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마시마. 그리고 그놈, 아니 정태제가 오면 너는 저쪽 테이블에 가 있거라.”
“예. 근데 어머니…….”
“싫은 소리 하려는 거 아니야. 네 덕에 깨달은 게 많았다. 그러니 너무 염려 말아라.”
“……네.”
며칠 전 요리조리 뛰어난 언변으로 저를 구워삶던 주형이 오늘은 다른 사람 모양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박 여사는 그런 주형을 달래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태제가 와서 하는 얘기들을 들으면 알게 될 것이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십 분이 채 되기도 전에 태제가 숨을 헐떡이며 2층으로 올라왔다. 그것을 본 주형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커피를 든 채, 옆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태제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박 여사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서두를 것까지는 없었는데……. 앉아요.”
“예.”
태제가 자리에 앉았다. 박 여사는 만난 후 처음으로 꼼꼼하게 태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태제는 박 여사의 눈길을 느낀 모양인지 슬쩍 시선을 비켜주었다. 그 덕에 박 여사는 제 딸이 사랑한다는, 또 제 딸을 사랑한다는 남자의 모습을 오래도록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 보영이, 아끼는가요?”
“예. 고운 사람이고, 맑은 사람입니다. 보영 씨가 그 모습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아끼는 사람에게 힘든 길을 가도록 강요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제가 어떻게 그 생각을 안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제 처지가 일반 사람들하고 많이 다르다는 거, 보영 씨가 제게 있어 과분한 사람이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보영 씨는 저보다 훨씬 나은 조건의 사람을 만나 사랑받고 살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니까요.”
“하면 왜…….”
“상대가 아무리 사랑을 준다 해도 보영 씨가 그 사랑을 원치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보영 씨를 위하는 일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보영 씨가 저를, 또 저의 사랑을 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처지 때문에 먼저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보영 씨가 내미는 손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도 보영 씨를 원하고 있었으니까요.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거 어머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욕심이라는 거 알면서도 그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머님께 큰 상심을 안겨드릴지 알면서도 말입니다.”
더 이상 시선을 비끼지 않고 박 여사를 응시하는 태제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보영의 손을 잡기까지 그가 겪었을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눈동자를 박 여사는 계속해서 바라보기가 힘이 들었다.
“보영이와 정태제 씨 마음이 하나라는 것은 알겠지만, 어미가 되고 보니 그것 말고도 살펴야 할 것이 많네요.”
“어머님께서 마음 놓이시지 않으리란 거 압니다.”
“내가…… 조금 더 정태제 씨를 지켜보고 싶은데, 괜찮겠어요?”
“어머님!”
단박에 얼굴 가득 활기가 올라오는 태제가 고맙기도 하고 얄밉기도 한 박 여사는 부러 새치름하게 눈을 내리깐 채 쐐기를 박았다.
“너무 감격해하지 말아요. 지금 허락하겠다는 말이 아니니까.”
“알고 있습니다.”
“정말 보영이에 대한 마음이 진실 된 것인지, 내가 믿고 딸을 보내도 될 만한 사람인지 지켜보겠어요. 대신 나도 정태제 씨가 가진 주변 상황이 아닌, 사람 자체를 볼 수 있는 눈을 키우도록 노력하죠.”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님!”
그저 지켜보겠다는 말인데도 감격에 겨워 대답하는 태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박 여사는 자신의 결정이 그리 틀린 것이 아니기를 빌었다.
“그동안 섭섭했을 거예요.”
“아닙니다. 어머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지요. 그것을 섭섭하게 여긴다면 제가 정말 나쁜 놈입니다. 오히려 어머님께서 더 화를 내시지 않아 당황스러웠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훗, 그런 줄 알았으면 좀 퍼부어줄걸 그랬나 보네요.”
밝은 웃음은 아니지만, 태제 앞에서 미소 비슷한 것을 지을 수 있다니 박 여사는 사람 생각이란 것이 정말 무섭구나 싶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죽일 놈, 살릴 놈 하던 사람인데 말이다.
“어린아이들도 아닌데, 악다구니 쓰면 뭐하겠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헤어질 사람 같았으면 내가 쓰는 인상 하나에도 나가떨어졌을 거예요.”
“저 어머님께, 또 보영 씨에게 잘할 자신 있습니다. 지켜봐주시면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믿어보도록 하죠.”
말을 마친 박 여사는 옆 테이블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주형을 데리고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가게 앞까지 따라 나온 태제가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지만, 박 여사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다음에 그렇게 해요. 오늘은 좀 걷고 싶네요.”
“예,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태제의 인사를 받은 박 여사가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고 박 여사는 그 저리에 멈춰 섰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거의 울먹이기까지 하는 태제의 목소리에 박 여사는 가만히 미소 지었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박 여사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주형이 다가와 얼른 팔짱을 꼈다. 그리고 상기된 얼굴로 흥분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머니, 오늘 정말 멋진 거 아시죠?”
“멋있으라고 한 거 아니다.”
“에이, 알죠. 근데 오늘 어머니 요새 애들 말로 진짜 쿨하셨어요. 이야, 이런 건 진짜 라디오에 사연 보내서 상품 받아야 하는 건데.”
곁에 붙어 재잘거리는 주형의 말을 들으며 걷는 박 여사의 얼굴도 홀가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태제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건에 가려 사람을 보지 않으려 했던 저를 버리니 청명하게 맑은 겨울 하늘이 한 뼘은 가까워진 듯했다.
“어머니, 제가 오늘 점심 사드릴까요?”
“네가 무슨 돈으로?”
“에이, 어머님이 모르시나 본데요. 요즘 번역계에 떠오르는 블루칩이 또 이 윤주형이라는 거 아닙니까. 제가 오늘 전주에서 제일 잘하는 비빔밥 한 그릇 쏠게요.”
“됐어, 집으로 가자.”
“제가 모주까지 쏠 테니까 가요, 어머니. 예?”
팔을 흔들며 늘어지는 모양이 귀여워 박 여사는 못 이기는 체 주형을 따랐다. 어쩌면 제가 지켜보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당장 보영에게 뛰어갈 태제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