꼴찌를 면했다.
1위를 차지한 야호프레즈의 기록은 1분 23초 5.
10위 차밍걸은 1분 25초 4.
고작 1.9초 차이이지만, 경마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23쪽
못 뛰는 말은 우승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곧바로 퇴출되기 마련이고, 경마 팬들도 그런 말에게는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다. 하지만 차밍걸은 계속 지는데도 꾸준히 경주에 나왔다. 그것도 다른 말이 한 번 뛸 때 두 번을 뛰는 식이었다.
보통 경주마들은 세 살 때 데뷔해서 일곱 살 정도에 은퇴한다. 5년 동안 해마다 10~12번 정도 뛰어야 간신히 40~50경기 정도 출전한다. 그러니 차밍걸처럼 100번 넘게 경주를 뛰는 말은 좀처럼 나오기 어렵다.
2013년 12월 한 달 동안 모두 36마리가 은퇴했다. 평균 출전 회수는 16회를 조금 웃돌았고, 그나마 가장 많이 뛴 경주마가 44회였다. 심지어 경주마 능력검사에 합격하고도 진짜 경주에는 단 한 차례도 출전하지 못한 말도 있었다. 현역 경주마 중에도 50전 이상 출전한 말은 드물다.
그런데 1등 한번 못한 차밍걸이 어떻게 101전까지 달릴 수 있었을까? ―27쪽
차밍걸은 온갖 악조건을 딛고 무려 101경주나 출전하며 자신의 몫을 다했다. 다른 말들이 한 달에 한 번 뛸 때 차밍걸은 두 번씩 뛰었고, 1등 상금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상금도 벌어들였다. 또 열두 마리가 달릴 경우 10위 이내로 들어오면 주는 출전 장려금도 꾸준히 받았다. 남들보다 부지런히 일해서 생계를 꾸려가는 서민 같은 말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차밍걸을 지켜본 팬들은 ‘최다 연패 기록’이라는 점에만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101전 출전’이라는, 현역 경주마 중 어떤 말도 따라잡기 힘든 압도적인 출전 횟수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아니라 차밍걸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기록이라는 것이다.
타고난 능력은 부족하지만 다른 말보다 열심히 뛰는 말.
차밍걸이 그냥 똥말이 아니라 ‘위대한’ 똥말인 이유다. ―29쪽
60패에서 70패, 80패…….
차밍걸이 지면 질수록 차밍걸의 인기가 올라가고 차밍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차밍걸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늘어났고, “차밍걸 파이팅!”을 외치는 목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기지 못하는 말이 인기를 끄는 것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었다. 그들의 눈에 차밍걸은 ‘똥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밍걸은 자기 페이스대로 꾸준히 달렸다.
패가 거듭되면서 차밍걸에게는 ‘최다 연패 기록 경신’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최영주 조교사는 차밍걸이 점점 나이가 들고 우승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으니 은퇴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변영남 마주에게 권하기도 했었다. 조교사로서의 냉정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이제 차밍걸의 경주에 ‘우승’이 아닌 다른 의미가 부여되면서 그도 은퇴를 권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차밍걸의 사연은 어느새 입소문을 타고 인터넷을 통해서 퍼져나갔다. 차밍걸의 경주를 보기 위해 경마장을 찾
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차밍걸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매번 지지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리는 말. 그런 차밍걸에게서 많은 사람들이 뜻밖의 위안과 용기를 얻고 있었다. 경마를 도박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110쪽
미스터파크가 보여준 역주에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이 있었다.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아낌없이 자신을 불살랐던 미스터파크. 그러나 세상에는 영웅만 있는 게 아니다. 팬들이 차밍걸에 주목한 것은 그에게서 ‘위대한 보통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미스터파크는 체격이 좋다. 차밍걸은 왜소하다.
미스터파크가 열 걸음 달릴 때 차밍걸은 열한 걸음을 뛰어야 따라갈 수 있다.
미스터파크는 폐활량도 크다. 차밍걸은 미스터파크에 비하면 쉽게 지친다. 차밍걸을 향해 ‘넌 왜 미스터파크처럼 뛰지 못하느냐’고 일방적으로 질타할 수 없는 까닭이다. 차밍걸이 미스터파크에 비해 열심히 뛰지 않았다고 매도할 수 없는 이유이다.
대신 미스터파크가 6~8주에 한 번 경기에 나설 때, 차밍걸은 2주에 한 번씩 주로에 섰다. 능력이 뛰어난 미스터파크는 한 번에 거액의 상금을 움켜쥐었지만, 차밍걸은 자주 경주에 나서서 출전 장려금을 받아 제 밥값을 채웠다.
어떤 말이 1위로 들어오는지에만 관심 있던 사람들의 눈에, 어느 순간 차밍걸도 보이기 시작했다.
능력은 부족하지만 다른 말의 두 배로 꾸준히 뛰는 말.
체격도 작으면서 경주 끝까지 페이스를 잃지 않고 꼴찌만은 면하기 위해 끙끙대며 뛰는 말.
그러면서도 용케 다치지 않고 101번이나 달려낸 말.
그래서 끝끝내 살아남은 말.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는 말, 응원하게 되는 말, 차밍걸.
차밍걸처럼 타고난 조건이 훌륭하지도 않고 남들을 넘어서는 뛰어난 능력도 없는, 그래서 이 세상의 험난한 생존 경쟁 속에서 아무리 애써도 1등을 할 수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은 차밍걸의 역주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열렬히 응원하게 되었다.
차밍걸이 열심히 달린다면 나도 계속 달릴 수 있다고. ―142쪽
‘소리 없이 강한 그대 이름은 차밍걸’
‘모두가 응원합니다! 슈퍼스타 차밍걸!’
어느 날부턴가 차밍걸이 출전하는 날이면 예시장에 차밍걸을 응원하는 플래카드를 든 팬들이 눈에 띄었다. 예시장은 레이스를 앞둔 경주마들을 팬들에게 선보이는 장소다. 경마 팬들은 원형 무대를 도는 경주마의 모습과 걸음걸이를 지켜보면서 오늘은 어떤 말이 잘 달릴지 예상해본다. 자신이 좋아하는 말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응원하기도 한다.
‘똥말은 똥말일 뿐이니 이제 그만 퇴출시키’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그들은 소액이라도 베팅하면서 마음속으로 차밍걸을 응원했다. 물론 차밍걸이 당나루를 넘어 새로운 연패 기록을 달성해내기를 응원한 것은 아니다. 단 한 번이라도 우승해주기를, 그래서 연패 기록을 멈추기를, 타고난 조건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한 번쯤은 기적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내기를 바란 것이다. ―156쪽
혹독한 경쟁 사회는 1등만이 가치 있다고 엄포를 놓는다. 경마의 세계는 그런 경쟁의 극한이다. 오로지 1등만이 승리로 카운트되고, 2등부터는 가차 없이 패배로 기록된다. 차밍걸은 3등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지만 ‘101전 101패’가 공식 기록이다.
이착, 삼착, 사착, 오착쯤으로 밀려나면 인생이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차밍걸의 질주는 백 마디 말보다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1등이 아니어도 계속 달리는 것이 의미 있고, 그런 삶도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차밍걸은 101번의 경주를 통해 스스로 증명해냈다. 주어진 삶을 피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면하면, 당당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차밍걸은 보여주었다.
차밍걸이 기록한 101번의 경주는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 던진,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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