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 시절, 베토벤은 나의 신이었고 베토벤을 초월하는 새로운 음악이 존재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도시락을 먹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데 스피커에서 생전 처음 듣는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나는 일순간 멈춰 서서 음악에 귀 기울였다. 거대한 산처럼 이어지는 저 웅장한 선율은 도대체 뭘까? 베토벤 교향곡보다 훨씬 더 힘차고 화려한 저 사운드는 대체 누구의 어떤 곡이란 말인가? 이 곡이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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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모차르트마스! 1756년 1월 27일 저녁 8시, 우리의 모차르트가 태어났다. 차이콥스키는 그를 ‘음악의 예수’라 불렀다. 예수는 기득권층에 맞서서 사랑을 설파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모차르트는 사랑 가득한 음악을 우리에게 거저 주고 정작 자신은 이해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외계인을 만났을 때 “지구별엔 모차르트가 있다”라고 자랑할 수 있게 해 준 사람! 생명의 탄생을 예찬한 노래, 우리의 존재를 사랑으로 감싸주는 노래 ‘사람의 몸으로 나시고’, 모차르트가 인류의 일원으로 온 것을 축하하며 이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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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로서 돈과 명성을 쥐려면 오페라가 히트해야 하는데, 슈베르트가 손댄 17편의 오페라는 한 편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슈베르트는 마음속에 사랑을, 입술 위에 노래를 잃지 않았다. 20살 슈베르트가 작곡한 〈음악에게〉는 어려울 때 언제나 친구가 돼 준 음악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슈베르트의 짧은 생은 언제나 마음 아프지만, 그가 세상에 온 건 우리 모두의 축복이다. 아름다운 슈베르트여, 네게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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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밸런타인데이, 엘가의 〈사랑의 인사〉에 내 마음을 담아서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면 어떨까. 에드워드 엘가는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온 8살 연상의 캐롤라인 앨리스와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엘가는 그녀의 격려 덕분에 자신감을 회복하고 작곡가의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캐롤라인은 가족의 반대를 이겨내고 엘가와 결혼했다. 〈사랑의 인사〉는 엘가가 캐롤라인에게 약혼 선물로 바친 곡으로, 사랑과 고마움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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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등산길,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쇼팽, 드뷔시, 차이콥스키를 만나는 건 아주 신선한 경험이다. 세계 어느 나라 화장실이 이렇게 놀라운 경험을 선사하는가! 그러니 부디 “클래식을 모른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길! 선율은 알지만 제목이 알쏭달쏭할 뿐이다. 좋아하는 사람 이름 기억하듯, 클래식 곡 제목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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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내전이 잔인한 살육으로 치닫던 1992년 5월 27일, 사라예보 거리에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전날 죽은 22명의 무고한 시민을 애도하는 첼로의 선율…. 세르비아 민병대도, 보스니아 저격수도 사격을 멈췄다. 공포와 슬픔에 젖어 숨어있던 시민들이 연주자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피에 젖은 거리에 잠시나마 평화를 가져온 음악, 바로 알비노니 〈아디지오〉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음악은 이렇게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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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1년 6월 8일, 모차르트는 엉덩이를 걷어차여 궁정사회에서 쫓겨났다. 음악사 최초로 자유음악가가 탄생했으니 아주 중요한 날이다. 모차르트는 이 순간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10년 동안 자유음악가로 최고의 걸작들을 써 내려간다. 그는 자유의 대가를 혹독히 치렀지만, 우리는 음악사상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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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은 크게 보아 우리와 동시대 음악이다. 두 사람의 시대는 유럽 음악사에서 고급음악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없던 유일한 시대였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음악은 계층을 초월한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다. 클래식을 들으려면 모차르트와 베토벤에서 출발하는 것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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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교향곡은 ‘고뇌를 넘어 환희로’라는 베토벤의 모토를 부드럽게 표현한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무인도에 갈 때 베토벤 음악을 한 곡만 가져가라면 난 이 곡을 선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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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희곡 〈에그몬트〉에 베토벤은 극음악을 붙였다. 괴테는 이 곡에 감격하여 “탁월한 천재성으로 나의 의도를 잘 살렸다”고 찬양했다.
괴테와 베토벤은 기질과 성격이 너무 달라서 오래 우정을 나눌 수 없었다. 휴양지에서 두 사람이 루돌프 대공의 행렬과 마주쳤을 때, 괴테는 깍듯이 예를 표했지만 베토벤은 “우리 두 사람이 귀족보다 더 위대하다”며 먼저 인사하기를 거부했다. 이 사건 이후 괴테는 “베토벤은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 같다”며 거부감을 표했고, 베토벤은 세속적 권위에 순응하는 괴테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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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직면한 베토벤은 삶을 택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솟구쳐 오른 베토벤의 예술혼, 그것이 바로 피아노협주곡 C단조였다. 이 곡에서 베토벤은 웅장한 스케일로 자기만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그것은 내면의 고백이자 삶의 긍정이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는 유서가 아니라 ‘삶의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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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에서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두 번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환희의 주제를 모든 악기가 연주할 때, 그리고 트럼본, 피콜로, 심벌즈, 트라이앵글, 큰북이 가세하여 환희의 절정에서 마무리할 때…. 시름으로 가득한 세상이 떠올랐고, 고뇌 가득했던 베토벤의 삶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그 아픔을 딛고 이뤄낸 환희가 진정 눈물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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