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끝인사를 정하지 않았던 적은 또 없었다. 왜냐하면 어쩌면 디제이들의 클로징 멘트는 데이트를 하고 헤어지는 길목에서 나누는 연인들의 인사 같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 긴 얘기를 다 담고 있으면서 내일도 꼭 만났으면 좋겠다는 기대도 조심스럽게 담아내야 하는 것. 그래서 더 쉽게 정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청취자들은 가슴이 터질 듯, 그 짧은 한마디를 좋아했었던 거고.
시작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떻게 마무리하는지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디제이의 인사가 그렇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일을 마무리하는 태도에서도 말이다.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이미 끝인사를 정하듯, 어떤 인연들의 끝을, 어떤 일의 끝맺음을 미리 준비해야 어떤 마지막 순간들을 조금은 단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그렇더라도 세상에 쉬운 마지막이란 건 없을 테지만 말이다.
--- 「내일이 기다려지는 디제이의 끝인사」 중에서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디제이의 오프닝을 듣고 그게 무엇이든 작은 결심이라도 하고 실천하며 살고 있는 청취자가 계시다면, 죄송하고도 고마울 뿐이다. 그 글을 쓴 나조차 지키지 못하는 얘기들이니까. 때론 쓰고 잊어버리는 얘기들도 있으니까. 그래도 죄책감은 조금 덜어내려고 한다. 모든 작가들이 자신이 쓴 글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합리화, 그리고 어느 날의 오프닝 덕에 누군가의 발걸음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향했다면 그걸로 그날 오프닝의 역할은 충분한 게 아니었을까?
--- 「나는 내가 쓴 글처럼 살고 있을까?」 중에서
유쾌하면서도 시원한 그 만남이 있은 두 달 후. 모두 알다시피 신해철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두 달 전 같은 자리에서 그를 만난 디제이 써니는 ‘고 신해철이라고 성함 앞에 붙여야 하는데’ 하고는 한참 동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청취자들의 애도 문자가 끊임없이 도착했다. 다른 사연을 소개할 여력도 없었을뿐더러 다른 날처럼 일상적인 얘기들은 오지 않았다. 방송하기 힘든 날 중의 하나였다.
뉴스를 통해 종종 연예인들의 비보를 전해 듣는다. 그게 누구든 유명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한 번이라도 프로그램에서 마주쳤던 사람이라면 조금 더 마음이 힘들다. 심지어 함께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연예인들의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은 더 그렇다. 사고 소식만으로도 마음이 무겁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드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수습’이란 걸 해야 하기 때문에 더 힘들다. 방송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
--- 「그래도 방송은 계속되어야 하니까요」 중에서
믿고 싶다. 십수 년 전인가, 인터넷이 발달하기 시작할 무렵, ‘종이 신문’이 없어질 거라 했고, ‘극장’도 없어질지 모른다고 했다. ‘종이책’의 멸망을 얘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줄 알았던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라디오도 그럴 거라 믿는다. 왜냐하면, 라디오엔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라디오 안엔 사람이 있으니까.
--- 「라디오를 왜 들으세요?」 중에서
그날의 1등을 차지한 청취자들 인생 최고의 슈퍼 히어로는? 바로 ‘아버지’였다. 우리들의 예상 순위에 전혀 올라와 있지 않았던 히어로였다. 늘 비슷하게 순위를 맞추며 자만 비슷한 것에 빠져 있던 우리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결과였지만, 아주 깊은 울림을 모두에게 주는 결과이기도 했다. 방송에서 만나는 청취자들은 항상 우리의 예상보다 놀랍고 짐작과는 다른 피드백으로 우리를 웃겨주기도 하고, 감동시키기도 한다. 이날도 그랬다. 짐작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청취자들의 이 반응에 우리는 반성했던 것 같다. 감동은 당연했다. 이날의 결과는 두고두고 청취자들과 함께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방송을 만들면서 종종 일어나는 이런,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좋다. 일상에 그만큼 큰 흔적을 남기니까. 생각하지 못했던 결과는 항상 재밌다. 생각지도 못했던 걸 생각하게 만드니까.
