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과 사이의 관계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우선 당과 사이의 관계 차원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사이와 당 왕조가 맺은 관계를 흔히 내부(內附) 또는 내속(內屬)이라고 하는데, 요약하자면 사이와 당 왕조가 세운 관계가 다르고 정치적 귀속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관계의 유형과 기본 성격이 다르다.
(1) 통공(通貢)
정관(貞觀) 20년(646) 정월에는 “토욕혼, 토번, 고려, 석국, 3월에는 서번시반국왕, 슬닉국, 윤3월에는 실립국, 장구발국, 구란국이 함께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장구발국 혹은 운장게발은 본래 서강 종족이었다. 실립의 서남쪽에서 실립이 내부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왕인 롤리도보리가도 사자를 보내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장구발국은 동천축과 국경을 맞대고 동천축에 종속했고 실립은 토번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토번이 강해진 후 ‘토번의 속박’을 받았다. 정관 20년에 당의 통치가 총령 이서와 이남에 이르지 못했다. 이른바 실립국과 장구발국의 내부(內附)는 단지 당과 관계를 맺었을 뿐이었고, 이른바 조공(朝貢)이란 선진(先秦)시대 이래의 조공 이념이 당과 주변 국가의 관계에 파급된 것에 불과했다. 당조 전반에 걸쳐 당조와 교류가 있었던 대식, 일본과 남해, 남아시아 제국(諸國)이 조공국으로 여겨졌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2) 친족 혹은 군신(君臣)을 겸하다
정관(貞觀) 때 당과 토번이 화친했는데, 찬보는 태종을 ‘천자’라 칭하며 스스로를 ‘노(奴)’, ‘신(臣)’, ‘자서(子?)’라고 칭했다. 당 태종과 찬보는 개인적으로 장인과 사위 관계였고, 당과 토번은 군신 관계였다. 고종 영휘(永徽) 이후 토번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서역과 청해 등지에서 쌍방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개원(開元) 초기에 토번은 군사를 믿고 당과 대등한 ‘적국(敵國)’이 될 것을 요구했다. 개원 15년(727), 현종(玄宗)은 대규모의 토벌을 계속하려고 했는데, 장설(張說)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농우(?右, 간쑤성 롱츠 서쪽에서 신장 디화 동쪽 까지를 말함) 제주(諸州)가 허비된 것을 감안하여 “계상(稽?, 꿇어앉아 이마를 바닥에 조아리는 고대의 인사법)하고 속국이 되는 것을 허락하자”고 주장하여 변경의 제주가 휴양의 기회를 얻게 하였다. 토번은 전장에서 거듭 실패하자 화해를 자청했다. 이에 현종은 토번에 사자를 보냈고, 찬보는 사자를 보내 조공하면서 상표를 올려 현종을 외삼촌이라 칭하고 조카로 자칭하며 친선을 도모해 “이로부터 토번이 다시 속국으로 되었다.”. 장설 등은 토번이 ‘내속(內屬)’ 또는 ‘신하가 되어 복종’할 것을 바랐지만, 사실상 토번과 당(唐)이 휴전하고 화해하기를 원했다. 찬보의 표문은 화해를 위해 당조가 토번을 공개적으로 신하로 복종시키는 것을 포기했고 결국 외삼촌과 조카로 지내기로 약속한 법적효력을 지녔다. 이런 관계의 성격에 대해서는 당조의 조서에서 명확히 설명했다. 당 덕종은 토번의 찬보에게 보낸 서신에서 “당과 토번은 친하면 외삼촌 조카의 관계이고 의로우면 원조를 준다.”고 했다. 당조와 토번은 외삼촌 조카로서 존비의 관계가 있으며 토번은 동시에 인번(隣蕃)으로 대체되었다. 이외에 친족이나 군신의 관계로 당과 함께 지낸 인번에는 후돌궐과 천보 이후의 회흘(回紇)이 있다.
(3) 책봉 및 조공
당 고조 무덕(武德) 7년(624) 2월,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내부하고 역법을 받아들여 반력(頒曆, 국왕이 신하에게 발급하는 역서)을 청했다.”. 이와 동시에 고조는 사자를 파견하여 고구려왕을 요동 군왕(郡王), 백제왕을 대방 군왕, 신라왕을 낙랑군왕으로 책봉하였다. 곧이어 고조는 수(隋)가 멸망한 교훈에 비추어 그들을 신하로서 복종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배구(裵矩)와 온언박(溫彦博)은 “요동의 땅은 주나라 때에 기자(箕子)의 나라였고, 한나라 때에 현도군(玄?郡, 전한의 무제가 기원전 107년에 세운 한사군 중 하나)이였나이다. 위·진(魏晉) 이전에는 책봉하는 범위에 가까웠으니 신하로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또 중국이 이적(夷狄, 오랑캐)과 대적하는 것은 태양이 별과 대적하는 것과 같으니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번복(藩服, 옛날 구복의 하나로 왕도 부근의 땅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과 같이 대해주십시오.”라고 일깨웠다. 배구와 온언박이 보기에 고구려의 땅은 원래 한(漢)나라의 현도군이었고 위·진 이전에는 중원 왕조의 지배의 판도였기 때문에 신하로 복종하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화하(華夏)를 중심으로 말하자면 고구려는 번복으로 분류되어 당을 섬겨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고구려 내부(內附)는 단지 당의 역법을 따르고 역서를 반포하고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당에 공물을 받치며 당과 군신 관계를 맺는 것뿐이다. 이런 관계의 기본 성격은 당 고조가 조서에서 명기한 대로 “이국통호(二國通好)”였다.
