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사회상의 변화에 따라 결혼도 변화해 왔다. 전통 사회에서의 결혼은 개인보다 집단의 이해관계가 우선하는 제도였던 반면, 근대 이후의 결혼은 개인의 취향과 정서적 만족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고 마침내 연애결혼이 보편적인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불안정한’ 감정을 기반으로 한 결혼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되었고, 결혼은 이제 한물간 구시대적 제도로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 연애결혼의 탄생은 처음부터 결혼의 종말이라는 위험을 그 안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이 과연 종말을 맞을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로 한 단계 또 진화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 「연애결혼의 탄생」 중에서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는 “가정의 천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엘사는 사랑에 빠지지도 결혼을 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의 욕망을 추구하고, 여자이기 때문에 감추어야 했던 능력을 보란 듯이 세상에 드러낸다. 이제 그녀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과 탐험에조차 당당하게 도전하는 당찬 모습을 보인다.
--- 「로맨스 신화를 넘어서 - 「겨울왕국」의 엘사 이야기」 중에서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역량을 타고 태어나지만 사랑의 지속은 사랑의 힘이 아닌 윤리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묵자는 사랑은 열심히 배워야 시작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렇게 학습한 사랑은 사랑의 힘, 곧 상대를 이롭게 하는 힘에 의지하여 지속될 수 있다고 보았다. 유가의 별애보다는 묵가의 겸애가 한층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했던 이유다.
--- 「사랑을 하는 두 가지 방식 - 유가의 '구별하는 사랑'과 묵가의 '구별 않는 사랑'」 중에서
사랑은 상대에 관한 관심 하나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그 외의 조건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태도, 사랑하면서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결단력, 그리고 선택에 따른 결과를 책임질 준비와 같은 요소들 말이다. 사마상여와 탁문군 역시 함께할 미래가 불투명하였으나 사랑을 위해 용기 내고 어려움을 같이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기에, 이들의 이야기가 그저 흔한 가난한 남성과 부유한 여성의 이야기로 평가받지 않고 2,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것이다.
--- 「사랑의 야반도주, 그 결말은? - 사마상여와 탁문군 이야기」 중에서
아사달, 아사녀, 주만의 사랑은 너무나 순진하여 일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계산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사랑이라는 점에서 미워하기 어렵다. 이들의 순수하고, 변함없고, 강직한 사랑은 어쩌면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비일상적’인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범상치 않고, 초월적이며 영웅적인 사랑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 「사랑의 여러 모양 - 현진건의 『무영탑』에 담긴 사랑 이야기들」 중에서
루쉰이 원하는 것은 ‘대화 상대’였는데, 주안은 무조건 맞장구치면서 아는 척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루쉰의 이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안은 남편을 잘 섬기고 시어머니께 효도하면 언젠가는 남편이 잘못을 깨닫고 자신을 돌아봐 줄 거라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 루쉰도 주안이 자신과 어머니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동정하고 경제적으로 부양할 수는 있지만,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 「사랑 없는 결혼의 비극 - 루쉰과 주안의 잘못된 만남」 중에서
십 대의 사랑은 아직 여러모로 성숙하지 않아 위태롭고 때론 불나방같이 무모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가능한 순수함과 풋풋함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 시기에 겪는 첫사랑은 흔히 덜 익은 풋사과에 비유되곤 한다. 상큼하고 달달하면서도 시큼하고 떫은맛을 지닌 작은 초록색 풋사과 말이다. 풋내기들의 풋사랑은 대부분 그 ‘설익음’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 먹먹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 「산골 마을 십 대들의 잔잔하고도 가슴 먹먹한 사랑 이야기 - 선충원의 『변성」 중에서
