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두 아버지
도혜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시댁에서의 생활이 많이 힘드셨어요?
쌍리 남편과 시숙이 벌인 사업이 망해서 재산 다 날리고, 살림이 말이 아니었지. 십 년 넘게 빚 갚으면서 고생하던 때였어. 임종을 몬하고 나니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론 한 번이라도 아부지한테 나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속이라도 좀 후련했을 것을 싶었지. 딱 한 번 아부지한테 쏘아댄 적이 있어. 시댁으로 나를 찾아온 아부지에게 뭐할라꼬 왔냐고, 이런 데 시집보낼라고 나를 낳았냐고 했지. 지금은 내가 좀더 잘해드리지 몬한 거가 맘에 남고, 내를 공부 안 시킨 것도 어쩌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부지가 그립고 감사한 마음뿐이야.
도혜 빚 때문에 꽤 긴 세월을 고생하던 시절인데도, 내가 잘되는 것을 보여드리겠다는 의지가 강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무슨 일을 어떻게 도모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어요?
쌍리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것도 아니었지. 우리 시아부지가 나를 잘 가르쳐주셨어. 그래야 냉중에 해나갈 거라고 생각하신 건지. 지금 생각하면 아부지는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나를 키우신 것 같애. 농사지어서 자기 식구 입치레하는 것이 아니고, 온 동네가 다 같이 잘사는 법, 좋은 것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롭게 쓰는 것을 생각하시던 분이었어. 자연히 나도 생각하는 크기가 달라졌지. 시아부지 뜻을 이어야 한다는 게 늘 머릿속에 있었어. 일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부모 없이 자란 당신의 어린 시절 설움과 일본에서 탄광 일 할 때의 고생담 같은 온갖 속내 이야기를 내게 다 하셨지._30~31쪽
2장 눈물과 매화
“여기는 사람이 없어, 너무너무 외로워서 도저히 몬 살아. 이 산속에서 물 길러 갈라면 항아리 끼고 꼬불꼬불 가도가도 끝이 없어. 빈 항아리만 해도 너무너무 무거워. 머리에 이고 오는데 건득건득하다 물은 전부 앞에고 뒤에고 쏟고, 다후다 치마는 버스럭버스럭 소리가 날 정도로 젖어가, 눈물인지 쏟아진 물인지 뒤섞여 엉망이 돼가꼬 주저앉았어. 항아리를 바윗돌 위에 올려놓는데, 돌 사이 양지바른 데 매화 한 송이가 나풀나풀하고 있어. 근데 꽃이 나를 보고 엄마, 울지 말고 나랑 같이 살아, 하는 것 같은 거야. 그 꽃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하더라고. 울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 섬진강 위에 새벽안개가 솜이불 덮어놓은 것 같고 그 뒤에 지리산이 감싸고 있네. 내가 여기서 오늘 살다가 내일 도망을 가더라도, 이 아름다운 곳에 꽃 천국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불러들이자, 그럼 안 외로울 것 아닌가, 이런 맘이 들더라고.
처녀 때 진해 벚꽃장에 놀러갔던 게 생각난 거지. 옛날에는 버스에 다 뚜드려 밀어였는다 아이가, 안에서 찡겨 죽든가 말든가, 차장도 올라붙어가 땀이 나가지고 버스 안에서 목욕을 다 해삐려. 근데 가보면 별거 아니라. 그냥 꽃이 피어 있는 거야. 해군기지 앞에 요렇게 있는 평지에 사람이 바글바글하는데. 4월달이었지. 근데 여기 와 보니 세상에, 설 쇠고 바로 눈 속에서도 꽃이 피더라고. 2월 설중매를 처음 봤지. 벚꽃은 봤어도 겨울에 핀 매화는 여기 와서 처음 봤는데 너무 아름다운 거야. 너무 예쁜 이 꽃을 보러 진해 벚꽃장 만치만 와라…”_53쪽
3장 장사를 잘하는 여자
도혜 닭백숙 장사와 김치 장사는 어떻게 해서 시작하셨어요? 부산 시절엔 도매상에서 판매를 맡아 하셨지만, 음식을 직접 만들고 파는 것은 더 큰 일이었을 텐데요.
