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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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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2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552쪽 | 794g | 152*224*26mm
ISBN13 9791156122692
ISBN10 1156122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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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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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은 어릴 때 고향 통천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거처를 따라 옮겨 다녔다. 조선인 대상의 소학교인 보통학교는 신의주에서 입학했다. 그 후 군산 공립보통학교(1925년 여름에 전학), 군산 공립중학교(1930년 입학)를 거쳐 193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 p.51

예과 시절 김수경은 친구들과 함께 사회과학서적 독서 모임을 이끌었다. 구제 고등학교와 제대 예과의 ‘마르크스 보이’ 문화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 p.56

1937년 4월 김수경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했다. …… 법문학부에서 김수경이 선택한 것은 철학과이다. …… 경성제대에서 언어학을 가르쳤던 고바야시 히데오는 “김 군은 [예과] 3학년 말에 학부 연구실로 나를 찾아와 언어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공교롭게도 성대[경성제대의 약칭]의 법문학부에는 언어학 강좌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 나는 철학과를 추천했다.”
--- p.58

예과 시절의 일로 김수경 등 10여 명이 조선어학회 사무실에 가서 새로 정해진 한글맞춤법을 리극로에게 배웠다는 취재기사가 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을 대표하는 작가였던 림화와 동기생 신구현의 권유로 조선의 문헌을 정리한 모리스 쿠랑의 대저 《조선 서지》의 번역에 착수한 것은 1939년 가을의 일이었다
--- p.63

경성제대를 졸업한 후 1940년 4월 30일 자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대학원에 입학 …… 이런 시기에 김수경은 〈조선어의 비교언어학적 연구〉를 연구과제로 하여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다
--- p.64

1944년 3월 15일 자로 ‘일신상의 이유’로 자퇴를 하고, 4월 15일 자로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어학 연구실의 촉탁이 되었다. …… “김수경은 학도 동원을 피하기 위해 경성제대 조선어 및 조선문학 강좌의 무급 조수를 했다.”
--- p.69

김수경은 조선 해방의 날(만 27세)까지 인도유럽어족의 고전어(그리스어, 라틴어, 산스크리트) 및 인도유럽어족(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덴마크어), 그리고 동아시아의 고전어인 한문과 여러 언어(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를 습득한 셈이다. 이 유례없는 어학 능력은 폭넓은 김수경 언어학을 담보했다고 할 수 있다
--- p.75

김수경이 …… 서울에서 1945년에 인쇄한 《〈로걸대〉 제 판본의 재음미》는, 해방 전에 나온 김수경의 유일한 언어학 저작 …… 김수경은 우선 규장각 장서에서 모두 33점에 이르는 《노걸대》 판본을 찾아냈다
--- p.94

김수경은 1946년 8월에 월북했다. 이 때문에 그가 해방 후 남한에 남긴 업적은, 쿠랑의 번역서인 《조선문화사서설》과 번역 논문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구성〉을 제외하면, 《진단학보》에 게재된 논문 〈《룡비어천가》 삽입자음고〉 한 편뿐이다
--- p.97

김수경에 따르면, …… 문자의 발명에 앞서, 중국어와 대조함으로써 조선어의 음운 체계를 해명한 것이야말로 훈민정음의 획기성이라고 김수경은 평가한 것이다
--- p.111

미군정에 의해 자치를 부정당한 끝에, 김수경은 결국 1945년 11월 30일 자로 경성대학의 촉탁과 자치위원회 위원을 사임하게 되었다. 대학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김수경은 해방 직후부터 진단학회에 관여하고 있었다
--- p.120

경성대학을 사직한 김수경은 1945년 12월 1일 자로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치게 되었다. …… 이 학교 외에 김수경은 1946년 봄부터는 경성대학 법문학부 강사를 겸임했으며, 경성대학 예과와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 부설 임시중등교원양성소에서 조선어학개론을 강의했다
--- p.126

김수경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한 것은 1946년 5월 6일이었는데 …… 박시형과 김석형이 대학 위촉 의사를 전했고, 조금 늦게 찾아온 신구현이 김일성 명의의 위촉장을 가지고 온 …… 경성제대 동기의 우정과 정치적 신념으로 맺어진 친밀한 인적 네트워크가 김수경의 월북을 촉진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김수경은 김석형?박시형과 셋이서 “8월 17일 밤 반바지에 등산모 차림으로 몰래 38선을 넘어 입북”했다
--- p.131

김수경은 1946년 8월 20일 자로 김일성대학 문학부 교원으로 임명되었다. 곧이어 9월 15일에 개교식이 열리고 10월에는 개강했다
--- p.133

교원이 부족하였던 만큼 …… 나는 《조선어학사》, 《언어학개론》, 《방언학》, 《조선어문법》 등의 과목을 조선어학과 학생들이 진급해 올라가는 데 따라 차례로 강의해야 했으며 다른 학부에 나가서는 영어, 라틴어 등도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135

