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냐고요?
엘리자베스 베럿 브라우닝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냐고요? 헤아려 볼게요.
그대를 사랑해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완벽한 존재와 궁극의 아름다움을 더듬어 찾을 때
내 영혼이 닿을 수 있을 만큼 깊고 넓고 높게.
그대를 사랑해요 매일의 삶에서 낮이나 밤이나
한없이 고요한 가운데 필요로 할 만큼.
그대를 사랑해요 권리를 위해 투쟁하듯 자유롭게.
그대를 사랑해요 칭송을 외면하고 돌아서듯 순수하게.
그대를 사랑해요 옛 슬픔에 쏟았던 열정과
어린 시절에 품었던 믿음으로.
그대를 사랑해요 성자들을 잃을 때
함께 잃어버린 것 같은 사랑으로. 내 평생의 숨결과 미소와
눈물을 담아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늘이 허락하신다면
내 삶이 끝난 후 더욱 그대를 사랑하겠어요.
봄의 문턱 3월, 봄바람, 봄 햇살과 잘 어울리는 사랑시로 첫 글을 시작합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엘리자베스 베럿 브라우닝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냐고요?」입니다. 이 시는 ‘사랑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유명하지요. 오래전 교육방송 EBS의 [지식채널 e]에서는 시 못지않게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엘리자베스와 로버트 브라우닝,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방영하기도 하였지요. 마지막에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가 엔딩 크레딧처럼 화면에 가득하던 장면을 기억합니다.
Save apart time to read / it's the spring of wisdom.
Save apart time to laugh / it's the music of your soul.
Save apart time to love / for your life is too short.
책 읽을 시간을 남겨 두세요 / 독서는 지혜의 샘이니까요.
웃을 시간을 남겨 두세요 / 웃음은 영혼의 음악이랍니다.
사랑할 시간을 남겨 두세요 / 인생은 너무 짧으니까요.
엘리자베스와 브라우닝보다 금언 같은 이 시의 내용을 더 잘 살아낸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냐고요?」는 엘리자베스가 브라우닝을 만난 후인 1845년에서 1846년 사이에 쓰고, 1850년에 출판된 『포르투갈 사람이 쓴 소네트』Sonnets from the Portuguese에 실린 44편의 소네트 중 43번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좀 이상하지요? 왜 포르투갈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시집의 제목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우리가 이 시를 만나지 못할 뻔했다는 것부터 먼저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소네트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너무 직설적으로 담고 있다는 이유로 출판을 망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때 엘리자베스 곁에 로버트 브라우닝이 있었어요. 그는 이 시들이야말로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소네트”라 극찬하며 강력하게 출판을 권했다 합니다. 다만, 두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 너무 분명해 보이니 어디 다른 나라 소네트를 번역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제목을 저렇게 지었답니다. 왜 포르투갈일까요? 엘리자베스가 포르투갈의 한 시인을 존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분명한 이유는 로버트 브라우닝이 엘리자베스를 “나의 귀여운 포르투갈 여인”이라 불렀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소네트란 ‘14행의 사랑시’라고 정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정형시인데요, 14세기 무렵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5세기에 영국에 도입되었지요. 엘리자베스와 브라우닝,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소네트야말로 ‘14행의 사랑시’라는 정의에 아주 정확하게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자기보다 연상인데다 시인으로서 명성도 훨씬 더 높았던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얻고 그녀의 시의 진정한 가치 또한 알아본 브라우닝, 그는 사랑의 눈뿐 아니라 시를 보는 눈도 탁월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두 눈 다 부러운 눈입니다. 이제부터 바로 그 시를 찬찬히 보아 가면서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도, 브라우닝과의 사랑 이야기도 들려드리겠습니다.
나 사랑해? 얼마나 사랑해?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아니 수도 없이 하고 또 듣고 했을 질문이지요. 꼭 집어 답하기 어렵고 만족스러운 답 듣기 쉽지 않은 질문이기도 하고요. 하늘만큼 땅만큼 혹은 당신이 전부라니까, 뭐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도 하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분도 있겠지요?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헤아려 보겠답니다. 셈해 보겠답니다. 한번 들어볼까요?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냐고요? 헤아려 볼게요.
그대를 사랑해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존재와 이상적 아름다움의 궁극을 더듬어 찾을 때
내 영혼이 닿을 수 있을 만큼 깊고 넓고 높게.
넓고 크고 깊답니다, 자신의 사랑. 그런데 말입니다. 좀 애매해요. 보이지도 않는 영혼이라는 것이 역시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을 더듬어 “존재와 이상적 아름다움의 궁극”을 찾아갈 때처럼 그렇답니다. 얼마나 깊고 넓고 높으면 영혼이 도달할 끝이라고 할까요. 존재의 끝이나 이상적 아름다움의 궁극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요? 이 말의 공간적 비유에 담긴 무한함이 사랑의 광대무변함을 두드러지게 드러냅니다. “궁극the ends”이라는 말에 담겨 도드라져 보이는 절대성과 순수함은 또 어떻고요. 사랑을 셈해 보겠다던 화자는 결국 자기 사랑의 셈할 수 없는 절대성, 순수함과 함께 그 엄청난 무한함을 먼저 툭 던져 보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아래로 훅 내려옵니다.
