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였는지 이름은 잊었으나, 자고로 사람은 영혼의 안정을 구하기 위해 날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두 가지씩 하는 게 좋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이 현명한 교훈을 나는 충실히 지켜왔다. 그리하여 나는 아침마다 일어나고 저녁마다 잠자리에 든다. 그런데 본래 나에겐 고행을 자처하는 경향이 있어 매주 그 이상으로 가혹한 고통을 자신에게 가하고 있다. 매번 빼놓지 않고 [더 타임스] 의 문예면 부록을 읽는 것이다. 끊임없이 출판되는 수많은 책과 그 작품에 기대하는 저자들의 달콤한 꿈과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종합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훈련이 되기 때문이다. 많은 책 중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은 과연 몇 권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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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손님이 모두 모여 식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식당으로 안내할’ 의무를 지닌 상대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문명인들은 어째서 그렇지 않아도 짧은 인생을 이토록 지루한 모임으로 낭비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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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찢겨진 가슴속에도 사랑을 짓밟힌 비통함과 체면을 깎인 분함이―아직 젊은 나의 눈에는 그것이 저열해 보였지만―뒤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져 웬일인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에 찬 것인지, 성실한 마음에도 얼마나 많은 기만이 있고 고결한 정신 속에도 얼마나 많은 천박함이 숨어 있으며, 사악한 마음속에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깃들어 있는지를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 p.47
내가 보기엔 양심이란, 사회가 기성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 낸 법규가 제대로 지켜질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파수병과도 같다. 즉 저마다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위법 행위를 감시하고 있는 경찰이나, 자아라는 성채 깊숙이 숨어든 첩자 같은 것이다. 인간은 남의 마음에 들고 싶은 욕심에 비난받는 일을 더없이 두려워하므로 자신도 모르게 적을 성문 안으로 끌어들이고 마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러므로 양심은 그의 주인이 조금이라도 사회에서 이탈해 나가려는 기미가 보이면 미리 그 싹을 꺾어 버리려고 끊임없이 감시의 눈을 번뜩인다.
--- p.63
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고 있어야 했다. 화가 치미는 일이지만 그가 하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또한 내 결점이지만,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라도 단둘이 있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사귀게 될 수밖에 없으니 정말 난처했다.
--- p.152
우리는 모두 다 이 세상에서 외톨이이다. 황동(黃銅)탑 속에 갇혀서 동료들과는 부호로 의사를 소통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그 부호 또한 공통된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며 그 뜻은 애매하고 불확실하다. 어떻게든 마음속에 간직한 소중한 것을 남에게 전하려 피나는 노력을 하지만 상대에겐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힘이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동료들을 알 수 없으며, 그들 또한 나를 알지 못한 채 맞닿는 법이 없는 평행선상을 오로지 혼자 쓸쓸히 걸어가는 것이다.
--- p.163
로이는 내 표현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내가 농담을 해도 남들이 웃지 않는 일이야 많으니까 상관없다. 가끔 생각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예술가는 자기 농담에 자기 혼자 웃음을 터뜨리는 해학가가 아닐까.
--- p.331
우리는 에드워드의 사진을 계속 구경했다. 세상에 겨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즈음의 모습, 콧수염만 기른 모습, 나중에 수염을 싹 밀어버린 모습 따위. 나이가 들수록 얼굴은 점점 야위고 주름살이 늘었다. 젊었을 때의 모습은 고집스럽고 평범해 보였다. 그러나 점점 피로에 지친 고상한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인생의 경험과 사색과 야심이 빚어낸 변화였다. 젊은 선원 시절의 사진을 다시 한번 보았다. 거기에는 벌써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태도의 조짐이 숨어 있었다.
--- p.400
작가의 인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시련으로 가득 찬 삶이다. 우선은 가난과 세상의 무관심을 이겨내야 한다. 조금 유명해지고 나서도 방심해선 안 된다. 세간의 평판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알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변덕스러운 대중의 손에 달려 있다. 취재를 요청하는 신문기자,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사, 원고 독촉을 하는 편집자, 세금을 빼앗아가는 공무원, 오찬에 초대하는 상류사회 사람, 강연을 의뢰하는 협회 간사, 결혼해 달라는 여자, 이혼해 달라는 여자, 사인해 달라는 젊은이, 배역을 달라는 배우, 돈 좀 빌려 달라는 낯선 사람, 부부간의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대담한 부인, 자기 작품을 비평해 달라는 성실한 청년, 그리고 대리인, 출판인, 지배인, 재미없는 사람, 숭배자, 비평가, 작가 자신의 양심―이 모든 것들에 작가는 끊임없이 대응해야 한다. 그 대신 작가에게도 한 가지 보상이 있다. 뭔가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있으면―괴로운 추억, 친구를 잃어버린 슬픔, 보답 없는 사랑, 상처 받은 자존심,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배신당한 분노 따위―어떤 감정이든 고통이든 모조리 글로 써버릴 수 있는 것이다.
--- p.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