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3시쯤 되었을까, 아직 주변은 어둡고 바람과 눈발이 심하지만 오르기 시작한다. 꽉 끼는 피레Fire는 딱딱하게 얼어붙어 신을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운동화로 눈이 붙은 5.8 정도의 페이스에 덤볐다. 하지만 미끄러워서 오를 수가 없다. 스카이훅skyhook, 피시훅fishhook 따위를 써서 눈이 붙은 10미터 페이스를 돌파한다.
나머지는 5.10 한 피치뿐이다. 그곳은 맹렬한 폭포로 변해 있었다. 비가 순식간에 이 피치에 집중되고 있다. 몸이 몹시 추웠지만 20미터 정도 위로는 이제 능선인 모양이다. 정신을 집중해 폭포 안으로 파고든다. 얼음물을 맞아가면서 프렌드를 갈아끼우며 전진. 능선까지 앞으로 5미터. 그때 갑자기 메인 로프가 올라오지 않는다. 젠장, 추워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다!
필사적으로 메인 로프를 떼어내고 백 로프back rope로만 눈이 붙은 벽을 오른다. 정신을 차려보니 수직의 세계를 빠져나와 손을 놓아도 안전한 능선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엉겁결에 멋쩍게 씩 웃어버렸다.
--- p.31 「1987」 중에서
다시 얼굴을 드니 약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그만 플레이크 두 개가 별안간 세로로 나타난다. 4번 프렌드를 쳐보니 한쪽 캠이 간신히 걸린다. 이제 이것밖에 없다. 만일에 빠지면 프렌드와 함께 모레인에서 산산조각날 것이 확실하다.
발을 에이더에 건다. 눈을 감고 체중을 싣는다.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가장 상단 발걸이에 올라 러프RURP를 치고 체중을 옮긴다.
‘됐다. 살았다.’
정상 능선까지 남은 것은 70도 정도의 설벽뿐이다. 그것도 5, 6미터. 피켈이 없는 나는 두 손을 눈 속으로 처넣으며 전진한다. 로프 무게 때문에 몇 번이나 떨어질 뻔해가며 덮어놓고 오른다. 능선까지 앞으로 2미터, 1미터. 양손을 능선에 걸치고 남아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서 맨틀링 하듯이 끌어올린다. 가까스로 눈 위를 기어오른다. 모든 힘을 쥐어짰던 나는 일어설 수 없었다. 그저 눈앞으로 내가 모르는 암벽군이 빙하 위로 끝없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살아 돌아갈 수 있다. 두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다. ‘슈퍼 솔로 클라이밍’은 성공했다. 눈 위에 대자로 누우며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p.62 「1988 - 극한의 솔로」 중에서
경사가 완만해지고 암릉으로 나오자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결코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암탑을 몇 개나 어려운 프리로, 아니면 에이드로 넘는다. 그럭저럭 올해는 내가 이긴 것 같다.
12시 30분, 눈이 하나도 없는 정상에 도착. 생각 이상의 감격은 아니다. 남아 있는 체력과 긴 하강을 고려하면 너무나도 높은 곳까지 올라와버렸다는 느낌이 들어 불안해진다. 이삼 분 만에 정상을 뒤로했다. 조금 내려가 정상을 뒤돌아봤을 때 비로소 “결국 해냈다.”라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왔다.
하강은 예상대로 까다로워서 힘을 쓰게 했다. 한밤중에 이탈리안 콜에서 잠시 휴식한 후, 리오블랑코까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굴러가며 계속 내려갔다. 이번은 모험이 조금 지나쳤던 것일까.
--- p.85 「1990 - 피츠로이 동계 솔로」 중에서
1나의 생일날인 4월 21일 오전 4시, 홀로 동벽을 향해 출발했다. 이번에도 특별한 전략은 아무것도 없다. 태양의 움직임에 주의하고 장비를 최소한으로 해서 알파인 스타일로 정상을 노릴 뿐. 이 미답의 동벽은 하부 600미터가 암벽, 상부 600미터는 주로 얼음과 눈으로 구성되어 있다. 낙석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스피드를 늦출 수는 없다. 무거운 등산화로 차례차례 기술적으로 어렵고 손 붙일 곳이 부족한 암장을 넘어간다. 무시무시한 고도감이다. 걸리적거리는 돌을 뒤로 던지자 튀어 오르면서 아득히 아래까지 조용히 떨어져간다. 상부의 빙설지대는 눈사태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해가 기울 때까지 테라스에서 쉬다가 기온이 떨어진 저녁때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밤에는 초승달이라 루트를 잡는 것과 자신이 있는 곳조차 정확히 판단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어둠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등반의 스피드는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확인하는 등반은 시원한 공포와 함께 서서히 고도를 올려 어느샌가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서 뒤쪽에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던 P43도 바라보는 여유가 생겨났다.
이번은 잘되어간다. 꼭대기까지 고도차 약 200미터의 마지막 오르막은 특별히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차갑고 섬뜩하게 불그스름했던 하늘은 동쪽 상공에서 천둥이 번쩍여, 내 자신이 이 커다란 자연 속에서 몹시 보잘것없는 존재란 것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다.
--- pp.155~156 「1998 - 쿠숨캉구루 동벽」 중에서
나는 악전고투했고, 한 가지 생각이 때때로 떠올랐다.
