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오늘이 양옆으로, 또 위아래로 짜여 있는 10년 일기장의 구조나 규모의 특성상 나는 하루하루를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것보다 빼곡하게 쌓이는 것으로 감각한다. 그렇게 쌓여 있는 ‘오늘들’로부터 뒤늦게 나를 비춰보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 p.22
오늘은 어제로서의 결과도, 오늘만을 위한 단독적인 하루도 아니고, 내일을 있게 하는 가장 최근의 현재다. 그런 인식에는 묘한 책임감이 따라온다. 하루를 감각하는 삶의 거리가 오늘에서 내일까지로 늘어난 만큼 얼마나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냈는지는 이 시간이 쌓여 또 하나의 시절이 된 그때에 일기장이 말해주겠지. 이런 변화를 나는 세월이 부린 마법이 아닌 ‘일기를 쓰면서 달라진 점’이라고 느낀다.
--- pp.23-24
이미 쓰고 있는 사람만이 무언가를 쓰자고, 써야 한다고 매번 다짐한다.
--- p.30
일기를 쓴다는 건 오늘이 지나면 사라질 노선을 마지막으로 운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왕이면 사려 깊은 버스 운전사가 되고 싶다. 가까워지는 정류장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 보여도 슬며시 속도를 늦추고, 골목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올지도 모를 누군가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말이다.
--- pp.32-33
쓰는 일은 흔들리며 흩어져 있는 것을 붙잡아 자리를 만들어주는 일 같다. 쓰고 나면 나만 그곳에서부터 조금 멀어져 있다. 마치 내가 이다음으로 건너가기 위해 스스로 징검다리를 놓은 것처럼, 비로소 지면 밖으로 나온다.
--- p.41
지금까지 나는 내 글들과 함께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괜찮을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에도 나를 등지고 쌓아온 이야기들이 필요한 순간 눈앞에 나타난 느낌이다. 적어도 지금 같아서는, 무엇이 되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나의 내일로 넘어가는 것일 테니까. 그곳에서 마침맞게 만날 나의 이야기를 쌓아가면서.
--- pp.45-46
글쓰기 클래스를 하다 보면 ‘하루’라는 단위가 얼마나 커다란지 깨닫는다. 클래스에 여섯 명이 모였다면, 나의 세상이 적어도 여섯 개의 하루만큼은 확장되는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그날은 한 번에 수십 개의 하루가 내 세계를 팽창시킨 날이기도 했다.
--- p.79
쌓는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과 닮아 있다. 단, 기다린다는 감각 없이 기다린다는 점에서 무심하고, 그러므로 가만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거란 점에서 부지런하다. (…) 운세의 배턴을 이어 받듯 매일을 살고, 소설을 쓴다. 하루와 내 글의 마침표는 나 스스로 찍어야 하니까. 이제야 겨우 살수록 ‘사는 운’이, 쓸수록 ‘쓰는 운’이 쌓인다는 걸 알겠다. 결국 별자리 운세와 소설 읽기는 내가 얻고 싶은 행운들의 마중물 같은 건지도 모른다.
--- pp.94-95
나는 우리가 넘어온 시간이 진화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단지 내가 되네,라는 자명한 사실이 왠지 더는 실망이나 아쉬움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어렴풋한 해방감과 함께. 나는 비로소 실감이 하나씩 돌아옴을 느꼈다. 나에 게 어떤 시간들이 사라지지 않고 쌓여 있다는 것, 그 궤적을 누군가와 같이 더듬어보니 우연한 해결에 다다라 있었다.
--- p.115
어김없이 한 곡의 음악에 내 하루를 위탁하고 싶어질 때, 그렇지만 결국 음악보다 덜 근사한 하루를 일기로 남길 때. 나는 나로 사는 삶을 나만큼 잘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결국 ‘살 만하다’라는 감각으로 귀결되는 일이라면 좋을 것이다.
--- pp.135-136
새벽 내내 빈 문서를 마주한 채 한 곡을 반복 재생하고 있다 보면 슬쩍 겁이 난다. 작사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져서 언젠가 지금의 즐거움을 잃어버릴까 봐. 어쩌면 이런 게 진정한 지망생의 마음이겠지. 지금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뒷걸음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살면서 한 번은 더 지망생이 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 p.146
언젠가 엄마와 나란히 누운 어느 밤 건넸던 말을 이제는 내게 돌려줄 수도 있겠지. “엄마는 사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나도 사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내가 다름 아닌 엄마의 딸이기 때문에.
--- pp.189-190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간 여행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이 저 멀리 달아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곁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망연히 흐르고 있지만,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느낄 수 있게끔 증거를 남긴다.
--- p.218
두 다리가 뻗어나가는 길은 발아래 하나뿐인 것 같은데,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로 펼쳐진다. 그렇게 이 삶을 설명하는 이정표가 늘어나는 것이 좋다. (…) 그 모든 곳에, 서로 다른 친구들이 있다. 지금 내 삶의 현재 위치를 하나로만 잡을 수 없게끔, 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많은 것이 마음에 든다. 그 복잡한 길들을 나는 오래, 아주 오래 걸어야지.
--- pp.227-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