이때 당은 고구려·백제·신라왕에게 작위와 관직을 부여한 형식은 당의 신하와 같았지만 당 왕조의 통치 범위 안에 있지 않고 모두 당과 주변국의 존비 등급관계를 확립하고 종속적 지위로 낮추는 데 그쳤다. 예를 들면 서한 초년의 민월(??)왕, 동해왕은 비록 서한이 월나라에 책봉한 만이(蠻夷, 오랑캐)왕이지만 서한 초에 분봉된 같은 성씨의 제후왕과는 달리 ‘진나라 때부터 소속을 버렸기’ 때문에 서한의 통치 영역 내에 들어있지 않았다. 한고조가 책봉한 남월(南?)왕은 정기적으로 조공을 하고 질자(인질로 보낸 아들)를 들여보냈지만 남월도 여전히 ‘만이외월(蠻夷外?, 오랑캐)’로 분류되었다. 안사고(顔師古)의 말대로 “중국이 아니므로 외이(外夷, 오랑캐)라 했다”. 남월은 서한의 통치 안에 있지 않았다. 후에 한 무제는 남월을 내신(內臣)으로 삼고자 중국내 제후들과 함께 조공을 하고 원래의 정권형식을 유지하고 승상·내사·중위·태부는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 외에 다른 관리들은 스스로 둘 수 있게 했다. 남월은 한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변경의 요새를 허물고 한나라 법(漢法)을 널리 시행하였으며 한나라에서 사람을 파견해 진무했다. 남월은 결국 한나라의 군현(郡縣)으로 바뀌었지만, 이 예제는 봉건왕조통치체제 안팎의 번이(蕃夷)들이 똑같이 책봉을 받아 조공하더라도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한 무제가 구상한 남월과 한나라의 관계는 책봉과 조공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이미 한나라의 정령과 법령에 의해 이루어져 있었고, 그 이전까지 서한은 남월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당이 군사적으로 정복 및 점령하기 이전의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종당(終唐, 당 말엽)세대에 당에 책봉되어 당에 공물을 바친 신라가 당과 맺었던 군신 관계의 의미는 모두 예외가 아니었다. 청(淸)대 주변에서 책봉되어 조공을 하던 속국인 조선 등이 청나라 경내의 번부와 다른 점은 역시 내정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정관 3년에 당은 설연타와 연합하여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이남(夷男)을 칸으로 책립하여 막북에서의 통치를 인정하였다.
(4) 기미주
『신당서(新唐書)』권43 『지리지(地理志)』의 ‘기미주’ 서언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당(唐)은 흥성 초기에 사이를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태종 때에 돌궐을 평정해서부터 서북의 제번과 만이들이 조금씩 귀순해왔고 그 부족들은 주현에 배치되었다. 큰 부족은 도독부로, 그 수령을 도독과 자사로 설치하되 모두 세습하게 했다. 비록 부세와 강역은 호부(戶部)에 오르지 못하지만 교화와 처소는 변주 도독, 도호에서 관할하고 규정으로 분명하게 했다. 현재 투항을 권유한 목록을 보면 그 성황을 잘 알 수 있다. 그후 귀순하거나 배반한 것은 관리제도가 달라 자세히 알 수 없다. 돌궐, 회흘, 탕구트, 토욕혼이 관내(산하이관 서쪽 또는 자위관 동쪽 일대의 지방)의 관할에 예속된 자는 29부(府)와 90주(州)에 달하였다. 돌궐의 별부 및 해, 거란, 말갈, 강호, 고려 등 하북에 예속된 자는 14부와 46주로 되었다. 돌궐, 회흘, 탕구트, 토욕혼의 별부 및 구자, 우전, 언기, 소륵, 하서의 제호에 귀순한 자, 서역 16개국이 농우에 예속된 자는 각각 51부와 98주로 되었다. 강, 만이 검남에 예속된 자는 261주로 되었다. 만이 강남에 예속된 자는 51주로 되고 영남에 예속된 자는 92주로 되었다. 또한 탕구트 24주는 그 예속을 알 수 없다. 대개 856개의 부주는 기미운(羈?云)이라 불렀다.
---「소제1장 당(唐)과 사이(四夷)의 관계의 유형 및 정치질서 구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