‘올해 죽는 것은 아깝다. 겨우 갸충캉에서 살아남았으니까 올해 정도는 살아 있고 싶다. 내년이라면 무리해도 좋지만.’
그래도 나는 매일 한계까지 노력해가며 오르고는 있었지만 점점 위로 향하는 것을 주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 20일을 마지막으로 등반을 단념했다. 그 후로도 악천후가 이어져 여성 트리오의 니우신샨도 능선에 가까운 곳까지 오르긴 했지만 물러나서 등반을 마쳤다.
나의 등반은 권투로 비유하면 재기전에 도전했던 복서가 2라운드에서 KO패 한 것이나 다름없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부활의 제물로 삼자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벽을 3분의 1도 오르지 못하고 너덜너덜하게 두들겨 맞았다. 쉽사리 올라가게 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본을 떠날 때까지는 내심 가능성이 적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p.202 「2005 - 중국 푸탈라 북벽 솔로」 중에서
나는 조금 떨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과 성공에 대한 확신으로. 손발가락을 잃기 전보다 기술적으로는 못하지만 이만큼 매력적인 산의 누구도 손 댄 적 없는 대암벽을 오를 수 있다니. 클라이머에게 이런 행복은 달리 없을 것이다. 이 등반이 세계 등산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나에게는 과거 추억 깊은 몇몇 등산과 같은 정도의, 아니면 그 이상의 행복을 주었다. 이것으로 다시 클라이머로서의 꿈을 이어갈 수 있다.
밤 12시, 붉은 기와를 촘촘히 깔아놓은 것 같은 대지로 빠져나왔다. 오르카의 꼭대기를 바람이 빠져나간다.
‘드디어 해냈어.’
오랜만에 순수하게 정상에서의 기쁨을 느꼈다. 베이스캠프를 향해 손을 흔든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절경과 여기서만 느낄 수 있는 깊은 희열을 음미하면서.
--- p.228 「2007 - 그린란드 오르카」 중에서
이튿날 아침은 안타깝게도 하늘이 온통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부터 정상까지 고도계가 정확하다면 300미터 남았다. 라인은 일목요연하지만 바위의 경사가 심해져서 오르는 속도가 늦어졌다. 말끔한 코너 크랙에 접어들 무렵에는 눈이 흩날리기 시작했지만 둘 다 내려가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치 오가와야마 레이백이 100미터나 이어져 있는 것 같은 바위. 날씨는 나빠져가기만 했지만 쾌적하게 핸드 잼을 먹여가며 돌진.
커다란 오버행을 오른쪽에서 돌아 들어갈 무렵에는 눈보라로 변했다. 소중한 풋 홀드가 젖기 시작했다. 조금 지쳐서 체념할까 망설였던 38피치째인 오후 2시 30분, 우리는 끝내 암벽을 빠져나왔다. 정상에서는 등정의 여운에 잠길 것도 없이 사진 몇 장을 찍은 뒤에 하강으로 옮겼다. 폭포처럼 물이 흐르는 슬랩, 끼어버린 로프, 눈이 들러붙어 차가워진 몸. 하강은 어지간히 필사적이긴 했지만 지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냉정함을 잃지는 않았다.
--- p.239 「2008 - 러시아 정교 천주년봉 북동릉」 중에서
이튿날은 경사가 완만해져 꼭대기로 향한 길도 보이기 시작했지만 바위는 피톤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물러지고 분설은 여전했다. 선등이 추락하면 멈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오래된 말이지만 ‘파트너에게 목숨을 맡긴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한편, 그의 믿음직한 움직임에서 남동벽을 다 오를 수 있다는 확신도 이때 생겨나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못 되어 노다의 팔이 푸스칸트루파 동봉 능선의 가장 높은 곳에서 높이 올라갔다. 60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기쁨은 온몸에서 넘쳐흐르고 있다. 20분 후 나도 정상에 도착했다. 돌아다니면 무너져버릴 것 같은 꼭대기에서 기념 촬영을 하는 틈에 산들을 바라보니 많은 눈을 걸친 예루파하Yerupaja, 그리고 다음 목표인 피라미드처럼 아름다운 산 트라페시오가 눈앞으로 솟아 있었다.
--- pp.272~273 「2013 - 푸스칸투르파 동봉 남동벽」 중에서
아이스액스를 찍어 넣고 신중하게 크램폰을 차 넣으며 다시 출발했다. 즐겁게도 어려움은 정상 근처가 되어감에 따라 늘어간다. 이 직경 8밀리미터짜리 가는 로프로는 추락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겠지만 몸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고 있다. 햇볕으로 데워진 우측 사면에서 엄청난 기세로 돌이 떨어져나간다. 이 등반선이라면 OK라고 믿으며 나아갔다.
꼭대기 비슷한 것이 앞에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서서히 그 반가운 시간이 찾아왔다. ‘산에 오르는 것이 즐겁다.’라는. 거기에는 이미 오르는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지지만 마음은 차분해져 있었다. 마지막의 무너질 듯한 바위를 움켜잡고 오르니 오전 9시, 일어설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꼭대기에 다다랐다. 밑에서 지켜보고 있던 후루하타에게 “정상에 도착했어.”라고 한마디만 건넨다. 여느 때처럼 성공을 거둔 감격은 없었다. 따듯한 햇살을 전신에 흠뻑 쬐며 멀리 봉우리들을 보고 있자니 평온함을 느낄 뿐이었다.
--- p.290 「2017 - 인도 히말라야 루초 동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