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전쟁 시기, 관련 사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저장성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세균전을 세 차례나 실시한 적이 있다고 했다. 제1차는 1939년~1940년 기간에 샤오산(蕭山), 닝보(寧波), 취저우(衢州), 이우(義烏), 진화(金華) 등 지역에서 실시한 것이고 제2차는 1942년에 저간전역(浙?戰役) 기간에 진화, 취저우, 리수이(麗水), 윈허(雲和) 등 지역에서 실시한 것이며 제3차는 1944년에 리원전역(麗溫戰役) 기간에 리수이, 취저우, 원저우(溫州) 등 지역에서 실시한 것이다. 일본군이 저장 일대에서 실시한 세균전은 저장성의 태반까지 파급되어 이런 지역의 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비명횡사하였으며 막대한 재난을 빚어냈다.
1940년 10월 27일, 일본군은 세균무기로 닝보 지역을 습격했다. 이날 아침에 일본 군용기 한 대가 닝보 상공을 침입하여 “충칭은 기근이 들었으나 일본인은 풍족하게 살고 있기에 여분의 식량을 당신들에게 원조한다(重慶在鬧饑荒,日本人民則?衣足食,有余糧來接濟?們。)”라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뿌렸다. 오후 2시 즈음에 또 다른 한 대의 일본 군용기가 닝보 상공에 침입하여 대량의 밀가루, 밀알을 뿌렸는데 카이밍가(開明街) 일대 상공은 노란색 안개가 낀 것처럼 변했다. 일본 군용기가 지나간 후 현지 주민들은 바로 벼룩이 급격히 많아진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벼룩들이 페스트에 걸린 환자의 피를 빨아먹어 그 체내에 억만 개의 페스트균이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은 후에 밝혀졌다. 29일에 전염되어 발병한 사람이 나타났고 30일에는 사망자가 연이어 나타났다. 11월 3일에 이르러 36명의 환자 중에 16명이 사망하였고 그 이튿날에 또 7명이 사망했으며 또 하루 지나서 20명이 사망했다. 당시 닝보사립화메이병원(寧波私立華美醫院)은 환자들에게 림프절 천자액을 도포하고 내시경 검사를 진행하여 전형적인 페스트균을 발견하였고 관련 표본을 저장성 위생시험소에 보내 검증한 결과 페스트균으로 확정되었다. 저장성의 정부 주석 황샤오훙(黃紹?)은 보고를 받은 후 저장성 위생처의 직원을 닝보에 보내서 조사하고 처리하라고 하였는데 이 페스트균은 일본 군용기가 살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번 페스트의 전파는 닝보 인민들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10월 29일부터 12월 6일에 이르러 격리병원에서 치료받는 61명 환자 중에서 단지 2명만 다행히 살아남았고 격리하기 전에 타지로 도망간 38명은 잇달아 모두 사망하였다. 그 뒤의 조사에 따르면 이번 전염병으로 죽은 민간인은 총 117명에 이른 것으로 입증되었다.
허치수이(何祺綏): 세균전으로 나는 가족과 재산을 잃었다.
허치수이(1931∼2013), 남, 닝보시 랑관항(寧波市?官巷)에 거주.
자술: 1940년에 저는 9살이었고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카이밍가 48호에서 살았어요. 당시 삼촌 허푸린(何福林)은 중산둥로(中山東路) 266호의 위안타이호텔(元泰酒店)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이 호텔은 저의 아버지가 매입한 것이고 직원 18명을 두었어요.
1940년 10월 27일에 저는 한 일본 비행기가 카이밍가 일대 상공에서 빙빙 돌다가 갑자기 수많은 밀알, 밀가루, 벼룩 등을 뿌리는 것을 봤어요. 당시 하늘은 노란 연기로 물들였고 목격한 사람들은 매우 놀라고 당황했죠. 후에 사람들은 현지 벼룩과 다르게 생긴 벼룩들을 많이 발견했어요. 이런 벼룩들은 아주 작으나 빨간색을 띠었는데 사실 페스트균이 있는 벼룩인 거예요. 이때 아픈 사람이 나타났고 이웃 가게의 사람이 인력거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것을 봤어요. 나중에 환자들이 점점 늘어났고 사망자도 잇달아 생겼으며 급사자가 많아졌어요.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여 무서워서 벌벌 떨었고 가게도 닫고 영업하지 않았어요. 적지 않는 사람들은 뿔뿔이 전염병 지역에서 탈출하려고 했고 저의 아버지도 외지로 도망쳤어요.
