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펴보니 범녕의『경』과 「전」 두 「주」는 모두 강희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옳다. 정나라의 홀은 그 반정을 인정하면서도 장공(莊公)이 죽은 뒤에도 “세자”라고 칭하였으니, 그렇다면 “군주가 죽었는데도 세자라 칭했으니, 본국으로 되돌아올 도리가 없는 것이다.”라는 말은 틀린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왕부의 명 때문에 아버지의 명을 사양한 것은 바로 위나라 첩이 근거로 삼았던 의리인데, 그는 자기 마음대로 아버지가 왕부에게 죄를 얻었으니 비록 그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왕부의 명을 확대해석해서 아버지의 명을 사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르겠으나, 왕부의 명을 굳이 아버지에게 행하고 아버지의 명을 사양한다는 것이, 어찌 자식 된 자가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 p.45
송상봉의『과정록』에 “두 책에서 기록한 것은 한 번은 죽였다 하고, 한 번은 죽이지 않았다고 한 것이 다르다. 아마도 처음에는 초왕(楚王)이 죽이지 않은 것은 몸소 정직함으로써 초왕에게 알렸기 때문이지만, 섭공(葉公)은 공자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영윤(令尹)이 되자 죽인 것이다.”라고 했다. 살펴보니, 송상봉의 말이 옳다. 정현은 이 구절에 대한 「주」에서 “양(攘)은 훔친다[盜]는 뜻이다. 우리 고을에 이름을 궁(弓)이라고 하는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 죄를 증언했다는 말이다.”라고 했는데, 「주」에 의거해 보면 정현본에 ‘직궁(直弓)’이라고 되어 있으니, 반드시『고논어』 · 『노논어』 · 『제논어』에서 나온 것으로 표현을 달리한다.
--- p.124
살펴보니, 오인걸(吳仁傑)의 설과 같은 경우는『논어』의 예(?)는 바로 요임금 때의 예이다. 왕응린(王應麟)의『곤학기문』에 “『설문해자』에 ‘오(?)는 오만하다[?]는 뜻이다.’라고 하면서『서경』「우서 · 익직」의 ‘단주처럼 오만하다[若丹朱?]’라는 내용과,『논어』의 ‘오(?)는 배를 끌고 다녔다[?湯舟]’라는 내용을 인용했다.『서경』에 ‘물이 없는 곳에서 배를 끌고 다녔다[罔水行舟]’라는 말이 있는 것을 살펴보면, ‘오(?)가 배를 끌고 다녔다[?蕩舟]’라는 것은 아마도 바로 단주(丹朱)를 이르는 것인 듯싶다.”라고 했으니, 오인걸(吳仁傑)과 왕응린(王應麟) 두 사람의 설이 모두 위공(僞孔)과는 다르다. 손지조(孫志祖)의『독서좌록』과 이돈(李惇)『군경식소』와 조익(趙翼)『해여총고』는 모두 오인걸(吳仁傑)의 설을 따랐다.
--- p.214
살펴보니,『춘추공양전』「희공」 3년에 “가을에 제후(齊侯) · 송공(宋公) · 강인(江人) · 황인(黃人)이 양곡(陽穀)에서 회합했다.”라고 했는데, 「전」에서 “이것은 대규모의 회맹이었는데, 어째서 피상적으로 말하였는가? 환공이 말했다. ‘계곡을 막지 말 것이며, 곡식을 비축하지 말 것이며, 세자를 바꾸지 말 것이며, 첩(妾)을 아내로 삼지 말라.’”라고 했고,『춘추곡량전』에도 “제 환공이 위엄을 갖추고 엄숙한 태도로 홀(笏)을 꼽고서 제후들에게 조회를 받으니 제후들은 모두 환공의 뜻을 깨달았다.”라고 했는데, “뜻[志]”이란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데 뜻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환공의 큰 회합이었기 때문에 정현이 지목했던 것이다.
--- p.312~313
살펴보니, 원양(原壤)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곽을 만들던 나무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는데도 공자는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웅크리고 앉아서 공자를 기다림에 미쳐서는 엄히 꾸짖은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나무에 올라가 노래를 부른 것은 곧 죄악 중에서도 큰 것으로 목을 베어 죽여야 하는 법에 해당되는 것이지, 단순하게 말로 꾸짖을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못 들은 척하고 지나쳐서 친척이 된 정(情)과 친구가 된 교분(交分)을 온전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웅크리고 앉아서 공자를 기다림에 미쳐서는 엄중히 꾸짖음을 혐의하지 않은 것이다.
--- p.421~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