쌍리 시장에 가서 장사하는 것은 해봤으니 겁이 안 났지. 내가 우리 친정 엄마를 닮았는지 손맛이 꽤 있었거든.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어. 김치 장사는 1986년인가, 광양시에 나가서 했었고, 백숙은 그 담에 우리 집에서 했지. 한창 광양이 개발되면서 제철소 생기고 그럴 때, 시장에 가서 장사하는 자리를 뽑았는데 내가 제일 좋은 자리를 뽑았어. 비싼 이자를 계속 갚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돈을 좀 벌어보려고 시작을 했지. 거기서 오랫동안 장사한 상인들이 많고 단골손님들도 다 있는데, 새로 나타난 내 물건을 누가 사겠노. 우리 밤이랑 감이랑, 여수에서 떼어온 건어물 이런 거 놓고 파는데 잘 안 되더라고. 다들 전라도 말 쓰는데 나만 경상도 말을 쓰잖아. 근데 광양제철엔 포항에서 일하다 온 사람들이 꽤 있었어. 그 사람들이 내 말을 듣더니 반가워하면서, 경상도 아지매니까 경상도 사람들 입맛에 맞는 김치를 담가서 팔면 좋지 않겠냐고 해. 자기들이 와서 사먹을 테니까 해보라고. 내가 김치 양념을 어떻게 했냐면, 맛있는 걸 열 가지쯤 넣었지. 펄떡펄떡 뛰는 생새우는 제일 작은 것을 김치 담기 일주일 전에 사서 소금 간을 약하게 해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써. 소금은 5년 묵혀 간수 뺀 것으로 하고. 참조기는 여수에서 나는 샛노랗고 작은 것을 머리만 떼고 통째로 갈아서 썼어. 육수는 멸치, 디포리, 무 넣고 푹 끓여서 만들고. 그리고 찹쌀 풀, 매실, 청각, 갈치속젓, 멸치액젓도 들어가제._98~99쪽
4장 꽃의 노래, 나의 노래
홍쌍리는 시집와서 맨 처음 산에 가 땅을 파보고 깜짝 놀랐다. 땅속에 들어앉아 있는 돌이 전부 모나고 거칠었던 것이다. 어릴 때 밀양에서 본 돌과 영 달랐다. 언니, 오빠와 배 타고 강에서 놀 때 주워서 만지작거렸던 돌은 동그랗고 매끄러웠다. 그때는 모난 돌들이 보드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겪어야 했는지 잘 몰랐다.
말이 달라서 더 그랬을까, 깊은 산골마을의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는데, 부산 아가씨 눈에 들어온 잘 아는 얼굴들이 있었다. 꽃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마당 한가득 심어놓고 가꾸시던 꽃. 벚꽃 가지 꺾어다 방에 꽂아두고 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처음 보는 야생화들도 하나둘 이름을 알게 됐다. 힘들고 눈물이 날 때마다 산에 올라가서 혼자 서러움을 달래다 보니, 어느 날 꽃, 나무, 새, 강물 이런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못 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홍쌍리는 밤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글짓기를 잘하긴 했지만, 부산에서 살 땐 이토록 절박하게 글쓰기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재미삼아 친구들 연애편지나 대필해주는 정도였다.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잠 잘 시간도 부족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그냥 없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누구와도 나누지 못한 마음을 어딘가에는 담아두고 싶었다. 그날 겪은 힘든 일, 하고팠지만 못 한 말을 쓰면서 울었고, 써놓고 읽어보면서 또 울었다. 그
렇게 자신의 속내를 풀어쓰기도 했지만, 새로 눈 뜬 사람처럼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의 교감도 노래했다._117~118쪽
5장 인간 불도저
도혜 시아버지께는 매실을 약으로 쓰는 것을 배우셨는데, 매실로 반찬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하셨어요?
쌍리 어느 날, 밭 매다 흙범벅된 손으로 나무에서 잘 익은 매실을 만지다 으깨졌는데, 때가 말끔히 없어지는 거야.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삼발이에 올려놓고 불 피고 쓰느라 까매진 냄비 궁뎅이에 매실을 묻혀서 비닐봉지에 담아 햇볕에 엎어 놔둬 봤어. 며칠 지나니 깨끗해져 있더라고. 이 매실이 자꾸 나를 미치게 하는 거야. 또 기름기 많은 거 있잖아. 참기름이나 들기름 발라서 부침 해먹은 솥은 짚이랑 재를 가지고 씻는데, 매실을 절구에 빻아서 천에 묻혀 가지고 닦아보니 깨끗이 지더라고. 가만 보니까 정말로 이게 배 속 청소부가 되겠네 싶더라고. 그럼 아플 때 약으로만 먹을 게 아니라 어떻게든 밥상에 올려야 매일매일 먹을 게 아이가. 그래서 궁리해낸 게 장아찌야. 장아찌를 만들어보려는데 어찌해도 잘 안됐어. 시어매는 그걸 누가 먹는다고 자꾸 헛짓을 하냐고 안 좋은 소리 하시는데 나는 몰래몰래 계속 했지. 어떻게든 매실을 밥상에 올리는 게 내 1차 목표였어.