그대를 사랑해요 매일의 삶에서 낮이나 밤이나
한없이 고요한 가운데 필요로 할 만큼.
그대를 사랑해요 권리를 위해 투쟁하듯 자유롭게.
그대를 사랑해요 칭송을 외면하고 돌아서듯 순수하게.
끝없는 관념의 이상적 깊이와 넓이와 폭을 이야기하더니 이제 “매일의 삶의 필요”라는 현실로 쑥 내려옵니다. 비유의 낙폭이 크고 돌연합니다. “한없이 고요한 가운데 필요”한 것들, 무엇일까요.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일 다 아닐까요. 먹고 자고 숨 쉬고 하는 그 모든 일이 바로 그 ‘필요’이지요. 결국 목숨 붙어 움직이는 한은 단 한순간도 그대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는 것이겠지요. 가장 고귀하고 이상적인 관념의 수준으로 날아오르던 사랑의 비유가 가장 현실적인 차원의 수준으로 하강하더니 이제 그 사이에 하나하나 돌담 쌓아 올리듯 사랑을 헤아려 채우기 시작합니다.
먼저 “자유롭게, 순수하게” 사랑한다 합니다. 자유는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과 비유되고, 순수는 “칭송을 외면하고 돌아서는” 것과 연결됩니다. 권리를 위한 투쟁의 보편성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만 엘리자베스 가족사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가계家系는 서인도제도 자메이카에 터전을 잡고 있었고, 부친은 그곳에 대규모의 노예농장을 경영하는 것으로 부를 축적했지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 가족들은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노예농장은 여전히 그곳에서 운영했으며, 엘리자베스 엄마의 가계도 노예 매매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스물한 살에 이미 여권 운동가이자 시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를 읽고 열렬한 여권 옹호자가 되었지요. 그러할 뿐만 아니라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필그림에서 달아난 노예」와 「국가에 대한 저주」 같은 시를 발표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권리를 위해 투쟁하듯 자유롭게”라는 비유에 담긴 울림이 느껴집니다.
“칭송을 외면하고 돌아서듯 순수하게”라는 표현도 그녀의 실제 삶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로버트 브라우닝과의 비밀스러운 사랑과 결혼은 엘리자베스에게는 순탄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가족, 특히 아버지의 반대는 강력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두 사람의 비밀결혼 이후 엘리자베스의 상속권을 박탈합니다. 거기에 더해 자기 시집과 극본을 발표하면서 촉망받는 문단의 신예이긴 했지만, 아직 그녀만큼 유명세를 얻지 못했던 여섯 살 연하인 브라우닝이 이미 영국 문학을 대표할 만한 시인이었던 그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세간의 호기심과 의혹도 엘리자베스에게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녀의 앞선 명성에 기대려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 어린 시선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사랑하는 연인 브라우닝에게 자신의 사랑은 세상의 칭송과 명성은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자베스는 「소네트 14번」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지요.
If thou must love me, let it be for naught
Except for love's sake only....
But love me for love's sake, that evermore
Thou mayst love on, through love's eternity.
그대가 진정 날 사랑하시겠다면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오직 사랑만으로 사랑해 줘요, 긴긴 세월
영원한 사랑으로 그대 나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도록.
이어지는 사랑의 맹세를 따라가 봅니다.
그대를 사랑해요 옛 슬픔에 쏟았던 열정과
어린 시절에 품었던 믿음으로.
그대를 사랑해요 잃어버린 성자들과 함께
내가 잃어버린 것 같은 사랑으로.
살아오면서 겪었을 슬픔이 어디 한둘일까요. 특히 어린 시절부터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 만성적인 두통과 척추의 통증으로 시달리며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에서 진통제로 처방받은 아편과 약물을 상시 투여해야 했던 엘리자베스에게 그 슬픔이 얼마나 강렬했을지는 짐작이 되지요. “어린 시절에 품었던 믿음”처럼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어린 시절 성자들을 사랑하던 것과 같은 숭고한 종교적인 사랑으로, 그 이후 잃어버린 것 같았던 신성한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날 새벽에 다녀가던 산타클로스가 실은 새벽에 몰래 깬 아버지임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할 것 같던 한 신성한 존재가 사라지게 되잖아요. 그러기 전까지 산타클로스를 믿고 기다리던 어린아이의 마음, 그 믿음과 사랑. 그 사랑이 다시 찾아온 것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위에서 말하는 엘리자베스의 마음과 비슷할까요?
