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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함께 머문 자리

시간과 함께 머문 자리

: 김종기 제12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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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52쪽 | 152*224*20mm
ISBN13 9791191797411
ISBN10 1191797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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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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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은 꽃잎처럼
아양스레 휘날린다.
낙엽은 낙엽같이
와락와락 떨어진다.

지는 건 무엇이나 패퇴일까,
“아니다”라고 단정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물증이 쌓이고 쌓인
세월이라 명명明明함이 확연쿠나.

꽃잎이 날린 뒤 씨앗은 알알하고
낙엽이 지고 나면 열매는 잘 익어
씨알이나 과실로 탐스럽게 성숙해
새날의 새 꽃 새 이파리로 싹튼다.

광주 5·18의 처참한 뭇 죽음이
살려 내는 민주의 숭고함을 보라.
5월의 꽃잎처럼 5월의 낙엽같이
패배가 궁극의 승리로 개선한다.
---「궁극의 승리」중에서

-늦은 여름의 태풍

어둔 공간을 빗줄기가 채운다
억수로 내리지만 고이지 않고 어둠
그렇지 더더욱 낮은 자리로
아 거긴 상습 침수 지역이다

꼼짝없이 또 당하는 아픔
빗물 눈물은 구별하는 게 아니다
흠씬 젖은 사물과 강물이
아 바다까지 물줄기로 잇대어 있다
하지만 사물 중 나는 쓸리지 않는
물에 잠기는 동물이 아닌 오로지 사람이다

난 고지대로 이동할 필요가 없다
17층 아파트에서 산 지 20여 년
저지대 땅이 가득 차도 아랑곳없다
어찌 고층까지 다다를 수 있겠는가
텔레비전에 계속 빗물이 차오르지만
나는 수국[물나라]치외법권에서 살면서
참으로 노아의 홍수 같은 파국일까 봐 두렵다
---「수국[물나라]치외법권治外法權」중에서

마로니에꽃이 피었다.

나의 고개는 젖혀지고 큼직한 푸른 이파리들 틈새로 비집고 하얀 화관들이 드높게 떠받쳐져 뭉게구름까지 찌를 듯하다. 마로니에 늘어진 가지 밑에 앉은뱅이꽃*이 담 따라 총총하다. 나의 몸은 숙여지니 여린 꽃 태가 오히려 튼실하고 강강해서 놀랍다. 무더운 여름의 지열도 범접할 수 없다.

내가 지금 하고픈 일은 키를 한껏 높여 하얗게 물들다가 앉은 자세로 고개를 깊숙이 숙여 앉은뱅이꽃 송이 송이에게 싱글벙글 눈도장을 꼭꼭 찍고픈 일상 속이다. 마로니에꽃과 앉은뱅이꽃을 향한 감동도 풍회風懷도 평등해야 한다. 마땅히 긍정의 힘을 소중하게 길러 높고도 우람함과 작아도 아기자기함은 품격의 차이일 뿐이다.

결코 권세나 부유가 아니라는 사실의 당당한 선언을 듣는다.
---「여름날의 일화逸話」중에서

여름과 가을이 섞바뀌고 있는 벌개미취밭에서 한낮의 땡볕과 한밤의 서리가 오면가면 머무는 자리가 어딜까, 눈 씻고 찾아봐도 흐린 눈초리와 늘그막의 내 예지叡智로는 찾을 길이 없어 한심스럽구나.

닥쳐올 때를 넌지시 기다리는 겨울의 암유暗喩도 있을 텐데 나로서는 알아차릴 재간이 없어, 둔한 감성을 애꿎게 탓하며 쪽쪽 뻗은 강강한 이파리들 사이로 활활 핀 색색 꽃송이의 늦가을 산꽃밭을 두루 섭렵한다.

파란 하늘이 열리고 닫히는 24시간 내내 가을빛 산과 맑은 여울만큼 명징明澄해진 개개의 벌개미취를 눈여길 기회가 고맙다. 내 몸과 맘이 천기天氣를 누리듯 함께한 이들의 심상도 매한가지이기를 빈다.

산행의 목적은 꽃밭 걷기만은 분명 아니기에 잠행潛行으로 인해 무례할까 조심조심한다. 가능한 정성스럽고도 살가운 꽃송이들과 합일하려고 하나니 세속을 헹궈 내며 예서 가만히 살뜰히 변할 수는 없을까.

가을산꽃들을낱낱이열애熱愛한다너무좋구나!
---「함께 천기天氣를 누리듯」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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