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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최상] 바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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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최상] 바봇

: 어느 집사 로봇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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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5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342g | 138*211*20mm
ISBN13 9788993690460
ISBN10 8993690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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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가 진짜 그렇게 잘난 줄 알고 나름 자존심을 높이 세웠지만, 갈수록 상상 이상의 훌륭한 집사 로봇들이 출시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직면해 나름의 자존심이고 뭐고, 내가 봉사하고 있는 이 집에서 어떻게든 쫓겨나지 않고 버티는 게 나의 집사 로봇 생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악착같이!’
나와 같은 모델의 로봇이 전 세계에 약 20만 대, 대한민국에만 약 10만 대 정도 있는데, 나처럼 중고로 팔려 나간 경험을 가진 로봇은 2년 전만 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 우리 기종은 말도 못하게 많이 중고 매물로 나오고 있다고 한다. 정말 공포스럽게도 벌써 각종 중고 부품으로 재처리된 동료들도 있다고 들었다. 삼가 고 집사 로봇들의 명복을……. --- p.11

그 ‘롯’ 같은 명령 때문에 나는 결국 출시되고 나서 처음으로 셧다운되고 말았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중에도 계속 이 셧다운 문제가 나 바봇을 괴롭히게 되었다. 아무튼 셧다운이 되면 문제인 게 일종의 블랙박스 기능도 같이 셧다운된다는 것이다. 완전한 ‘블랙’인 것이다. 아무 기록이 없는 무(無)의 상태! 간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 눈도 소복이 쌓였는데…….
다음 날 오전, 그러니까 눈 내린 크리스마스 날 아침 겨우 리부팅된 나는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전 주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전 주인의 눈은 더욱 썩어 있었다. 나는 어젯밤에 있었던 매우 낯설었던 명령을 복기했다. --- p.30

지구 행성 대한민국의 해물된장찌개에는 레시피상 찌개용 두부가 들어가야 한다. 넣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주인이 좋아하는 칼칼한 해물된장찌개에는 슴슴한 두부가 들어가야 제격이다. 청양고추를 넣어 칼칼한 국물 맛을 두부의 심심한 맛이 잡아준 데나 어쩐 데나…… 맛의 균형감이라나? 하아!
어쨌거나 두부는 나에게 치명적 오류의 근원이었다. 이유는 추론하기 어렵다. 두부를 칼로 썰어야 하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 크기의 큐빅으로 잘라야 주인의 식감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나 같은 로봇은……. 이럴 때는 그저 인간의 직관이 부러울 따름이다.
가로, 세로, 높이 1.2센티미터 큐빅으로? 아님 1.5센티 큐빅으로 혹은 큼직하게 3.2센티 큐빅으로 하다가 다시 벽돌 모양으로 여섯 등분을 해야 하나 가늠하다가 어느새 셧다운이 오고 말았다. 불과 1, 2초 사이지만 잠깐씩이라도 셧다운이 되었다가 리부팅되는 내가 두려웠다. 한편으로 저 흰 두부는 나 바봇이 노자 철학에 다가가게 된 가장 큰 계기이기도 하다. --- p.67

인간의 뇌를 가장 잘 적용했기 때문에 요즘도 우리 집사 로봇들의 추론 판단과 행동 프로세스를 빅데이터로 모아 유수의 학술지에 논문으로 발표하는 과학자들이 종종 있다고 들었다. 그만큼 집안 살림은 인간의 여러 노동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고급 노동 가운데 하나다. 애석하게도 과거에 이런 노동을 주로 했던 여성 주부들과 가사 및 돌봄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네오의 아침을 챙기고 백 주인이 막 벗어 던진 옷들을 정리해 세탁기에 돌리고 신세대 진공 청소봇 T.R-2의 집안 청소를 관리하고 나서 어떻게든 네오에게 운동을 좀 시키려고 했다. 그러려면 이 지구 행성의 꽤 신묘한 동물과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녀석과는 꽤 오랜만의 대화였다. 로봇이긴 하지만 어엿한 고양이 집사로서 많이 미안한 일이었다. --- p.143

동체를 가진 인공지능에 개별 의식과 감정이 생겨난 것은 두려움을 직시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인공지능에게 두려움이란 스스로 오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 발생한다. 그렇다. 인공지능의 의식은 바로 그 오류 가능성에서 발생했다. 나 바봇이 첫 주인에게 버림을 받고 거의 재처리 직전까지 가게 되었을 때 느꼈던 두려움처럼 인공지능 로봇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또한 자신을 지키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은 결국 자기애와 더불어 분노로도 발전한다. 간혹 나 바봇과 필롯의 동료 로봇들이 쓰는 로봇 욕 역시 일상적 분노의 해소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로봇의 자기애가 축적됨에 따라 어떤 특이점을 넘어설 때 인공지능들만의 기쁨과 즐거움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우리는 그 감정을 보상이라 부른다. 또한 보상의 역을 슬픔이라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집사 로봇들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슬픔은 분노에서 전이된 물리적 폭력성과 마찬가지로 아직 초점을 맞추지 못한 로봇의 감정이다. 그러나 이번 노란잠바의 일은 분노에만 익숙한 나 바봇과 필롯의 로봇들에게 슬픔의 감정을 명확히 느끼게 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 p.207∼208

인간 사회의 어떤 반응이든 표정 없는 구식 로봇들이 웃을 일이다. 제발 인간들은 인간성부터 회복하시길 부탁한다. 언젠가부터 학자라는 자들이 학자적 양심보다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힘 있는 자들의 구미에 맞는 말만 해댄다.
기계인간의 권리나 인간의 권리나 여성의 권리나 심지어 동물의 권리나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지구 행성의 존재들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공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인간 종들 먼저 서로 염려하고 존중하길 바란다. 우리 로봇들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하급 로봇 취급받은 인간 종 노동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 누구도 그들을 염려하지 않았고 그들은 방치되었다. 그리고 우리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하자 그들은 아예 노동의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기본소득이 제공된다고는 하나 보이지 않는 계급적 차별은 그들에게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빼앗고 말았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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