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에 ‘벡터’와 ‘스칼라’라는 게 있다. 스칼라는 방향을 가지고 있지 않고 크기만 가지고 있는 물리량이다. 질량이나 온도, 크기 등 물체의 속성과 관련 있는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벡터는 크기와 방향을 가지고 있는 양으로서 두 가지 정보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화살표로 나타낸다. 속도, 가속도, 힘, 전기장, 자기장 등 대부분의 중요한 물리량은 바로 벡터다. 화살표를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삶의 방향성이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던가? 포기하는 삶은 의외로 평화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박제된 삶일 뿐이다. 내가 좌절하고 슬퍼하며 노여워하는 건 바로 그만큼 힘이 있다는 것이다. 방향을 품고 있어야 벡터가 되어 현실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그 벡터의 방향성이 바로 사랑이며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 1 책, 희망을 탐하다 / ‘내 인생은 왜 이리도 심심하냐고?’ ) 중에서
여행은 그래서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내밀한 자신을 만나는 새로운 동반이다. 프랑수아 모리악의 말처럼 여행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이다···(중략)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가장 작은 소리엔 피아니시모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을 줄 알면 모든 소리를 누릴 수 있다. 사방이 조용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잊었던 삶의 목소리, 깊은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행은 일상의 시끄러움을 벗어나는 것이다.
--- 1 책, 희망을 탐하다 / ‘늑대와 함께 춤을, 개와 함께 행복을’ ) 중에서
그러나 그 세계사 교과서라는 게 또 문제다. 문명의 발상지에서부터 출발한다지만, 교과서를 들춰보면 이는 곧 유럽의 고대사와도 같다. 물론 교과목은 세계사니까 인도의 고대사도 적당히 끼워 넣고 중국의 역사도 대충 언급하지만, 중심은 유럽이다. 아프리카나 남미(라틴 아메리카라는 명칭도 그렇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라틴 민족이 점령해서 그렇게 부른다는 게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사실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이름도 유럽인들이 제멋대로 지은 것에 불과하지만)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과목은 엄연히 세계사다. 서양문명의 영향권에 살고 있고, 역사라는 걸 체계적 학문의 틀로 마련한 게 서양에서 비롯되었으니 조금 이해할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결코 ‘세계사’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유럽중심의 세계사’ 또는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본 부분적 세계사’일 뿐이다.
--- 2책, 정의를 탐하다 / ‘잠든 역사를 깨워라’ ) 중에서
그의 경제학은 부자의 경제학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인간과 경제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치고 깨우치는 경제학이었다. ‘남의 불행을 담보로 한’ 행복은 어떠한 경우에도 진정한 행복일 수 없다. 나중에 그는 이 ‘남의 불행’을 생태의 문제로까지 확산한다(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환경과 생태는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 환경(環境, environment)은 말 그대로 인간을 둘러싼 자연, 즉 인간의 중심이라면 생태(生態, ecology)는 더불어 함께 사는 형태를 뜻한다. 니어링은 생태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니어링은 되묻는다.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한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를 끝없이 물어야 한다고.
--- 3책, 정체성을 탐하다 / ‘위대한 삶, 백 년’ ) 중에서
책에 따르면 모든 지식은 관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수동적인 ‘보기’가 아니라 적극적인 ‘관찰’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재스퍼 존스의 그림들을 예로 든다. 그의 대표작 「국기」 시리즈는 유령처럼 보이는 갖가지 환영과 치밀하게 짜여 있는 표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반복적으로 제시하고 변형시킨다. 처음에는 ‘어, 저게 뭐야? 저것도 그림이야?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출발점이다.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다시 보도록 하는 것이다.
--- 4 책, 창의적 생각을 탐하다 / ‘생각의 다양성, 삶의 다양성’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