엘리자베스가 어린 시절부터 깊은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녀는 일찍이 밀턴의 『실낙원』과 단테의 『지옥』 등을 읽었으며, “기독교야말로 본질적으로 시다. 영광스러운 시다”라고 말할 정도로 종교적 태도가 확고했지요. 그래서 그녀의 시에는 이 장면처럼 종교적 비유와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지요. 이제 사랑의 헤아림은 마지막에 이르렀군요.
내 평생의 숨결과 미소와
눈물을 담아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늘이 허락하신다면,
내 삶이 끝난 후 더욱 그대를 사랑하겠어요.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존재하는 모든 순간이 다 담겨있군요. 슬픔과 기쁨, 그리고 목숨까지.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해 사랑한다는 말이군요. 부럽군요. 그토록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확고하고 순수한 사랑이 죽음이 온다고 해서 달라질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시인은 죽음까지도 이기지 못할, 영원한 사랑을 말합니다. “하늘이 허락하신다면”이라는 전제는 있긴 합니다만, “삶이 끝난 후 더욱 그대를 사랑하겠”다 합니다.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죽음조차도 갈라놓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이군요. 이쯤 되면 이 사랑, 무엇으로 막을까요.
마지막 표현의 영어 원문을 잠깐 보면, “I shall but love thee better after death.”입니다. 조동사 ‘shall’에 주목합니다. 말하는 시인의 의지가 강하게 개입된 ‘will’이 아닙니다. ‘shall’입니다. ‘shall’은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그리되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치 당연히 예정된 운명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앞에서 언급했던 그런 현실의 사랑은 죽음 이후에는 운명처럼 그대로 이어지겠다는 것이지요.
애초 ‘셈’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이 정도의 답을 들을 수 있다면 눈 딱 감고 한 번, 아니 몇 번이라도 물어봄 직하지 않을까요? “그대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이쯤 되니 또 궁금해집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브라우닝은 어땠을지, 또 이런 사랑으로 결합한 두 사람은 행복했을지.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은 영시 해설의 다른 자리에서 그의 시와 함께 다루게 될 것이니 그때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요 여기서는 먼저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와 그녀에게 보낸 시를 한 편 보겠습니다. 1844년에 발간된 그녀의 『시』Poems를 본 브라우닝은 1845년 1월 10일에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미스 베럿, 저는 당신의 시를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당신의 시에 보이는) 신선하면서도 낯선 음악, 유려한 언어, 연민을 자아내는 절묘한 감정, 진정 새롭고 당당한 사고를 요....저는 당신의 이 시집을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편지를 보낸 4개월 후인 5월에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강한 사랑을 느끼며 작품에 관한 생각을 나누는 가운데 비밀스러운 사랑을 키워갑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의 시 창작에도 큰 영향을 미치면서 엘리자베스는 『시』의 개정판을 내면서 『포르투갈 사람이 쓴 소네트』를 더하고 『오로라 리』Aurora Leigh의 작품들을 쓰며, 브라우닝은 『남과 여』Men and Women를 출간합니다. 사랑의 열정이 창작의 결실로 이어진 것이었지요.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브라우닝의 청혼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앓아온 자신의 병 때문이었지요. 그런 엘리자베스에게 브라우닝은 이런 시로 자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고백합니다.
You'll Love Me Yet
Robert Browning
You'll love me yet!--and I can tarry
Your love's protracted growing:
June rear'd that bunch of flowers you carry,
From seeds of April's sowing.
I plant a heartful now: some seed
At least is sure to strike,
And yield--what you'll not pluck indeed,
Not love, but, may be, like.
You'll look at least on love's remains,
A grave's one violet:
Your look?--that pays a thousand pains.
What's death? You'll love me yet!
언젠가 그대가 저를 사랑해 주시겠지요
로버트 브라우닝
언젠가 그대가 저를 사랑해 주시겠지요! 저는 기다릴 수 있답니다.
천천히 자라는 그대 사랑을.
그대가 안고 있는 꽃다발도
4월에 뿌린 씨앗을 6월이 길러낸 것이랍니다.
제 진심 어린 마음을 심습니다.
제 마음의 씨앗 몇은 깊은 뿌리를 내려
결실을 얻겠지요--그대, 뽑아버리시진 않겠지요,
사랑, 혹은 그 비슷한 것이라도.
그대 마침내 사랑의 흔적을 보게 되겠지요,
무덤가에 핀 한 송이 제비꽃을.
당신이 봐주신다고요? 하면 무수한 고통이라도 사라지겠지요
죽음이 뭐란 말입니까? 언젠가 그대가 저를 사랑해 주실 텐데요!
이렇게 마음을 표현하는데 외면할 수 있을까요. 죽을 때까지라도 기다린다고, 무덤가에 핀 한 송이 제비꽃이 되어서라도 사랑하겠다는데. 그렇게 맺어진 두 사람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중략)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