논문이 4편, 소련의 언어학 문헌 번역이 단행본 1권과 논문 6편, 그리고 공저로 《조선어 문법》을 출판했다. …… 이남재의 기억에 따르면, 김수경은 집필용 책상 옆 벽에 언어학자 주시경의 사진을 걸어 놓고“인생의 목표는 조선어라는 기계의 작지만 필요한 나사 하나가 되는것”이라며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 p.138

‘한자 한 글자’=‘조선어 일 음절’=‘사각형의 한글 한 글자’라는 원칙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선어의 문자체계가 사각형이 된 것은 역사적 경위의 산물이지, 그러한 필연성이 언어 자체에 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낡은’ 것에서 탈피하여 ‘과학적’인 것을 지향하는 언어학자일수록 풀어쓰기는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 p.158

1948년 1월에 공표된 ‘조선어 신철자법’에는 많은 특징이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통일안’과 달라진 부분은 ① 두음법칙의 폐기, ② 절음부(‘분리부’라고도 불리는데, 나중에 ‘사이표’라고 불리게 되는 부호)의 도입, ③새로운 6개의 문자요소(신6자모) 도입이라는 세 가지였다. …… 모두에 김수경이 깊숙이 관여하여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했다
--- p.165

1949년 말에 간행된 조선어문연구회의 《조선어문법》은 북한에서 최초로 공간된 규범 문법서이다. 정서법뿐만 아니라, 이 책의 편찬에도 김수경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 p.189

김일성대 교수들은 이남의 ‘해방지구’에서 정치강습 등 조선로동당의 사업에 종사하기 위해 8월 9일 남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평양을 출발할 때에는 “전쟁이 오래 끌 것으로 예견되지 않았”다
--- p.220

정전 합의 40주년을 기념하여 평양에서는 전국로병대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김수경도 이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때 주변의 권유로 한국전쟁 수기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1993년 8월 15일부터 쓰기 시작하여, 1994년 11월 20일에 정서를 완료했다. 제목은 ‘배낭 속의 수첩을 펼치며’였다
--- p.224

1996년 7월에 토론토에 거주하는 장남 김태정이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아버지와 재회했다. 그때 김태정은 이 수기를 건네받았다
--- p.224

김수경 등은 야간에 전차와 전차 사이를 뚫고 지나가거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 경부선 철로를 달려 가로지르거나, 식량도 없이 가파른 문경새재를 오르내리거나, 외나무다리에서 강물로 추락할 뻔하기도 하면서 서서히 북상했다
--- p.241

1950년 10월, 김일성대 교원 가족들은 일제히 북쪽으로 피란하기 시작했다. 유엔군 낙하산 부대가 투입되는 가운데,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고 판단한 이남재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10월 20일경 남편을 찾아서 서울로 향했던 것이다
--- p.252

1951년 11월 대학 운영이 1년 반 만에 재개되었으나, 구성군에서는 한 곳에 캠퍼스를 집중할 수 없어서 반경 8킬로미터에 걸친 7개 리에 분산 배치되었다. …… 눈보라 휘몰아치는 구성의 산골에서 낮 동안 나무하러 갔다온 피로도 풀 새 없이, 깜박거리는 카바이드 등잔불의 두리에 앉아 과정안, 교수 요강을 다시 짜고, 교재, 교과서를 집필하며 전공 리론서적을 륜독하기에 밤가는줄 모르던 전시하 대학생활의 나날을 결코 나는 잊을 수 없다
--- p.262

김수경은 1953년경 김정순과 재혼했다. …… 공적인 신용이 필요한 과학 사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가족을 새로 구성할 필요가 있었고, 주위의 권유도 있어 재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p.279

교육성의 비준을 받아 2권으로 나뉘어 간행된 교과서 《조선어 문법》은 …… 1954년 11월에 제1~2학년용만으로 24만 5,000부가 인쇄되었는데, 이로써 김수경 언어학은 광범위하게 공적으로 교육되게 되었다
--- p.293

명사 등 체언의 뒤에 붙는 조사도, 동사?형용사 등 용언의 어간 뒤에 붙는 활용어미도, 함께 아울러 ‘토’라고 불렀다. …… 《조선어 문법》에서 김수경은 …… ‘토’만을 다른 모든 품사와 구별하여 ‘보조적 품사’로 특별히 자리매김했다
--- p.297

언어학계에서 김두봉과 김수경에 대한 비판이 조직적으로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것은 김두봉에 대한 공개 비판을 거친 뒤인 1958년 1월 17~18일에 개최된 학술토론회에서였다
--- p.338

김두봉에 대해서는 존칭 없이 치명적인 비판을 쏟아 낸 것과 대조적으로, 김수경은 어디까지나 그를 “추종”한“동무”로 비판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비겁하고 공명주의와 출세주의에 사로잡히”었다거나 “성실치 못하”다는 등 개인의 자질을 의문시하는 거친 표현들이 사용되긴 했지만, 정치적인 비판까지는 가해지지 않았다. 실제로 …… 김수경은 연구자로서의 생명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 p.342

1964년 1월 3일 김일성은 …… 불필요한 한자어, 외래어 등을 정리하여 조선어의 고유어화를 추진할 것, 이른바 ‘말 다듬기’를 중요 과제로 제시했던 것이다. ‘주체의 확립’이라는 큰 방침과도 관련된 ‘교시’였다
--- p.347

