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의 수도에 당도해서는 큰 사찰에 숙소를 정했다. 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동산도(東山道)를 공략하러 나가고 수도에 없었다. 두어 달이 지나서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돌아왔다. 그는 돌아와서도 궁실을 수리한다는 핑계를 대고 우리 쪽의 국서를 즉시 받지 않았다. 이래저래 숙소에 묵은 지 5개월 만에야 비로소 왕명을 전달할 수가 있었다. 그 나라에선 천황을 모시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하 모두가 천황 앞에서는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 나라에서는 ‘왕’이라 하지 않고 ‘관백’이라고만 일컬었으며, ‘박륙후’라고도 했다. ‘관백’이란 “모든 정사를 먼저 광에게 보고한 뒤에야 천자에게 아뢴다”는 『한서(漢書)』 ‘곽광전?光傳’의 말에서 따와 호칭으로 삼은 것이다.
우리 사신을 영접할 때에 그는 사신들이 가마를 탄 채로 궁궐에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래서 피리며 날라리를 앞세우고 들어가서 당(堂)에 올라가 예를 차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낯빛이 새까만 게 보통 사람과 다른 특이한 데는 없으나, 눈빛만은 번쩍번쩍하여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쏘는 듯했다고 한다. 우리 사신들을 영접할 때 그는 사모(紗帽)를 쓰고 검정 도포를 입고 삼중석(三重席)을 깔고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다. 신하 두엇이 자리에 있다가 우리 사신들을 인도하여 좌석에 앉게 했다. 연회에 필요한 그릇이나 물건은 차려 놓지 않고, 그저 앞에다 탁자 한 개를 놓고 그 한가운데에 떡 한 그릇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질 중발로 술을 돌렸는데, 술도 탁주였다 그 예라는 것이 몹시 간단하여, 두어 차례 술을 돌리고는 그만이었다. 배(拜)하고 읍(揖)하고 잔을 주고받는 따위의 절차도 없었다.
--- p.23~24
김성일은 처음 우병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가는 도중 상주에 이르러 왜적이 이미 침범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낮없이 본영을 향해 달려갔다. 도중에 전임자 조대곤을 만나 인장(印章)과 부절을 바꾸었다. 당시 적은 이미 김해를 함락하고 군대를 나누어 우도(右道)의 고을들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김성일은 계속 나아가다가 왜적과 맞닥뜨렸다. 아군의 장수와 군사들이 도망치려 하자, 김성일은 말에서 내려 걸상에 버티고 앉아 군관 이종인을 불러 말했다.
“너는 용사다. 적을 보고서 먼저 물러설 수는 없다.”
그때 적군 하나가 금가면을 쓰고 칼을 휘두르며 돌진해 왔다. 이종인이 말을 달려 나가며 활을 쏘아 단번에 죽여 버렸다. 그러자 나머지 왜적들은 달아나고 감히 더 전진해 오지 못 했다. 김성일은 흩어졌던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적을 견제할 계책을 세웠다. 그런 참에 임금께서는 김성일이 전에 일본 통신사로 갔다 와서 왜적이 쉬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인심을 해이케 하고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하여 의금부 도사를 파견하여 체포해 오게 한 것이다.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경상감사 김수가 김성일이 체포되어 서울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길에 나가 작별했다. 김성일의 말투는 몹시 흥분돼 있었으나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북받쳐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김수에게 힘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라고만 신신당부했다. 그걸 보고 늙은 아전 하자용이 감탄하며 말했다.
“자기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나라만을 걱정하시니 참으로 충신이다.”
--- p.50~51
낮에 초현참에 이르렀다. 조인득이 미리 와서 길에 장막을 치고 맞이했다. 조정 신료들은 그제야 비로소 음식을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저녁에 행차는 개성에 머물렀다. 임금께서는 남문 밖 공서상통에 드셨다 대간들이 글을 올려 수상(영의정)이 당파를 만들어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탄핵하고 파직을 주장했다. 임금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2일에도 대간들이 계속하여 수상의 파직을 요청하여 결국 수상이 파직되고, 내가 수상으로 오르게 되었다. 최흥원이 좌상(좌의정)이 되고, 윤두수가 우상(우의정)이 되었으며 함경북도 병사 신할은 해임되었다. 이날 낮에 임금께서 개성의 남성 문루에 거동하시어 백성을 타이르시며 각자 생각을 말해 보라고 하셨다. 그러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서 엎드렸다.
“할 말이 무엇이냐?”
“바라옵건대 정 정승(정철)을 불러들이십시오.”
정철은 당시 강계에 귀양을 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임금께서는 알았노라고 하시고 즉시 정철을 소환하여 행재소로 오게 하라고 명하셨다.