--- 「짐작과는 다른 일들」 중에서
라디오에 도착하는 수많은 사연들은 ‘나는 오늘’로 시작한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내 얘기, 누군가에게는 하고 싶은 얘기, 누군가는 들어줬으면 하는 얘기들이 넘쳐난다.
언니, 저 오늘 시험 망쳤어요.
오늘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했는데 한 번에 까였잖아요.
나 오늘 얇은 옷 입고 나왔는데 왜 갑자기 추워요?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어린 시절의 일기 같은 솔직하고 따뜻한 얘기들. 그 수많은 얘기들을 떠올려보다가 지금, 다시 또 생각났다. 나는 그래서, 라디오가 좋았다. 라디오가, 참 좋았다.
---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얘기」 중에서
“후배들이 방송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자꾸 물어보면, 딱 한 마디만 해요. 거짓말하지 말아라. 라디오는 일상이기 때문에 1년 365일 얘기하다 보면 나중엔 무슨 얘기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거짓말을 하면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 딴 얘기를 하게 되거든요. 얘기를 꾸며서 하거나 거짓말을 하면 그거는 청취자들이 빨리 안다, 그리고 청취자들이 한 번 신뢰가 무너지면 그다음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니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을 거다. 이렇게 얘기는 해주는데 사실 저도 잘 몰라요.”
나는 아저씨의 이 말이 ‘좋은 디제이’가 기억해야 할 일이면서 동시에 ‘라디오가 지나온 길’이라고 믿는다. 하루에 꼬박 2시간, 적어도 1시간 동안 얘기를 하고 듣는 사이다. 가족의 얘기도 2시간을 들어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말투가 조금만 달라져도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몸의 컨디션이 좋은지 별로인지를 알아챌 수 있는 법. 라디오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랫동안 라디오를 믿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거라고 믿는다. 누구도 깰 수 없는 단단한 믿음이라고 믿는다.
--- 「배철수 아저씨의 말씀은 늘 옳다」 중에서
각자의 디제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 얘기들에 답을 한다. 그들의 방식대로.
개그맨 박명수의 호통과 같은 코멘트는 ‘그래도 괜찮다’는 위로였다. 타블로의 ‘제 친구 중에도 이런 애가 있었는데요’로 시작하는 코멘트는 ‘누군가 당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로 건네는 위로였다. 성시경이나 알렉스의 ‘그게 뭐요? 그래서 뭐요?’ 이 시크한 코멘트는 ‘고작 거기에 질 거냐’ 당신의 내일은 더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소녀시대 써니가 솔직하게 꺼내놓은 ‘저는 잘 모르겠어요’는 ‘함부로 얘기하지 않겠지만 당신이 잘 판단할 것이라 믿는다’는 조심스러운 위로였다. 주진우가 건네는 ‘다 저한테 얘기하세요’는 ‘나는 무조건 니 편이다’라는 든든한 위로였다. 청취자들의 때로 갑갑하고, 때로 막막하고, 때로 무거운 물음표엔 이렇듯 각각의 디제이들의 방식대로 다양한 코멘트가 존재했다.
--- 「청취자가 던진 물음표, 디제이가 건넨 위로」 중에서
2008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디제이 콘서트는 역시 배철수 아저씨가 진행을 했고, 당시 [꿈꾸는 라디오]의 디제이였던 타블로의 목소리로 엔딩을 준비했다. 그때 [블로 노트]라는 엔딩 코너가 인기였는데, 타블로가 매일 짧고 강렬하게 작성하던 한 줄의 [블로 노트]를 디제이 콘서트 때는 내가 직접 썼다. 정말 진심이었던 2008년 디제이 콘서트의 엔딩 멘트를 지금도 잊지 않는다.
라디오가 없었다면 너와 나는 있어도 우리는 없었겠지.
각자의 사람들을 ‘우리’로 만들어준 게 라디오라서, 라디오에서 만들어진 ‘우리’가 나는 더 좋다. 라디오만 있다면 너와 나는 언제든 ‘우리’가 된다.
--- 「라디오가 없었다면, ‘너’와 ‘나’는 있어도 ‘우리’는 없었겠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