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일생을 통해 꼭 하고 싶은 얘기가, 그러기에 평소에는 오히려 더 가슴 깊이 묻어두게 되는 하나의 얘기가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누가 어떤 직업을 택하는 것도 바로 ‘그 얘기’를 나름대로 펼쳐보이기 위해서가 아닌지 모르겠다. … 내게 있어서 ‘그 얘기’는 바로「영웅시대」, 아니 6·25를 전후한 우리의 불행한 가족사였다. 지금으로부터 십칠팔 년쯤 전에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작가로 끝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문득 나를 사로잡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소설거리가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 pp.4-5
“같은 깃발 아래 있어도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군. 세상에는 주의니 이즘이니 하는 이름이 붙어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념이 될 수 없는 것이 둘 있네. 종종 상반되기도 하는 그 둘 중 하나는 민족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휴머니즘이지. 그것들은 결코 별개의 이념이 될 수 없어. 어떤 이념도 그 둘 중의 하나 또는 그 둘 모두에 의지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는 없는 최소한의 바탕이나 인간정신의 본질적 구조 같은 것이기 때문이네. 오히려 나머지 다른 이념들이야말로 그 둘의 도구거나 수단일 뿐이네.”
--- p.113
“하기사 처음에는 보이는 게 없디더. 그렇지만 곧 깨달았니더. 이쪽저쪽 어느 쪽도 아닌 채 이 미친 세월을 견뎌낼 수 있다고 믿은 내가 잘못이라는 거 말이씨더. 그런데 마침 경찰간부로 있던 대학 선배가 자리를 하나 내주데요.”
“그러믄 아무치도 않단 말이라?”
“한(恨)이사 왜 없을니껴? 하지마는 그 한을 풀자고 들면 새로운 한만 늘어날 뿐이시더. 나는 오히려 그걸 막고 싶니더. 우리라도 남의 가슴에 못박는 짓은 고만 하고 싶니더. 그기 경찰이 된 내 목적이씨더…….”
--- p.293
“처음에는 아이들 남매가 왔더군요. 훈이라던가? 참 똘똘한 녀석이었어요. 그렇게 여럿이 들락거려도 못 찾아간 살림살이를 척척 찾아내는 겁니다. 놋그릇을 죽으로 파내 먹을 것과 바꾸는가 하면 비단 옷가지를 한아름 안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일인즉은 그 아이가 처음 나타났을 때 고발해야 될 형편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지요. 귀하게 자라다가 고생하는 것만도 가여운데 그 어린것을 끌어다 경찰에 넘길 수는 없었다 이 말입니다…….”
--- p.417
이념의 영웅, 혁명의 영웅, 해방전선의 영웅, 영웅적인 전투, 영용(英勇)한 인민군…… 하루에도 몇 번씩 무심히 들어넘기는 그 말을 훈이의 작문 속에서 발견하는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으로 들려온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무엇이 그토록 세찬 충격으로 자신을 뒤흔드는 것일까 ─ 동영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그런 생각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은 떠오르지 않고 난데없이 박영창 선생의 목소리만 귓가에 울려왔다. 적어도 십 년의 세월은 뛰어넘어 온 목소리였다.
--- p.429
“분노는 약자를 강자로 만든다, 또는 미워하라, 미워할 줄 아는 자가 사랑할 줄 아는 자다 하는 따위의 끔찍한 말장난 말인가?”
영규는 어느새 그 독한 위스키를 함부로 마셔대면서 빈정대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동영은 정색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네의 그 뿌리 깊은 좌절과 실의의 원인은 무엇인가? 단순히 당이 자네의 투쟁경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든가 과업의 투쟁적인 수행과정에서 입게 된 개인적인 불리나 상실 따위는 아닌 것 같은데…….”
--- p.476
“가사(그 아이야) 뭐 어린 기 사상이라 칼 끼 있나? 상고(商高) 졸업하고 몇 달 쉰다꼬 집에 있다가 사변을 만났제. 그런데 그게 우땠는동 아나? 내사 전쟁하는 거는 직접 보지 못했다마는, 세상에 무서운 거는 바로 싸움이 붙는 기 아이라, 그전에 사람들이 사로잡히는 공포와 광란이지시푸다. 빨갱이라카믄 비슷한 것도 모두 잡아 가디이 돌아온 거는 얼매 안 됐다. 히야, 니 골로 간다는 말 들어봤제? 그기 우예 나온 긴지 아나? 그렇게 한번 끌려 골(산골짜기)로 들어가믄 살아 돌아오지 몬한다꼬 죽는 걸 골로 간다 카게 된 기라...”
--- p.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