저녁때 행궁으로 돌아오시고, 나는 죄로 수상직에서 파면되었다 유홍이 우의정이 되고, 최훙원과 윤두수가 차례대로 승진하여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이 되었다. 왜적이 아직 서울까지는 오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가 서울을 버린 것이 실수였었다고 나무랐다. 결국 승지 신잡에게 도로 서울에 들어가 형세를 살펴 오게 했다
--- p.74~75
6월 11일, 임금께서는 평양을 나와 영변으로 향했다. 대신 최흥원·유홍·정철 등이 따랐다. 좌의정 윤두수는 원수 김명원, 순찰사 이원익과 함께 평양에 남아서 지키기로 했다. 나 역시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평양에 남았다. 이날 왜적이 성을 공격했다. 좌의정과 원수와 순찰사와 나는 연광정에 있고, 평안 감사 송언신은 대동성의 문루를 지키고, 병사 이윤덕은 부벽루 상류의 강 여울목을 지키고, 자산 군수 윤유후 등은 평양성의 동문인 장경문을 지켰다. 성안에는 군사와 백성을 합쳐 모두 3, 4천 명이 있었는데, 성첩을 나누어 지키게 했다.
그러나 군사 배치가 들쑥날쑥하여 고르지 못했다. 어떤 곳은 사람 위에 사람이 겹쳐 어깨와 등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빽빽한가 하면, 두어 성첩을 연달아 한 사람도 배치되지 않은 곳이 있었다. 을밀대 근처 소나무 숲에는 여기저기 옷을 흩어 걸어서 마치 군사들이 매복해 있는 양 꾸며 놓았다. ‘의병’이라는 것이다.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 적군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동대원 강기슭에 한 줄로 죽 벌려 서서 진을 이루고 있었는데, 붉은색·흰색 깃발을 늘어 세운 것이 마치 만장 같았다.
왜적의 기병 10여 명이 강물로 뛰어들어 양각도 쪽으로 향하는데 물이 말의 배까지 찼다. 이들은 금방 강을 건너기라도 할 것 같은 태세로 모두 말고삐를 잡고 늘어섰다. 그 나머지는 한두 명 혹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강가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그들이 둘러멘 큰 칼이 내리쪼이는 햇빛을 반사하여 번쩍번쩍 번개 같은 빛을 뿜었다.
“저건 진짜 칼이 아니야. 나무칼에 백랍을 입혀서 눈속임하는 거야.”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으나 멀어서 분간할 수 없었다. 또 적병 예닐곱 명이 강변에 나와서 성을 향해 조총을 쏘는데, 소리가 매우 컸다. 탄환은 강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왔다. 멀리 날아온 탄환이 대동관까지 들어와 기와 위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 거리가 몇천 보나 되는데 어떤 것은 성루의 기둥에 맞아 두어 치 정도로 깊이 박히기도 했다.
--- p.102~103
이튿날 아침 진군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고 보통문과 칠성문을 공격했다. 적군은 성 위에 올라가 홍기(紅旗)와 백기(白旗)를 늘어세우고 대항하고, 명나라 군사는 대포와 화전으로 공격했다. 대포 소리는 지축을 울리며 수십 리나 퍼져 나가 산악마저 들썩이는 듯했고, 불화살은 공중에서 베를 짜듯이 퍼져 날았으며, 연기는 하늘을 가렸다. 불화살이 성안으로 날아 들어가 곳곳에 불을 일으켜 숲도 다 타버렸다
낙상지와 오유충 등이 자기들의 부하를 거느리고 개미 떼처럼 성벽에 붙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앞서 오르던 자가 떨어져도 뒤따르던 자는 계속 기어오르며 물러서는 자가 없었다. 왜적은 성첩에 고슴도치의 털처럼 칼과 창을 빽빽이 드리우고 대항했으나, 명나라 군사는 더욱 거세게 공격했다. 왜적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내성(內城)으로 몰려 들어갔다. 창칼에 무찔리거나 불에 타서 죽은 적이 부지기수였다.
명나라 군사는 성안으로 들어가 내성을 공격했다. 적은 성 위에 흙벽을 쌓고 벌집처럼 무수한 구멍을 뚫어 놓고는 그 구멍을 통해 조총을 쏘아 댔다. 명나라 군 사상자가 늘어났다. 그래서 제독은 궁지에 몰린 왜적이 죽기로 작정하고 대항해 올 것을 염려하여 군사들을 일단 성 밖으로 후퇴시켜 적에게 달아날 길을 열어 주었다 그날 밤에 적은 과연 얼음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 후퇴했다. 이보다 앞서 나는 안주에 있으면서 명나라 대군이 곧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김경로에게 왜적이 달아날 길목을 지켰다가 공격하도록 은밀히 알려 주며, 다음과 같이 깨우쳐 주었다.
“그대들 두 부대는 길 옆에 숨어서 적군이 다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뒤를 추격하라. 적군은 주리고 피곤한 채로 달아나는 길이라 싸울 마음도 없을 테니 다 잡아 묶을 수가 있을 것이다.”
--- p.164~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