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사진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영화에서도 틀림없이 리얼리즘적 경향과 조형적 경향의 긴장과 갈등이 중요한 문제일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가 등장하자마자 두 경향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 순전히 우연한 일일까? 마치 시작부터 영화적인 시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기라도 하려는 듯이 영화의 창설자들은 두 경향에 내재하는 각각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두 경향의 원형을 체현한 것은 엄격한 사실주의자인 뤼미에르와 예술적 상상력에 고삐를 풀어준 멜리에스다. 그들이 만든 영화는 말하자면 헤겔적 의미에서 테제와 안티테제를 이룬다.
--- p.75, 「2장 「기본 개념」」중에서
그리피스의 영화에서 작은 물질적 대상의 거대한 이미지는 서사 속에 통합된 구성 요소일 뿐 아니라 물리적 현실의 새로운 면을 드러내는 역할도 담당한다. 그리피스가 그러한 대상을 재현하는 방식을 보면, 플롯을 구성하는 모든 감정적, 정신적 사건의 물질적 기원, 결과, 함의를 뚜렷이 보여줄수록 영화는 더욱 영화답다는 신념이 그의 영화를 이끌어가는 듯이 보인다. 내면의 전개 과정은 물질적 삶에서 솟아나 다시 그 맥락 속에 편입되기에, 오직 물질적 삶의 덤불을 통해 나아가는 영화만이 내면의 과정을 적합하게 서술할 수 있다는 신념.
--- p.106, 「3장 「물리적 실재의 수립」」중에서
영화비평가들이 때로 배우의 과장된 연기를 비난하는 것은 반드시 그 연기가 연극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비평가들은 배우의 연기가 어쩐지 너무 강하게 목적을 의식하고 있어서 사진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불확정성, 미결정성의 기운이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 p.189, 「6장 「배우에 대한 보론」」중에서
1929년, 런던에서 최초의 미국 유성영화들을 관람한 르네 클레르는 〈브로드웨이 멜로디〉의 다음 장면에 특히 찬사를 보냈다. 차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때 우리는 베시 러브의 우울한 얼굴을 본다. 그녀는 창문을 통해 거리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태를 바라보는데, 우리는 그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소음으로 미루어 자동차가 막 출발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클레르에 따르면 이 짧은 장면의 아름다움은 여배우의 얼굴에 집중하면서도 동시에 무성영화라면 몇 개의 이미지를 이어놓음으로써만 전달할 수 있었을 이야기를 그 안에 모두 담아냈다는 데 있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소리가 적절한 순간에 이미지를 대체했다. 유성영화에 독자적 효과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표현 수단의 경제성에 있다.”
--- p.249, 「7장 「대사와 소리」」중에서
아방가르드 영화 작가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주변 세계를 예민하게 지각하도록 하기 위해 순수하게 영화적인 기술을 이용하여 흥미로운 디테일이나 비일상적인 광경을 포착하는 데 열성을 보였다. 〈디스크 957번〉에서 창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는 물방울과 자욱한 안개는 어느 골목길을 사뭇 신비롭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물질적 현상들을 물리적 현실의 구축을 위해서가 아니라 구성적인 목적을 위해서 기록했다. 그들은 그 현상들로부터 리드미컬한 운동의 자족적인 시퀀스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p.341~42, 「10장 「실험영화」」중에서
한편 영화적 정신을 지닌 사람들은 이야기 구성보다는 “물질적 삶의 작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사건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줄거리가 예정된 선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의무에 갇힌 경직된 영화들보다 줄거리가 이 선로에서 벗어나 카메라 현실의 방향으로 이탈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오티스 퍼거슨에 따르면 랑의 영화 〈분노〉는 “영화의 구상과는 상관없지만 그야말로 삶의 충실한 모상인 소소한 것들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창조적인 정신으로 빛난다.”
--- p.418~19, 「12장 「연극적 이야기」」중에서
〈라쇼몽〉에서 관객은 연이은 화자들의 다양한 시각에서 살인 장면을 바라보도록 유도되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관객은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간에 매번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면성은 영화에서도 달성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영화와 소설의 형식적 특성들 간의 차이가 대체로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결론을 확증해준다. 그런 차이들은 두 매체 사이의 본질적 유사성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진다. 그것들은 부수적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만 하다면 소설은 영화적 방식을 따른 각색에 거의 저항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두 매체는 상이한 세계와 관계한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결정적인 차이를 만든다.
--- p.431, 「13장 「막간: 영화와 소설」」중에서
이데올로기가 해체 일로에 있고 우리는 내적인 삶의 본질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다면, 내적인 삶의 우위에 대한 발레리의 주장은 공허하게 울릴 수밖에 없다. 역으로 과학의 영향을 받아 우리 세계를 이루는 물질적 요소들이 중요성을 얻게 되었다면 영화가 그 물질적 요소들에 갖는 편향성은 발레리가 인정하려는 정도보다 훨씬 더 정당해지리라. 어쩌면 발레리의 가정과는 정반대로, 그가 영원히 현전하리라고 당연시하는 내적인 삶의 포착 불가능한 내용으로 가는 지름길이란 없지 않을까? 어쩌면 그 길은, 만일 그런 길이 있다면, 피상적 현실surface reality의 경험을 관통하여 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영화가 막다른 길이나 한갓 이탈로가 아니라 입구라면?
--- p.518, 「16장 「우리 시대의 영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