후에 페스트가 점차 넓은 면적으로 확산하고 급사자가 끊임없이 나타나자 거리에는 상복을 입고 우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땅에는 소독하는 석회가 뿌려져 있었으며 사방의 분위기가 으스스했고 무서웠어요. 전염병 지역에 매일 사망자들이 속출했는데 최대 20여 명이 죽는 날도 있었어요. 이름이 있는 사망자는 총 100여 명이지만 이 중에는 도망가서 사망한 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저의 삼촌은 가게의 회계사인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일을 시작하셨죠. 삼촌은 배운 분이셔서 모든 장부를 관리하셨어요. 일본의 군용비행기가 세균을 살포하는 날에 삼촌은 땅바닥에 떨어진 밀알을 보고 호기심에 주워서 입에 넣고 깨물어봤어요. 그러고 나서 옆에 있는 직원들에게 밀알이라고 알려주셨어요. 그런데 그날 밤에 삼촌은 너무 어지러워서 장부를 보지 못하게 됐어요. 이튿날에 삼촌의 병세가 악화하여 직원들이 넝쿨로 만든 의자 채로 들고 치료받으러 갔어요. 의사는 그냥 머리 아프고 열나는 흔한 병이라면서 약을 주고 집에 돌아가게 했어요. 그러나 돌아온 후 삼촌의 병세가 점점 심해지다가 11월 1일에 돌아가셨어요. 당시 겨우 24세밖에 안되었어요. 이런 비보를 전해 들은 숙모 푸런쥐안(付仁娟)은 바로 사오싱에 오셨어요. 숙모는 흰 천으로 머리를 매고 상복을 입었으며 흰 천으로 신발을 쌌어요. 숙모는 집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어요. 숙모는 “허푸린아! 허푸린아!”라고 울면서 삼촌의 이름을 부르셨고 너무 슬퍼서 바닥에 쓰러지면서 통곡을 하셨죠.
가게의 사람들이 잇달아 격리병원에 입원했고 기타 직원들도 가게가 문을 닫자 저의 집에 머물게 됐어요. 집에서 그들에게 여비와 일부 생활비를 주면서 고향으로 도망가라고 하였으나 적지 않는 사람들은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었어요. 오직 학도(學徒)인 첸구이파(錢貴法)만 살아남았어요. 첸구이파는 저에게 “제가 격리병원에 들어갈 때 죽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그들은 안색이 자주색을 띠고 손으로 가슴을 쥐어 잡으면서 고통스럽게 울부짖거나 바닥에 뒹굴고 있었어요. 정말 끔찍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어요!”라고 알려주었어요.
당시 정부는 전염병의 근원을 철저히 없애기 위해서 카이밍가의 동쪽, 베이타이핑양(北太平洋)의 서쪽, 중산둥로(中山東路)의 남쪽, 카이밍항(開明巷)의 북쪽에 이르는 5,000㎡가 되는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 내의 137채 건물들을 모두 허물었어요. 먼저 밧줄로 전염병이 도는 지역들을 둘러싼 후 담장으로 막았고 그다음 방독면을 착용한 사람들이 석회로 소독을 진행했어요. 그날 밤에 소방차가 출동했고 담장 내의 건물들을 모두 불태워 없앴어요. 저는 불이 저희 가게의 창문에서 타오르는 것을 직접 보았어요. 나중에 지붕이 타올랐고 결국 건물 전체가 불에 타서 무너졌지요. 우리 가게는 이렇게 사라졌어요.
---「제1장 저장 닝보(浙江寧波) 지역의 페스트, 콜레라 피해 생존자 실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