1950년대에 김수경이 제기한 문제는, 다양한 논의를 거쳐 1960년대 김대계의 문법서에 반영되었고, 그것이 이후 북한 문법론의 틀을 만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주체’ 확립에 대한 논의도 어우러지면서, 조선어의 교착어적 요소들을 자리매김하는 것이 독자적인 방법으로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인도유럽어족 언어들의 문법 개념을 ‘교조주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중심에 놓고 문법서의 편성도 조선어의 특성에 맞춘 ‘주체’적인 것이 되었다
--- p.377

김수경이 1960년대에 새롭게 씨름한 영역은 조선어 문체론이다. …… 그것은 북한 최초의 문체론에 관한 저작 《조선어 문체론》으로 체계화되었다
--- p.378

지나친 띄어쓰기를 완화하고 부호(사이표)를 없앰으로써 남북 간 언어 규범의 차이는 약간 옅어지게 되었다. 더구나 그것은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견고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형태주의라는 원칙 자체는 유지하면서도, ‘54년 철자법’에 남아 있던 김두봉적인 요소, 다시 말해 장래의 풀어쓰기를 염두에 두고 도입했던 정서법의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 p.395

1958년에 김수경이 비판받을 때, 김두봉을 ‘추종’했다는 이유 외에 유일하게 김수경에게만 향해졌던 비판이 바로 이 형태론에서 외국 문헌을 적극적으로 참조한 것이었다. 교조주의적이다, 창조성이 없다, 말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의 비난이 김수경에게 퍼부어졌다
--- p.402

1988년 이후 주로 조선어사와 관련된 연구로 학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월북 후에는 거의 현대 조선어의 연구에 전념했던 것을 고려하면, 예전의 관심 주제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p.409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이었다. …… 이남재의 가족은 …… ‘육모정’이라 불리는 별장에서 살게 되었다. ……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 ‘빨갱이 동생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도록 마을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고 한다. 거기에서 한동안 피란민용 배급물자에 의존하며 생활했다
--- p.420

딸이 해외로 이민을 갈지도 모르는 시점이 되자, 이남재는 남편의 존재 여부를 애매하게 하여 자녀의 출국허가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마침내 ‘정리’하기로 결단했다
--- p.424

1986년 1월 15일 자로 “남재에게”라는 수신자 이름으로 시작되는 김수경의 4장짜리 편지는, 아내를 “당신”이라 부르며 전체가 경어체로 씌어 있어, 이남재에 대한 경의와 미안함과 이해해 달라는 뜻으로 가득 차 있다. …… 남북이 통일되기 전에는 당신과 아이들의 소식을 알 길이 없으리라 단념하다싶이 하던 차에 이렇게 편지를 받으니 커다란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는 가운데 오래동안 망연할 뿐이였습니다
--- p.430

1988년 5월 사회과학원이 주재하여 평양에서 개최한 〈조선관계 전문학자들의 국제과학토론회〉였다. …… 13개 나라에서 온 165명의 학자 선생들과 10명의 재일본 조선 사회과학자들”이 참가하여 대대적으로 개최된 국제학회였다. …… 북한에서 김수경을 포함한 5명의 ‘의장’이 선출되었다
--- p.441

1988년의 학계 복귀로부터 1994년의 마지막 학술 논문에 이르기까지 김수경의 관심은 1945년 이전에 심층적으로 조사했던 주제, 즉 《노걸대》를 비롯한 14~19세기 조선의 어학서에 집중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집필을 진행하여 그것으로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세나라 시기 언어 력사에 관한 남조선학계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었다
--- p.442

1990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91년에는 교수 학직도 받았다. 약관 31세의 나이에 부교수가 되었는데, 73세에 가까스로 교수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은 것은 아니고, 소속은 계속 인민대학습당 그대로였다
--- p.448

1989년 9월에 서울의 한국문화사에서 〈해외 우리 어문학 총서〉의 한 권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김수경이 북한 밖에 있는 독자들을 향해 “민족분렬론”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 p.456

김수경은 이남재에게 마비된 손으로 “心園속의 不死鳥 한 쌍 당신의 수경”이라고 적어 아들에게 건넸다. ‘심원心園’은 김수경과 이남재가 친구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한 뒤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 다방의 이름으로, 이른바 첫 만남의 장이다. “심원 속의 불사조 한 쌍”이란 수차례의 고난을 뚫고 불사조처럼 살아온 두 사람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 p.463

1998년 7월 16~24일, 이남재의 평양 방문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 p.466

2000년 3월 1일 오전 8시 20분, 김수경은 81년 10개월의 생애를 마감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평양시 평천구역 유골 보관소에 안치되었다. 부고는 김정순(김수경의 평양에서의 아내)과 김태균이 곧바로 각각 편지 두 장에 적어 이남재에게 전달했다. 봉서가 토론토에 도착한 것은 3월 하순의 일이었다. 편지에는 유발이 동봉되어 있었다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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