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가계부 이야기의 주인공 황꾸이샹은 광동 세무 관련 기관의 간부이다. 그는 1960년대 생이었는데 그 시기에 태어난 사람은 ‘때를 잘 타고난 세대’라 불렸다. ‘문화대혁명’이 끝나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면서 국가의 개혁 개방과 ‘함께 한’ 세대였다.
그 세대인 황꾸이샹은 중국에 거대한 변화의 과정이 담긴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지켜보아 왔기 때문에 국가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1만 명이면 느끼는 감정도 1만 개이듯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마련인데, 신중국의 개혁ㆍ개방ㆍ발전에 대한 황꾸이샹이 느끼는 바는 30년 가까이 지속된 가정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한 ‘작은 가계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를 찾기 위해 우리는 아주 작은 실마리부터 중간 여러 다리를 거쳐 황꾸이샹을 찾아내었고, 다행히 그는 흔쾌히 우리의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앞전에 집을 사고자 돈을 모았던 문제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그의 부인이 한 뭉치의 가계부를 들고 나왔다. 좀 오래된 듯한 가계부의 수입과 지출 영수증, 페이지마다 적혀 있는 숫자와 기호들은 모두 오랜 세월의 진한 맛과 색채를 담고 있었다. 또한, 중국 개혁 개방의 발전 방향과 문제의 본질에 대한 흔적을 담고 있었다.
수기 영수증이 소환해낸 옛 기억
황꾸이샹은 조심스럽게 눈앞에 있는 연필로 ‘1999년’이라고 쓰인 옅은 갈색의 ‘작은 가계부’를 펼쳐 보았다. 속표지에는 길이가 제각각인 ‘물품 영수증’ 몇 장이 붙어 있었는데, 영수증의 글씨는 흐릿해져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어떤 내용인지 알아볼 수는 있었다. 이는 황꾸이샹이 당시 세무기관 ‘징수, 관리, 조사’의 3분리 개혁에 참여하면서 적었던 공책으로, 황꾸이샹의 부인이 당시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가계부로 쓰면서 날짜를 꾹꾹 눌러 쓴 것이다.
황꾸이샹은 265위안이라고 손글씨로 쓴 색 바랜 영수증을 가리키며 회상했다. 당시 그는 광둥성 동부지역의 빈민구제 업무를 끝내고 원래의 직장으로 복귀를 했을 때여서 옷이나 모자와 같은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사가 자신을 지역 세무국에 발령냈는데, 세무국에서는 농촌에서 근무할 때처럼 막 입고 다닐 수가 없었다. 업무 시작 보고를 한 다음날 퇴근길에 황꾸이샹의 눈에 띈 면, 폴리에스테르 혼방의 여름, 가을용 윗옷과 바지 두 벌 샀고, ‘란런(?人)’ 브랜드의 구두와 양말까지 총 265위안을 쓰고 나니, 확실히 출근할 때 자신감이 생겼다. 황꾸이샹은 며칠 연이어 새 옷을 입고 출근하니 뤄 상사가 웃으면서 ‘요즘 좋은 옷을 입으니 잘 생겨 보이는데, 무슨 좋을 일이 있냐?’ 여러 차례 물었다. 사실 평소에 평범하고 수수하게 입고 다니는 편이어서 의심쩍은 듯 놀리는 말들을 듣는 것이 기분이 좋았으며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더는 묻지 않았다.
인터뷰를 하면서 무심코 ‘작은 가계부’를 펼쳐보다가 셔츠와 양말이라고 각각 적힌 영수증을 발견하고는 또 한 번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그때 산 옷들은 이미 많이 빨아서 허옇게 바랬고 너덜너덜해졌다며, 다행인 것은 자신이 아직까지도 관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애정을 담아 말했다.
당시는 이 옷들을 입고 실무 부서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돈을 벌고 개혁을 이끌고 팀을 꾸려 한창 일할 때였다. 항상 해마다 선두주자가 되려고 했던 일은 아직까지도 보람이 되고 위안이 된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당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며 놀리던 상사는 일찌감치 퇴직하였고, 오랜 가계부 속의 ‘새 옷’은 장롱 속에서 이미 해어지고 빛바랜 ‘골동품’이 되어버렸다. 영수증에는 세무 간부가 개혁과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직장에서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기회가 되면 반드시 이런 옷을 입고 옛 동지와 함께 실무에 깊숙이 들어가 개혁을 추진하려는 투혼을 다시금 발휘해야 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적지 않게 오른 월급, 세무인도 납세자
가정의 가계부는 대부분 특별할 것이 없거나 조잡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가계부를 쓴 사람들은 잘 알아볼 수 있다. 황꾸이샹의 ‘작은 가계부’는 단순히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금전출납부 형태일 뿐이라 기업이나 회사에서 쓰는 것과 같은 규칙은 없었다. 하지 만, 첫 페이지 왼쪽 상단에는 지난달 또는 앞 페이지의 잔금이 적혀 있고, 가운데에는 선명하게 그어진 선으로 수입과 지출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가끔 수입지출 전용 비고란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 크게 다른 점이 없었지만 영수증이 붙어 있는 ‘작은 가계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만의 방법이 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계부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년간 가계 수입의 변화였다. 황꾸이샹은 1980년 재정 부서에서 근무할 때 매월 27.5위안의 임금을 받았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광둥성의 개혁 개방을 이끄는 기관에 근무할 당시에는 기본급 외에 상여금, 지역 보조금 등이 있었고 각 항목을 합치면 매월 2,000위안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작은 가계부’에서 볼 때 그때 이미 ‘주택 기금’ 수입이 있었지만 ‘기초 단계’여서 금액은 형편없이 적은 수준이었다. 당시의 주택 시장, 주택 대책과 전체 물가에 견준 셈이다. 지나치게 박봉인 공무원들은 ‘의식주(衣食住)’ 외에는 어떤 욕심도 갖지 못했다.
‘작은 가계부’에 따르면, 황꾸이샹의 집은 여러 해 동안 수도 및 전기요금이 월평균 6∼70위안으로 여름철에도 에어컨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더위를 견뎠다. 정말 ‘가혹’하리만큼 근검절약하여 오랜 세월 동안 ‘인내의 미덕’이 몸에 배게 되었다.
2008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중국은 사회, 경제적으로 새로운 물결의 발전 가도를 달리게 되었는데, 기업은 세원이 풍족하고 정부의 재정도 넉넉한 편이었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 공무원의 임금과 상여금도 대폭 올랐다. 2009년부터 ‘작은 가계부’는 황꾸이샹의 ‘개인 소득세’ 원천징수납부 기록을 반영하게 되었는데, 매년 수천 위안에서 1만여 위안의 납세 기록, 연말 때가 되면 세무 계통의 ‘동종업계’에서 보내온 세금 영수증을 받았다. 황꾸이샹은 “세금 영수증을 증표로 삼아 우리는 명예로운 납세자가 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일종의 증명이기도 합니다. 기관에서도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가치를 창출하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도 생겼습니다.”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작은 가계부 속의 큰 세상 ?황꾸이샹(?桂祥)의 가계부 이야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