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을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소설이라고 본 데에는 그것이 그만큼 서구적이라는 뜻을 내포하기도 하였다. 이런 견해는 자칫 우리 소설이 『무정』을 기점으로 과거소설의 전통을 단절하고 따로 서구식 소설 양식과 사고를 들여왔다는 착각을 빚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우리는 우리의 소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을 우리는 시대와 성격에 따라 고소설 또는 신소설이라고 불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정』을 이러한 전대소설(前代小說) 과의 관련 아래 검토해 본다는 생각보다는 막연하나마 서구식 소설로서의 현대성을 규명하기에 골몰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현상은 신소설 연구에서도 해당되는 문제였다. 신소설의 그 새로움(新)이 고소설과는 달리 따로 서구소설이나 일본소설로부터 이입된 것이라는 견해가 관심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의 관심은 우리나라 소설 쪽으로 쏠렸고, 그 결과 신소설은 전대소설로부터의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계승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신소설도 고소설과 마찬가지로 사건소설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대소설의 전통을 시대적 요청에 맞도록 개조했고 또한 그것과는 다른 가치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고소설이나 신소설의 구조가 사건소설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서구의 전대소설, 즉 로망스 또는 행동소설의 구조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이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우리나라 소설연구에 미친 영향은 컸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구소설의 독특한 양식에 대한 지금까지의 기대를 불식시키고 우리나라 소설을 서사문학의 전통이라는 대전제 아래 검토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리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 p.16~17
영웅의 이상을 초극하고, 인간을 개인의 입장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인간의 리얼리티(reality)가 제시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굉장한 변화였다. 선과 악을 각각 분리시켜 설정하지 않고 그것들이 하나의 인물한테 공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운명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사회적 결정론을 의식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선할 것도 악할 것도 없이 다만 그를 지배하는 환경이 불리하면 악해질 수도 있지만 환경이 호전되면 곧 선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인간의 선ㆍ악이 아니라 그를 지배하는 환경이라는 자각을 한 것이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른 개인의 반응,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고정적이 아니라는 말이며 가변적이라는 점에서 복잡한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나 사회를 고정된 어느 일면에서만 바라보려 하지 않고, 가변적이고도 복합적인 성격체로 파악할 수 있었던 점이야말로 문학의 리얼리티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이 영웅적 인물의 소멸임은 말할 것도 없다. 도덕적 가치 기준에서 옹호받아야 할 선을 하나의 전형으로 설정하고 있는 인물은 영웅적일 수밖에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좋은 가정에서 탁월한 용모와 재능을 갖춘 인물로 형성된다. 과거를 보면 장원급제를 할 터이고, 당대에 가장 좋은 배필을 만나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 터이다. 일시적으로 불행한 위기에 처하지만 곧 극복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승리는 행복한 생애를 보장한다. 운명론이 지배하던 시대가 만든 영웅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개인과 상황과의 관계 그 자체를 중시하던 시대는 이미 영웅의 예정조화적 운명론에 깊은 회의와 반성을 갖는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 시민사회의 형성과 함께 출현한 개인의 확립이란 이렇다. 그들은 일단 집단의 우상을 거부하고 그 대신 개인의 이상과 신념을 내세운다.
그러나 결과는 비극적이다. 거대한 산업사회 구조 안에서의 보이지 않는 힘이 다시 그들 앞에 운명처럼 군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워낙 크고 복잡해서 개인의 신념과 이상을 위협하는 힘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를 파악하기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드러난 현상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구조의 유기적 원리를 해명하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자연현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거대한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자연에 대하여 부단히 도전하고 극복함으로써 개인의 이상과 신념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데, 그 점에서 또한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 마침내 현대의 비극적 인간이 탄생되는 것이다.
--- p.55~57
김동인의 확고한 신념과 원칙에 비하면 전영택은 훨씬 소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실지로 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의도 또한 동인과는 대조적이다. 리얼리티의 확립이라는 점에서 자연주의 소설의 하강적 구조를 채택한 그들의 소설이 패배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공통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동인 소설의 죽음이 개인의 입장을 왜소하게 축소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외부 환경의 가혹한 힘을 의식하도록 하는 반면, 전영택의 죽음은 외부의 힘에 의하여 죽어가는 것들을 오히려 미화시켜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영택을 김동인의 자연주의와는 달리 인간의 죽음을 신비롭게 지켜본 작가로만 이해하려는 경우도 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리얼(real)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에서는 그 연원이 같은 것이다.
