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없던 구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에 이르는 동안 주거 흔적과 고인돌을 남겨 둠으로써 대전은 장구한 시간에 걸쳐 삶의 터전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청동기 시대 유물인 고인돌의 경우 가오동과 비래동, 송촌동, 내동, 추목동, 대정동, 가수원동, 원내동, 관저동, 교촌동 등 대전 곳곳에서 관찰된다. 고인돌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이 지역에 강력한 조직과 명령체계를 갖춘 정치적 조직이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신흔국'이라는 기록 이외에는 증명할 만한 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전에는 정치 시스템을 갖춘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여러 고인돌에는 둥글게 파놓은 홈인 성혈(性穴)이 있어 당시 거주하던 사람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관과 의식을 가지고 살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성혈에 대해서는 별자리를 새겼다거나 다산과 부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이기 때문에 다양한 상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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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을 흐르는 세 하천은 중생대 쥐라기1에 화강암이 관입한 이후부터 흐르기 시작해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세 하천이 만들어 놓은 충적지가 중생대 쥐라기에 관입한 화강암 위에 있기 때문이다. 대전 분지 중앙부의 화강암 분포 지역은 지각의 뒤틀림 현상으로 발달한 구조선을 따라 단열(fracture)과 파쇄로 심층풍화가 이루어진 다음 갑천과 대전천, 유등천에 의한 침식으로 깊게 깎였다. 이후 오랜 시간 침식과 퇴적을 반복하면서 지금의 충적 지형을 만든 것이다. 특히 대전 분지는 넓은 범위에 걸쳐 침식작용이 이루어진 이후 하천의 범람으로 충적지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천 규모에 비해 분지 내 충적 지형은 규모가 큰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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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천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거나 변형되었음에도 여전히 생태적 다양성이 뛰어난 곳이다. 도심 구간을 조금만 벗어나면 갑천의 수풀 사이로 뛰어가는 고라니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천연기념물이자 멸종 위기 야생 생물인 수달과 삵이 서식하고, 물길 속에는 역시 천연기념물이자 멸종 위기 야생 생물인 미호종개도 산다. 금강과 합류하는 지점에는 환경부 지정 멸종 위기 야생 생물인 맹꽁이 집단서식지가 확인되었을 만큼 생태환경이 우수하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철새가 계절을 달리하여 찾아오며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 갑천 상류에는 산지 곡류하천과 하안단구가 발달하고 중·하류에서는 범람원이 발달해 있지만 중·하류 지역의 도시화가 진행된 구간에서는 그 원형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 p.41
산성은 일정한 틀에 맞추어 쌓는 것이 아니라 지형과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축성하기 때문에 획일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각각의 산성들을 보면 같은 모습을 지닌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대전에 분포하는 산성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대전의 산성 규모는 매우 작다는 것이다. 500m 미만의 산성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500m 이상의 산성은 8개에 불과하고 그중 1,000m 이상의 산성은 계족산성 하나뿐이다. 48개의 산성 중 초소에 해당하는 보루는 17개나 된다. 이렇듯 규모가 작은 산성이나 보루가 대부분인 이유는 신라와 접하고 있는 계족산~식장산~만인산 줄기가 연속되어 있어 거대한 장성처럼 방어선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신라군의 이동 경로를 감시할 수 있는 작은 성이나 보루만 있어도 충분하였다. 또한 고구려와 달리 백제는 주변의 작은 나라를 정복하거나 그 침입을 막으면 충분하였기에 장기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큰 규모와 다양한 기능을 가진 성곽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지방통치의 거점이 되는 성곽이라고 해도 규모가 800m 이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 p.90~91
대전역에서 중앙로가 아닌 대전로의 원동네거리 방향은 일제 강점기에 본정통(本町通-혼마찌)이라고 불린 곳이다. 본정통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이자 가장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일본인들은 대전역이 건설되는 1904년경부터 거주하기 시작했다. 1910년에는 일본인 인구가 2,479명으로 급증하여 조선인 1,740명보다 더 많이 거주하였으며, 1933년에는 대전 총인구 34,079명 중 절반에 해당하는 17,000여 명에 이르러 일본식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시이자 거리가 되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대부분 원동과 중동, 정동 일대에 모여 살았으며, 그중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 원동 주변이다. 일제 강점기 때의 본정통은 지금도 대전역과 중부권 최대시장인 중앙시장이 만나고 있어 여전히 복잡하다. 시장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흥정 소리에 생기가 넘쳐흐른다.
--- p.141
대전시청을 중심으로 한 둔산은 교차하는 도로망이 사방으로 뚫려 있으며, 이 도로를 따라 공원과 건물들이 나란히 위치한다. 대전이 '한밭'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드넓은 평야 위에 들어선 느낌이다. 신도시라는 것이 지극히 계획된 도시이듯, 자연적인 지형 위에 그대로 건물이 얹혀 있는 것은 아니다. 높은 곳은 깎아 내고 낮은 곳은 메워 전체적으로 평탄하게 하고 도로와 하수도 등 기반 시설을 만든 다음에 건물이 들어선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제작한 지형도에서 100년 전 둔산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당시 둔산의 남쪽은 높고 북쪽이 낮은 남고북저의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반듯하게 정비한 갑천도 당시에는 곡류하고 있었으며 갑천 양안에는 갑천이 만들어 놓은 범람원이 펼쳐져 있었다. 현 정부대전청사가 있는 지역을 기점으로 북쪽으로는 반원을 그리듯이 갑천과 유등천이 만들어 놓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들 두 하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지류들의 불규칙적 배열 속에 대부분 벼농사를 지었다. 당시 지도에는 유등천하류를 대전천으로 표기했지만 대전천과 유등천이 합류하는 지역에는 드넓은 저습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 p.165~166
화산성 온천은 마그마에 의해 데워지는 지하수로 1백℃ 이상의 고온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지열발전도 가능하지만, 온도가 낮은 경우 온천욕에 이용한다. 비화산성 온천은 지하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데워지는 심층수와 방사성 원소의 붕괴, 단층 작용 등에 의해 만들어진다. 방사성 원소의 붕괴에 의한 열은 방사성 동위원소 함량이 높은 화강암 분포지역에서 방사성 광물이 붕괴하면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지하에 존재하고 있던 지하수가 데워져서 온천이 된다. 그리고 단층 작용이 발생할 때 마찰열에 의해 지하수가 데워져 온천이 되기도 한다. 땅속 깊이 들어갈수록 지온(ground temperature)은 증가하여 지하 깊은 곳에 온천수가 만들어진다. 우리나라 평균 지온 증가율은 25.7℃/km로 지표 온도가 0℃라 해도 지하 1,000m 정도 들어가면 이론적으로는 수온이 25℃를 넘어 온천이 되는 것이다.
--- p.233~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