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밤이 이슥하다.
문을 잠시 열어보니, 저녁 무렵부터 내린 빗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오고, 바람에 호롱불은 제멋대로 흔들렸다.
새해 벽두부터 청승맞게 비가 내린다.
올해는 또 무슨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중략)
무자년, 쥐의 해로 오가사와라에서 두 번째 맞는 새해 첫날이었다.
(중략)
오후에 도청 직원들과 바둑, 서예를 가르치며 알고 지내는 주민들의 방문을 받았고, 그 후 이윤과와 바닷가에 나가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에서 회색빛 바다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물새들은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는지 분주히 파도 위를 낮게 날아다녔으나, 나는 작은 섬 너머의 조선 쪽을 바라보며 온갖 착잡한 마음에 젖어야만 했다.
진중한 성격의 이윤과도 오늘따라 감회가 새로운지, 바다를 향한 시선을 오랫동안 거두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란히 걷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하늘을 보며 웃었고, 그는 땅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서로 말은 없었으나, 이심전심이었으리라.
웃는 수밖에 없었다.
설날에 울어서야 되겠는가.
-본문 중에서-
제가 김옥균 선생의 일기임을 처음 안 순간은, 정말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그동안 막연하게 서예에 능하셨던 분이라 시 등의 휘호라고 추측만 했었을 뿐, 마음속 감정의 흐름까지 포함된 일본생활의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선생께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자초지종을 쓰신 걸로 알려진 갑신일록(甲申日錄)의 진위여부가 근래 들어 논란이 된 바 있기에,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일기에는 노와일기(露臥日記)란 제호가 붙어 있었으며, 아마도 선생 스스로가 비나 이슬을 가릴 수 없는 야지에서 그대로 누워있는 처지나 마찬가지라 비유해서 지었다고 사료됩니다.
저는 그 노와일기를 며칠간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읽었습니다.
삼일천하만이 아니라 실패로 끝난 한 남자의 슬픈 인생 여정과 그러면서도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열정을 실감 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19세기 후반의 일본 변방을 떠돈 행적을 보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중략)
그리스 신화 속에 이카로스 이야기가 있죠.
무모하게도 죽음이란 현실마저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의 꿈만을 추구하며, 날개를 만들어 달고 끝없이 태양을 향해 날아가려 했다는 이카로스… 그 이카로스와 닮은꼴로 정치가를 하기에는 너무 순진하리만큼 강렬했던 조국애와 마지막까지 소유했던 꽃빗을 보며 문득, 김옥균 선생은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이상주의자였으리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롯코 산에서 내려올 때는 하늘에 별이 총총히 뜬, 밤이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노와일기는 비록 망명생활 절반의 자취이고, 그 중간 중간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공백의 기간이 여러 날 있으나 결코 적지 않은 분량입니다. 그래서 저 나름대로 선생의 심중이 진하게 내재 되어 있는 내용을 위주로 간추려 보았고, 다시 그것을 연도, 지역별로 선별하여 보내드립니다. 일기 전문은 차후 일반에게 공개된 연후에도 소상히 읽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1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꿈이 무너진 참담한 현실 속에서 할 말도 많았을 망명 초기 반년 간의 김옥균 선생에게로 우선 가보시죠.
아무쪼록 향수 어린 노와일기와 함께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라며, 읽으시는 대로 회신 바랍니다.
-본문 중에서-
우리는 명성황후와 동시대를 살았던 김옥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또 김옥균의 갑신정변에 관하여 무엇을 알고 있나.
누구나 쉽게 개혁을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중앙정치권에서 최초로 근대적 개혁을 시도한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김옥균의 삼일천하에 얽힌 실패만 알 뿐… 김옥균이 지향했던 부강한 자주 독립국가를 이루고자한 정치적인 꿈, 조국애와 한 인간으로서의 가족 사랑을 모른다.
보고 즐기는 여행도 일주일만 홀로 다니면 외로움이 절로 찾아오는데, 하물며 믿고 망명간 일본 땅에서조차 이리저리 내몰려야 했던 김옥균의 고독과 울분, 비통함은 더욱이 알지 못한다.
극일, 반일, 지일, 친일, 용일… 혼란스러울 정도로 숱한 대처방안을 내놓지만, 결론 내리기가 쉽지 않은 일본과, 지금까지도 큰집 행세를 하려들며 당당하게 역사마저 바꾸려 하는 중국 사이에 한국이 있다.
조선이란 나라의 종말은 어떻게 왔나.
일본과 중국은 한국에게 어떤 나라인가.
한국이 나갈 길은 무엇인가.
그 중심에 여전히 김옥균이 있다.
오늘날의 한국은 정치가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도, 진보와 보수 쪽으로 나뉘어 진 대립 속에서 국론마저 분열되는 정황을 보인다.
이 책을 통하여 새로이 가지려는 자와 이미 가진 자의 저급한 싸움이 아닌 국민과 나라를 위한 진정한 진보와 보수 및 개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에 대하여 희망과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김옥균의 모습이 쉽게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좌절하고 마는 대다수 현대인에게 자극도 되었으면 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