「혜선의 사(死)」를 ‘시대가 낳은 불쌍한 여성의 가련한 죽음’이라고 말했을 때 김동인이 의도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불쌍한 여성의 가련한 죽음을 낳은 ‘시대’에 착안되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예측과는 달리 이 소설은 ‘죽음’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또 김동인과 대조적이다. 혜선은 아직 구시대의 사고 안에 갇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신식 학교에 다니는 신여성이지만 그녀는 이미 구식 결혼을 했다. 그녀 자신의 자의가 아니겠지만, 여기서는 그 점에 대한 갈등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남편한테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아직 구도덕의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선의 옹호를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점은 강엘리자벳드의 패배적인 삶과 유사한 일면을 보이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개인의 감정을 옹호한다. 김동인 소설의 죽음은 어느 정도 이와 같은 개인의 감정 옹호가 한계에 부딪힐 때 생기는 자각증세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혜선의 죽음은 도피와 위안의 성격을 띤다. 외부 상황에 대하여 개인의 극복의지를 개진하지 못하고 도덕적 선의 옹호를 기대할 때, 이미 상관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다만 신비와 호기심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무슨 ‘비극적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 죽음을 관심 있게 다룬다고 말하는데,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도 이 시기의 리얼(real)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심을 항상 저버리지는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 p.101~102
염상섭의 소설이 아직 끝나지 않은 데에서 ‘끝’ 자를 붙였다고 말한 데에는, 그런 지적을 하는 김동인의 소설구조론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김동인은 하나의 독립된 허구의 세계를 믿었다. 그리고 그 안에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기를 바랐다. 이런 소설일수록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팽팽한 긴장이 요구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런 긴장은 스토리를 끌어가기 위한 장치일 뿐, 그것 자체가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는 드물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결말에나 가야 알 수 있다. 김동인이 이런 소설의 구조를 믿을 때 염상섭의 소설에 낯설었을 것은 당연하다.
염상섭은 김동인이 믿는 허구의 세계를 손수 무너뜨렸다. 그 결과, 그의 소설은 독자 앞에 던져진 하나의 독립된 세계가 아니라, 이미 독자에게 설정된 세계 속으로 들어가 독자들과 그 속을 함께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때 서로 대립되는 인물을 설정할 필요는 없어졌다. 독자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경험하는 모든 환경적 요소들이 이미 그 안에서 팽팽한 긴장과 대립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는 처음부터 그 결말에 최종 목표를 두지 않는다. 결말이 아니라 과정을 걸어가는 동안, 그는 어느덧 보고 느낀 것, 말해야 할 것을 모두 그 안에 제시하는 것이다. 김윤식이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이해하는 기본항으로서 시간의 문제를 설정한 것도 이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소설이 자아와 세계의 균열로 특정지어질 때, 이념과 현실 간의 최대의 불일치는 시간’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 시간이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여로란 말로 대치될 때, 이 소설의 의미는 여행 과정에 따른 시간 속의 모든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소설적 달성의 근거가 바로 형식과 시간의 병치관계에 있고 병치관계로 인해 형상화가 가능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면세계가 시로 응고되든가 아니면 객관세계와 단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수법은 김동인 등의 소설과는 방법을 달리한 것인데, 그것은 극적인 결말로 단편소설의 묘미를 살린다든가 하는 수법을 일단 무시한 셈이다. 김동인은 처음부터 화자의 전단적인 설명에 의하여 사건을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는 작가의 설명에 따라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상관관계를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상섭은 사건을 풀어나간다기보다 오히려 독자들로 하여금 미궁에 빠져들도록 한다.
--- p.247~249
「날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天才)’를 아시오?
그것은 짧지만 매력적일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데, 뜯어보면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박제’와 ‘천재’란 단어의 절묘한 대조를 들 수 있다. 박제와 천재는 같은 발음으로 끝나면서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다. 박제가 만일 속이 텅 빈 모형에 불과한 것이라면, 천재는 그 반대로 속이 꽉 찬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상반된 단어들을 배합시켜 반어적인 효과를 거둘 때 그것은 동음이의어의 말재주(Pun)가 된다.
이때 우리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태도까지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지금 박제처럼 머리가 텅 빈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자기가 천재라는 걸 은근히 과시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게 말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까지 마치 자기 심중을 꿰뚫은 말처럼 실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천재와 박제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내재해 있음직한 바램이자 또한 두려움으로서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천재이고 싶지만 천재가 아니라는 비애와, 천재가 아니지만 천재이고 싶은 욕망의 대결 속에 살고 있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 그것은 소설가 이상의 물음이 아니라 곧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자신의 물음이다. 자기 심중을 꿰뚫는 듯한 그 말이 실감나서 사람들은 감탄하는 것이지, 이상의 천재성 때문에 감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에 이어지는 다음 기분을 그는 ‘유쾌하다’고 표현하는데 이것도 주목할 만하다.
나는 유쾌(愉快)하오. 이런 때 연애(戀愛)까지가 유쾌(愉快)하오.
여기서 우리는 「날개」의 역설적인 수사법을 보게 된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는 논리적으로 볼 때 슬픈 일이거나 불쾌한 일일 수 있다. 그런데 이 글은 ‘유쾌하다’ 말하고 있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다’ 말하고 있다. 이건 일반 논리에 어긋난 표현이다. 연애란 어차피 유쾌한 행사다. 그래서 ‘--까지가’ 유쾌하다고 말하려면 연애보다 훨씬 유쾌하지 못한 사건이 제시되어야 논리적으로 맞는 문장이 될 것이다. 가령, ‘이런 때 이별까지가 유쾌하다’고 한다면 오히려 맞을지 모른다.
--- p.432~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