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에 미친 일본의 영향에 관해 고려할 점이 하나 더 있다. 일본 야구의 한발 앞선 기술과 문화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들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1890년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배재학당과 YMCA 교육관 같은 곳에서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으로 세례를 받은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 교육을 받은 근대 교육 1세대 청년들이 방학을 이용해 고향으로 돌아와 일본에서 배운 야구 기술을 전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 p.52 「4. 한국 야구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일까?」중에서
1962년 4월 1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각 군 대항 연식 야구대회가 열렸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중앙정보부 다섯 팀이 출전한 그 대회를 앞두고 최고회의로부터 하달된 지침은 “각 군 서열 20위 이내의 고급 간부들로 팀을 구성할 것”과 “각 군 최고 지휘관이 선발투수로 출전할 것”이었다. 그날 시구는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었고, 개막 경기는 김종오와 김신, 두 참모총장을 선발투수로 내세운 육군과 공군의 대결이었다.
5.16 군사정변이 채 1년이 되지 않은, 그 시점에 한국 사회에서 군부의 힘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 시기에 각 군 참모총장들을 직접 마운드 위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경기가 꽤 흥미로웠던지, 그 정점의 권력자는 얼마 뒤 직접 그라운드에 나섰다. 그해 11월 24일, 역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정부기관 친선야구대회’에서였다.
그날 출전한 팀은 최고회의, 내각, 대법원, 군 등 4개였고, 최고회의 팀 2번 타자와 2루수로 출전한 박정희 의장은 대법원과의 1회전에서 안타 2개를 기록했다. 최고회의 팀 선발투수는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었다.
--- pp.75-76 「7. 육해공군 참모총장을 선발투수 맞대결시킨 사람은 누구였을까?」중에서
하지만 1970년대 초, 고교 야구의 인기가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을 압도하는 대반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과 1970년대 중반 사이의 10여 년간 고교야구대회의 입장객 수는 서너 배씩 증가했다.
고교 야구 소식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확장되면서 최초의 스포츠 전문지로 1969년 창간 당시 2만 부를 발간하던 『일간스포츠』가 1976년에는 80만 부를 찍어낼 정도로 팽창했다. 각 종합 일간지의 스포츠면 비중도 꾸준히 확대되었다. 각종 설문 조사에서 야구가 처음으로 최고 인기 종목으로 올라섰으며, 중계방송 빈도 역시 프로복싱과 프로레슬링을 넘어섰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발언으로 프로레슬링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프로복싱에서 더 이상 세계 챔피언이 배출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일본과 서양에 대한 한국인의 열등감이 모두 해소됐기 때문도 아니었다.
--- pp.95-96 「9. 고교생들의 야구는 어떻게 김일의 프로레슬링을 이겼을까?」중에서
하지만 더 중요한 파급 효과는 그 이후에 나타났다. 주요 은행들이 일제히 실업야구팀을 창단했다는 것은 야구를 통해 은행에 취업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1960년대 은행은 대기업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인기 직장이었다. 해외 원조와 차관 등에 대한 의존도가 높던 시절, 자본 공급이 정부 통제하에서 은행들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가난한 수재들이 몰리던 각 지역 명문 상업고등학교 학생 대부분의 목표는 은행 취업이었다.
예컨대 1964년 은행의 고졸 사원 공개 채용에서 실질 경쟁률은 20대 1에 달했으며, 각 은행의 1차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이 신문에 게재되었을 정도였다. 선린상고나 덕수상고 같은 최상위권 상업고등학교를 제외하면, 지방의 후발 상업고등학교에서는 전교 최상위권 성적을 얻어야만 은행 입사가 가능했다.
--- pp.117-118 「11. 야구로 밥벌이하는 선수들은 언제부터 나타났을까?」중에서
그런데 1970년대 후반부터 스포츠 선수들의 유례없는 몸값 폭등이 이어졌다. 1977년 한양대 배구선수 강만수와 숙명여고 농구 선수 전미애가 각각 금성과 한국화장품 실업팀에서 300만 원이라는 역대 최고 계약금을 받아 화제가 됐지만, 1978년에는 고려대 농구 선수 이동균이 현대에서 5,000만 원을 받아 그 기록을 훌쩍 넘어섰고, 1979년 말에도 연세대의 야구 선수 최동원과 송원여고의 배구 선수 제숙자가 각각 롯데와 호남정유로부터 5,000만 원 계약금을 받았다. 그해 현대는 프로 축구팀 창단을 전제로 공군 제대를 앞둔 차범근에게 1억 원 계약금을 제시했지만, 차범근이 독일 프로팀에 입단하면서 무산되기도 했다.
고교와 대학을 졸업하는 최고 유망주에게 주어지던 계약금은 1970년대 중반과 후반 몇 년 사이에 대략 20배가량 뛰어오른 셈이다. 1980년 7급 공무원 초봉이 9만 원이었고, 1978년 대기업 중 가장 많은 급여를 받던 금성사의 대졸 신입사원 초봉이 19만 3천 원이었던 점에 비추어보면, 1970년대 중반까지 서너 달 분 월급에서 많게는 1년 치 연봉 정도로 평가되던 선수 입단 대가가 순식간에 대기업 연봉의 20배 이상 수준까지 치솟은 것이다.
--- pp.175-176 「17. 프로야구는 정말 전두환이 만들었을까?」중에서
그렇다면 1980년대 출생자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1990년대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 그리고 복원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 등이 이어진 정치의 시대였던 1980년대 말에 프로야구는 잠시 국민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고 정치와 경제 환경이 안정되면서 다시 한번 부흥기를 맞았다. 1990년 처음 300만을 돌파한 프로야구 관중은 3년 만인 1993년 400만을 넘어섰고, 다시 2년 뒤 1995년에는 500만 명에 도달했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특히 그 시대의 프로야구는 절대강자 해태 타이거즈의 건재 속에서도 국내 최대 시장인 서울과 부산이 치고 나가며 이끌었다. 신인 3인방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의 거침없는 질주 속에 야생마 이상훈과 천재 포수 김동수가 중심에 선 LG 트윈스가 선봉장 역할을 했다면, 서울 라이벌 두산 베어스는 그 LG 트윈스와의 신인 지명 주사위 게임에 번번이 패하는 불운 속에서도 연습생 출신 김상진과 김민호를 주축으로 절정의 해였던 1995년 한국시리즈의 최종 승자가 되면서 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그 무렵 야구 열기는 서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염종석과 박정태를 필두로 임수혁, 마해영, 전준호, 공필성 등이 ‘화끈한 부산 야구’의 전형을 만들었던 롯데 자이언츠와 그 모든 거대한 태풍을 종종 찻잔 속 회오리로 만들어버리며 한 해 걸러 한 해씩은 우승을 거르지 않았던 선동열과 이종범을 필두로 여전히 막강한 해태 타이거즈가 있었기 때문이다.
--- pp.210-211 「20. 한국 야구의 황금세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