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르야가 답한 내용을 미리 컴퓨터에 옮겨 놓았었다. 스케줄러 메모장에 끼적인 것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알아보지 못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일상의 정보들로는 한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가 없다. 바닥에 흘린 크랜베리 소스나 고양이의 오줌을 닦을 때 ‘베텍스’ 티슈를 선호하는지, ‘빌레다’ 티슈를 선호하는지와 같은 정보가 그 사람에 대해 알게 해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래도 이 페이지는 보관할 필요가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은 주소와 전화번호가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살다 보니 인터넷이 유용할 때도 있구나. 내가 인터넷을 싫어하는 것은 단순히 나 자신이 멍청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들의 말마따나, ‘www’로 시작되는 인터넷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제껏 인류가 만들어낸 공간 가운데 이토록 작고 외로운 곳이 또 있을까.
--- p.27-28
그러다 마침내 그날, 빨간 코의 날이 찾아왔다. 내 코는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고, 아침부터 라디오에서는 시끄럽게 빨간 코의 날을 홍보하고 있었다. 어찌나 유난스럽게 홍보를 해대는지, 대체 빨간 코의 날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들어보니 빨간 코의 날은 광대 코 가면을 쓰고 일종의 선행을 하는 그런 날인 것 같았다. 나도 기꺼이 동참하고 싶었지만, 빨간 코의 날에 누구를 혹은 무엇을 도와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게 정보를 알아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무기력하고 무감각하게 이 정도의 정보에 만족하고 과거 기아의 날이었던 것이 이제 이 빨간 코의 날로 대체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요즘 사람들은 배고픔, 기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탐탁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긴 어떤 일이든 재미가 더해지지 않으면 안 되니 말이다.
--- p.208-209
마침내 그날이 왔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결정적인 그날이. 잘못된 날. 끔찍한 날. 하지만 그 전에 나는 몇 가지 재앙을 거쳐야했다.
다음 날 아침, 눈부신 햇살에 나는 잠에서 깼다. 이상하게도 코가 뜨거웠고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집에는 제자리에 있는 게 없었다. 손에 들었던 그릇들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의자는 넘어졌다. 걱정, 위기감, 두려움, 수치심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인한 근심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나면 즉각 수치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수치심이 떠나면 신문 기사로 인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경찰, 그리고 그 밖의 것들. 나는 도무지 집안에 있기가 힘들었다. 안락한 집이 나를 옥죄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바깥에서는 누군가가 나를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p.315
기적처럼 열쇠는 단번에 구멍에 들어갔고, 문이 열렸으며, 그다음 순간 나는 자동차에 앉아 있었고, 문을 닫았고, 곧장 문을 잠갔다. 30초 간 이어졌던 이 기적 같은 시간 동안 자동차 잠금 단추를 눌러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진전된 덕분이었다. 그와 동시에 얼굴이 새빨개진 해틸래 부인이 전면 유리 앞에 섰다. 그녀는 무언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제대로 쳐다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나는 핸드 브레이크를 비롯한 다른 장애물들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운전석 쪽으로 기어갔고, 덜덜 떨며 차 키를 꽂았다.
인간의 정신세계란 참 오묘하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쓸데없는 것들을 떠올리게 하니 말이다. 시동을 켜는 순간에도, 나는 잠깐, 매우 놀라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훗날 누군가에게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상대의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지금이 딱 적당한 순간이 아닐까, 하는. ‘맞혀 봐. 시동이 켜졌게, 안 켜졌게?’ 뭐 이렇게 말이다.
--- p.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