… 냉장고도 없던 그 시절에, 김치가 정말 짰어. 짠 게 그리 몸에 나쁘다면 울 동네 사람들이 왜 전부 여든, 아흔 살까지 살겠노 싶더라고. 나는 소금에 대해서 궁리를 했제. 1년짜리부터 7년짜리까지 다 실험을 해보니 매실 장아찌에는 5년짜리가 딱 알맞은 것 같았어. 소금에서 간수를 5년 빼면 손에 쥐어도 소금이 안 붙고, 짜면서도 단맛이 같이 나. 비닐 장판 말고 뻘 밭에서 만든 소금이 제일 좋은 거고. 소금을 많이 넣으니 장아찌가 꼬들꼬들하니 좋기는 좋은데 뭔가 아쉬운 기라. 설탕을 함께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설탕이 귀했지. 나는 부산에서 설탕을 먹다가 왔지만 산골에는 설탕이 거의 없었어. 근데 아부지가 누룽지 드실 때 설탕을 넣어 드시거든. 아부지 방에 두고 아무도 손 못 대는 그 설탕을 쪼깨 훔쳐나와가꼬 장아찌에 넣어보니 쪼글쪼글하니 장아찌가 잘 되는 거야. 오, 잘 되네, 나는 속으로 소리쳤지._170~172쪽
6장 일하는 여왕벌
홍쌍리는 남들의 걱정을 모르는 게 아니다. 연구개발비를 포함한 고정비용에 대해서는 직원들과 늘 협의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빠르고 쉬운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관광농원으로 지정받으면 지원금도 받을 수 있고 시설물을 짓거나 개발할 때 허가를 내지 않아도 된다. 청매실농원 정도면 자격이 충분하다고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지원금도 투자금도 원하지 않았다. “내게 돈을 줄 때는 뭔가 얻어가려고 하는 것이 있을 텐데, 내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수익을 내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 돈을 받을 수가 없다 아이가. 예를 들면 나는 여기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입장료 받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 느리게 가더라도 내 생각대로 가고 싶어.” 농원을 취재하러 온 영국과 프랑스 언론인들이 “이곳은 농원이 아니라 아름다운 공원”이라며 감탄했지만, 그의 포부는 더 크다. 단지 겉모습만 예쁜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찾아와서 가슴의 찌꺼기를 버리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도록 인간이 만든 것을 더하고, 따뜻한 인심으로 오래오래 감동을 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가꿔놓으니, 영화나 드라마를 찍게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그는 언제나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취화선〉 〈다모〉 〈바람의 파이터〉 〈흑수선〉 〈봄의 왈츠〉 같은 많은 작품이 농원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농원 한쪽에 자리한 초가집은 〈천년학〉을 찍을 때 지은 오픈세트였다. 촬영 뒤 철거하지 않고, 꽤 큰돈을 들여 정말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으로 완성한 것이다._220~221쪽
7장 사람아, 사람아
도혜 조용한 산속에서 동네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서 지내던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 건데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정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점이라면 어떤 게 있었을까요?
쌍리 농원을 비우고 서울에 가는 일이 많아졌는데, 나는 흙을 만지고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이 깨지는 사람이더라고. 여기 시집와 30년을 살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된 거야. 떠나본 적이 없으니 그런 줄도 몰랐었지. 텔레비전과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고 신문, 잡지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됐는데, 너무 알려지니 안 좋은 거 같아. 같이 사진 찍어달라면 찍어주고, 그런 거는 할 수 있는 거고 고마운 마음으로 다 해드렸지만, 너무나 많은 곳에서 연락이 오니까 일이 복잡해지더라고. 몇십 억을 투자하겠다는 사람, 나보고 이렇게 하면 더 잘될 거라는 사람, 하도 많으니까. 내가 중심을 잡지 않으면 청매실농원이 뒤흔들려 없어져버릴 것 같았어. ‘나를 그냥 농민으로 살게 내버려둬라. 나는 농민으로 살겠다.’ 어느 날 내가 마음속에서부터 이렇게 외치고 있더라고._239~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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