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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나를 벗어나

고래가 나를 벗어나

상상인 시선-04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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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38쪽 | 204g | 128*205*10mm
ISBN13 9791193093382
ISBN10 1193093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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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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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폭포처럼 쏟아지는 모래, 레몬 시폰 속으로, 그 환幻 속으로 쓸려 들어가 파묻혀야 잠에 빠져들 수 있다 레몬 시폰은 무게가 없고 향기가 없고 자세히 바라보면 색깔도 점점 희미해져 사라지고 있다

눈을 뜰 수 없었던 사막폭풍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적 있다 폭풍이 지나가길, 길이 다시 드러나길 기다린 적 있다 나는 환幻 속을 거닐 만큼 어리석거나 얇은 여자는 아니다 모래폭풍은 살아 있는 오늘처럼 한 가지 색깔로 몰아치고 있다 생애는 뭔가를 내놓아야 할 때가 찾아오고 만다 온몸에 힘을 주고 그 존재에 화인火印으로 지지듯 나를 인식시켜야 할 때가 찾아오고 만다

소유주를 위한 제사, 제祭를 마치면 모래폭풍이 가라앉고 카키가 빛을 머금고 허공에 떠 있다 그때 비로소 잠은 나를 거두어 준다 잠 속에서 카키에서 레몬 시폰으로 나의 색깔이 사막 본래의 건조한 영토를 넓혀가고 있고 나를 봉헌하듯 배꼽 위에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색깔엔 본래 주인이 없다

* 헥스표 #FFFACD, 투명에 가까운 연한 노란색.
---「레몬 시폰」중에서

오르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화물차, 과적된 바디 백, 차가 뒤로 밀리는 순간 터져버린 지뢰, 그가 떠올랐다 전쟁이 끝난 줄 알고 꽃처럼 피어난 그 사람, 짧은 봄의 폭발음에 갇혀 그는 공중에 자욱하게 흩어져 있다 그해는 봄비치고 너무 많이 쏟아졌다 난초의 꽃대처럼 꼿꼿한 도시가 휘어질 만큼, 모든 도시의 창문들이 포연에 흐려지고 있다 폭음에 예민하지 않은 도시는 없다
---「관음증」중에서

눈에서 몰려 나간 빛 때문인지 사진에서 떠나간 바람 때문인지 바깥을 잠근 채 혼자를 견딘 꽃이 피어나고 있다 피자마자 흩날리는 바람에게 밀려 까라지고 있다 꽃을 보면서 그가 원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생각하였다 크레파스처럼 출렁거리는 밤의 강을 보면서 그를 위해 어떤 색깔이라도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리는 꽃잎의 궤도에서 눈을 떼고 밤하늘을 본다 별은 빛나고 있다 블루에서 다크 레드, 시간에 파리하게 질린 검은 은화의 색깔인 별도 있다

다시 꽃을 바라본다 마구 피어나던 내 속의 여자가 꽃으로 빠져나가 밤하늘에 나부끼고 있다 달빛과 고스트 화이트*가 밤하늘을 적시는 그 잠깐 동안 내 속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여자가 들락거렸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를 이 봄은 어디까지 몰고 갈 것인지, 봄밤은 언제쯤 내게 색깔을 돌려줄 것인지, 밤은 허황되고 어두운 블루만 되쏠 뿐 말이 없다

* 헥스표 #F8F8FF, 드러나지 않는 흰색.
---「검은 은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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