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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

가히 시인선-002이동
한혜영 | 가히 | 2024년 04월 0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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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03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76g | 125*204*10mm
ISBN13 9791158966393
ISBN10 1158966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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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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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딱 그맘때 시구를 했습니다

포물선을 그리며
훌쩍 넘던 계절의 담장

마지막
꽃 한 송이가 글로브를 떠났지요

어떤 청춘이
공을 받아 애인에게 줬을까요

흠뻑 젖은 몸을 씻으러
구름 아래로 드는

그 목련
뒷모습에 잠깐 빠졌을 뿐입니다
--- 「목련」

비가 오는 까닭을 따져 묻지 않는 것처럼 지천으로 널린 햇볕도 그러려니 하는 것처럼

슬픔이 내게로 오면 묻지 않고 젖을 거다

안개에게 먹혀도 투정이 없는 달처럼 고양이 푸른 눈에 떠도는 전설처럼

슬픔이 기억으로 오면 섬처럼 잠길 거다
--- 「불문율」

배롱이나 백일홍보다 간지럼나무가 나는 좋아 부르면 깔깔거리며 달려 나오는 계집애

한여름 명랑하게도 꽃가지를 흔들지

분홍이나 하얀 레이스 그 아래로 드러난 매끈한 알종아리를 보는 것도 즐거운 일

동그란 혓바닥을 닮은 잎들
메롱!
약 올리는
--- 「이름 많은 나무」

첨탑에 저 붉은 해는 어느 닭의 볏입니까
날개를 갖지 못해
우러러만 보는 횃대
하늘엔 걷잡을 길 없는 불길이 번집니다

노을을 등에 업고 절룩이며 돌아오는
퉁퉁 부어오른
하루의 발등 위에
내 오래 참아온 회개 향유처럼 붓습니다
--- 「서쪽의 시간」

꽃이 아니어도
앉으라면 앉아야지

초록이 아니어도
날아라 하면 날고

나비는 고단도 하지
계절에 상관없이

먼먼 바다를 건너
산맥을 넘고 넘어

거기 무슨 꽃이 있어
날개가 젖고 젖나

죽음이 거기에 있어
부르면 가는 거지
--- 「나비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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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영의 시는 단도직입이다. 직방(直放)의 시학이라 할 만하다. 그 직방의 힘으로 삶의 다양한 파편들을 보여준다. 그 힘은 바로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터득한 고투(苦鬪)일 터, 살얼음이 박히거나 붉은 피가 도는 타자의 삶은 곧 한혜영 그 자신에 대한 치환이며 기록일 것이다. 한혜영의 고국을 향한 그리움은 자주, 시시때때로 태평양을 건넌다. 그는 결코 날개를 멈추지 않는다. “거기 무슨 꽃이 있어/날개가 젖고 젖나//죽음이 거기에 있어/부르면 가는 거지”(「나비는」)처럼, 설령 그것이 죽음을 불사하는 일이 될지라도 꽃이 부르면 기꺼이 바다를 건너가는 나비가 된다. 생사가 한 몸이니 이승과 저승 또한 한 처소일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음과 이별의 처연한 모습을 촌철살인의 언어로 우리에게 펼쳐 보여준다. 이는 한혜영 시인이 세상과 사람살이를 깊이 연민하고 사랑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 권애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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