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후 이어진 연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성큼성큼 무대로 걸어 나온 여자가 두 손을 내린 채 한참을 서 있다 곡을 끝낼 때처럼 양손을 공중에 들어 올려 반원을 그리는 점만 같았다. 악기를 입술에 갖다 대자마자 빠른 곡이 시작됐다. 바람이 튀는 듯한, 찢어지는 듯한,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플루트가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왼쪽으로 고개를 드는가 싶던 여자가 순간적이라 할 만큼 빠른 속도로 숨을 들이켰다. 나팔처럼 입술을 벌려 훅하고 공기를 빨아들이는 동작이 지금까지의 행동과는 달리 거칠고 빨랐다. 그 순간적인 숨쉬기를 본 후 내 오감 은 숨쉬기에만 매달렸다. 음악은 사라져 버리고, 여자의 숨 쉬는 모습과 후욱일 것 같기도 하악일 것 같기도 한 그녀의 숨소리만 보고 듣고 있는 것이었다. 곡이 끝나자 미처 몰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표정의 여자가 플루트를 든 두 손을 공중에 뻗어 반원을 그리며 내렸다. 박수갈채를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이 아득한 꿈같았다.
--- 「숨 음악이란 것이 있다면」 중에서
사실 무언가를 보고, 읽고, 듣고, 감촉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스크랩일 것이다. 자극을 받은 오감이 진하게 든 옅게 든 뇌 주름에 자국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상자에 모으고 공책에 붙이느라 애를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숫제 그 시간과 에너지를 당장 바깥으로 나가 경험과 체험 그러니까 직접 스크랩에 쓰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도. 간접 스크랩의 효율이 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어서다. 게다가 모아놓은 기사가 많아지면서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 않은가. 어떤 기사를 오려 두었는지 기억할 수 없는데다 상자를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들 어찌하랴 싶은 생각도 든다. 습관대로 하는 거지 싶은….
--- 「가위질과 글감 숭배」 중에서
눈을 감은 채 앞을 바라본다. 희박한 어둠 속에서 노랗기도 하고 하얗기도 한 것들이 움직인다. 가끔은 작은 섬광이 번쩍이기도 한다. 마치 구겨서 비비다 다시 펴낸 금박종이 같은 느낌…. 내가 엄마의 뱃속에서 보던 광경도 이런 것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때 듣던 소리는? 엄마의 심장 소리, 음식물을 섞고 운반하는 위장 소리였지 싶다. 여섯 살 언니가 재잘거리는 소리, 두 살 오빠가 칭얼거리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엄마가 마구 소리를 질러대 귀를 막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다정하게 소곤거려 귓바퀴를 쫑긋거렸을지도. 희붐한 엄마의 뱃속이 암흑으로 변할 때면 나도, 느린 리듬의 숨소리 듀엣을 들으며 잠을 청했으리라. 불현듯, 아버지가 나를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안아 줬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엄마의 몸에 감싸인 채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안겼던 것이다.
--- 「아버지의 비밀 정원」 중에서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텅 빈 길. 왼쪽을 보아도 오른쪽을 보아도, 눈이 미치는 그 어디 그 어느 곳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어둠이 내리는 놀이터를 향해 걸어 내려갔다. 평소 같으면 아이들과 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른들로 가득 차있을 놀이터였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와 아이를 부르고 달래는 어른들의 소리로 왁자지껄할 곳에 어둠만 울렁이고 있는 낯선 광경을 어색해 하며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저기, 서너 걸음 앞쪽의 길바닥에 뭔가 튀어나온 것이 보였다. 콘크리트가 부서져 길바닥이 일어난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구멍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였다. 나는 달려들어 남자를 구하기 시작했다. 낡아서인지 콘크리트는 내 힘으로도 쉽게 뜯겼다. 조금씩 조금씩…. 뜯긴 구멍이 길 밑에 갇혀 있던 남자의 어깨보다 커졌다 싶은 순간, 남자가 튀어 오르듯 바닥에서 솟구쳐 나왔다. 튀어 나온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놀랄 일이었다. 남자인 줄 알았던 남자는 여자였다. 더욱이 그녀는 손이 묶여 있었다. 나는 여자의 손에 묶여 있는 끈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자가 끈이 풀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듯이 달아나는 것 아닌가. 달아나는 여자의 뒤로 옷자락이 하늘하늘 길게 나부꼈다. 음악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 희미한 소리는, 아까 그러니까 길바닥을 뜯을 때부터 듣던 그 노래 소리는, 다가오듯 커지고 있었다.
--- 「꿈, 꿈, 꿈」 중에서
퍼뜩,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은 통로를 완전히 빠져 나가려 할 때였어요. 햇살 속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간절함 맞다, 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림 그리는 것이 제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거지요. 그림을 그리려면 시간도 있어야 하고 건강도 받쳐 줘야 하니까요. 아니, 그 무엇보다 주변 이 편안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저는 곧 간절함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제 그림 그리기가 꿈이라는 것을…. 설레는 마음이 그 증거였습니다. 떠올리고 있는 장면도 그렇고요. 입으로는 목적 없이 그린다고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전시장 풍경을 펼쳐대고 있었으니까요. 알록달록 밝고 환한 그림들 앞에서 계면쩍은 표정으로 구부정히 서 있는 제 모습을 말이지요.
--- 「꿈의 다리」 중에서
집에 돌아가면 일기를 쓰리라 마음먹는다. 미리 붉어진 바다와 공중에 뜬 섬과 가파르고 완만했던 능선과 하얗고 붉은 억새밭과 멀리 보이던 한라산과 이어지고 이어지던 오름 풍경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과 들뜬 목소리 사이를 마음 조용히 걷던 내 자신에 대해 자세히 써 놓으리라, 다짐한다. 동물의 털처럼 도톰하면서도 매끄러운 이삭을 가진, 이삭 사이 붉은 줄로 얼핏 분홍색으로 보이던 억새꽃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겠다고. 일기는 마음을 찍는 사진이므로, 미래의 어느 날 내 자신에게 불려 나올….
--- 「모습을 쓰고 마음을 찍고」 중에서
아버지의 첫 치매 증상이 와이셔츠로 나타났다는 것이 저는 지금도 가슴 아파요. 아버지가 당신의 일에, 가족의 무게 에, 얼마나 눌려 있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지요. 언제부터인지 퇴근해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엔 어김없이 새 와이셔츠가 들려 있었잖아요. 외판하는 사람의 일복으로 아버지가 신경 써 갖춰 입던 깃과 소매가 빳빳한 와이셔츠가 말이지요. 그러나 어이없는 일은, 그렇게나 여실한 이상 증상이 아버지의 치매를 알아채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엄마가 뜬금없이 질투를 한 때문이지요. 와이셔츠를 파는 어여쁜 여인에게 아버지가 반해도 홀딱 반한 것으로 오해했다나요. 하긴 저도 할 말은 없네요. 어쩌다 친정에 가서도 자존심 상해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엄마에게 그럴 리가 있겠냐며 웃기만 했으니까요.
--- 「낯 검은 오뚝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