에로스는 신화는 물론 문학과 철학의 단골 소재였고 에로스에 대해 희랍인들이 부여한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헤시오도스로 대표되는 희랍의 여러 창세 신화들 속에서 그것은 생성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어떤 근원적인 에너지로 묘사된다. 또 플라톤은 우리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진 성욕이라는 형태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수행하는 역할과 의의에 대해 철학적 고찰을 시도하면서, 그것이 필멸자인 우리 인간이 불멸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이를 통해 좋음의 영구적 소유를 최대한 달성케 함으로써 인간이 행복에 다가설 수 있도록 돕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에로스도 반드시 좋은 것이기만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과도하다면 나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로스가 인간에게 파멸을 가져오고 불행한 삶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을 최대한 완성시키고 행복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 「에로스가 가져오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 중에서
희랍에는 에로스와 함께 사랑으로 불리는 또 다른 이름의 사랑이 있다. 필리아Philia가 그것이다. 에로스는 육체적·성적 사랑이고 그것을 향한 욕구로서 마치 불꽃처럼 짧은 시간 동안 타오르며 자기를 반복해서 소진한다. 에로스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예는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연인들의 사랑이다. 반면에 필리아는 육체적 관계에 대한 갈망인 ‘성욕’을 배제한 정신적인 사랑인데, 이것은 우리의 ‘정情’과도 닮은 데가 있어서, 함께 지낸 시간에 비례하여 더 커지거나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필리아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 사례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지만, 형제나 친구들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표현할 때에도 쓰인다. 이처럼 필리아가 여러 맥락에서 사용되는 까닭에, 모든 문맥에서 필리아를 대신할 수 있는 단일한 우리말을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필리아는 상황에 따라서 ‘친애’, ‘우정’, ‘애정’, ‘사랑’ 등 다양한 이름으로 옮길 수 있다.
--- 「필리아를 위한 안티고네의 숭고한 투쟁 -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중에서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다. 마치 강물의 신의 딸 다프네와 태양의 신 아폴로가 상극이듯이. 그러나 상극인 불과 물이 조화를 이뤄 생명을 탄생시키듯이, 쿠피도의 사랑의 화살도 뜻밖의 커플을 엮어 주었다. 비록 그 사랑이 이뤄질 수 없는 절절한 첫사랑이나 피할 수 없는 속박으로 남을지라도, 그 안에는 다프네의 모습과 아폴로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창조적 힘이 내재했다. 결국 연애 시인인 오비디우스의 세상을 동적이고 변화무쌍하게 만든 원동력은 만물을 정복하고 무릎 꿇리는 사랑이었다.
--- 「알파남의 첫사랑 - 아폴로와 다프네의 변신 이야기」 중에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사이의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 사랑의 진정성임을 배우게 된다. 모든 사람은 이성의 외모, 학력, 재산, 재능에 끌리기 마련이다. 이 사실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외모가 일그러지고, 학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재산을 잃고, 재능이 빛을 바랬다고 해도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엘로이즈는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아벨라르 그 사람만을 사랑하였다. 결혼을 한낱 거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법적, 형식적 관계가 결혼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지만, 엘로이즈와 아벨라르는 진정 사랑하는이들 사이에 견지해야 할 진정성, 진실성이라는 덕목을 몸소 가르쳐 주고 있다.
--- 「중세의 아름다운 스캔들 -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영원한 사랑」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 단테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두 커플은 지옥과 천국이라는 넘어설 수 없는 공간에 머물고 있지만 모두 성스러운 사랑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이 애초부터 육욕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면 둘 사이의 사랑은 고귀한 사랑이고,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사이의 사랑은 육욕적인 사랑이라는 이분법으로 두 커플을 단순 비교하면 사랑의 본질에 대한 단테의 생각을 읽어 내지 못한 것이다. 글 서두에서 『신곡』 안의 나무들은 숲 전체에서 조망해 보아야 한다고 적었다.
--- 「천국과 지옥에서 꽃피운 사랑 - 단테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중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하나지만, 사랑의 모습은 여럿이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각자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듯이, 사랑의 모습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삶의 모습의 숫자만큼 여럿이다. 사실 사랑을 미리 정의할 이유도 없고 앞서 규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과 똑 닮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
거든 아름답게 살 일이다.
--- 「사랑의 모습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