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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와 마주 한 상

: 초록빛 온기와 용기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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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180쪽 | 145*225*11mm
ISBN13 9791193497043
ISBN10 1193497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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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평생 육식을 해 온 사람에게는 채소로만 밥상을 차리는 것이 막막할 수 있다. 내게는 간단한 밥상이 누군가에게는 그 어떤 과제보다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이 책을 쓰기로 했다. 여기 쓰인 것은 내가 먹고 살아온 기록이기도 하지만 나 혼자 만든 것은 아니다. 내 삶을 스쳐 지나간 모두가 이 책을 쓰는 데 도움을 주었다. 분주한 아침에 떠먹기 좋은 한 그릇 요리를 가져다주던 엄마도, 한집에 살면서 종종 요리를 해 주었던 커리 러버 동거인도, 전을 부쳐서 나눠 주던 옆집 아주머니도, 언젠가 먹었던 어느 식당의 칼국수 한 그릇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 삶의 모든 음식이 지면에 녹아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나 혼자 쓴 것이 아니고, 레시피들에 주인은 없다.
--- p.5

이래도 저래도 망한 주먹밥은 없고, 이래도 저래도 안 되는 주먹밥도 없고, 이래야만 저래야만 되는 주먹밥도 없다. 주방 안에서는, 식탁 위에서는, 이래도 저래도 좀처럼 큰일은 나지 않는다. (자나 깨나 불조심…) 가끔 맛없는 것을 먹게 될 뿐. 그래서 좋아한다. 정해진 답이 없다. 다 다르게 적어 내도 모두가 정답이다. 엄마가 내게 해 준 요리를 내 방식으로 만들어 가며 엄마가 말해 주지 않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운다.
--- p.30

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요리는 온몸의 감각을 사용하는 적극적인 활동이다. 불에 올린 재료의 냄새 변화를 감지하고, 다음 재료를 넣을 시점을 계산하고, 재료를 직접 만지면서 상태를 체크하고, 어느 정도로 익힐지를 정한다. 냄비 위로 손을 가져가 달궈진 온도를 느끼고, 기름과 닿은 재료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불의 세기를 조절한다. 동시에 여러 요리를 할 때는 각 요리의 재료 준비와 가열 순서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융통성 있게 움직여야 한다. 물론 능숙하게 재료를 다루고 요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잃어버렸던 감각을 회복하게 된다.
--- p.56

희생이 마치 사랑의 진정한 모습인 양 회자되다 보니 선의의 배려가 다정으로 둔갑되기도 하지만 사실 어긋날 때가 더 많다.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부단히 노력하지만 자주 나쁜 사람이 된다. 물어보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고, 타인의 마음을 지레짐작하다가. 상대방을 앞에 두고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상상하면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음에도 계속해서 멀어져 간다.
--- p.78

엄마는 다시다나 미원 같은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었으므로, 할머니가 보낸 뉴슈가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그러나 엄마가 뉴슈가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바깥에서 먹는 음식에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밖에서 파는 옥수수는 집에서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물기가 흥건해서 먹고 있으면 팔뚝을 따라 물이 줄줄 흘렀는데 그걸 바닥에 떨어뜨릴세라 급하게 입을 가져다 대고 핥으면 달고 짭짤한 맛에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옥수수자루를 쪽쪽 빨아 먹는 것도 별미였다. 왜 집에서 삶는 옥수수에서는 이런 맛이 나지 않는 것인지 늘 의문이었다.
--- p.125

주방에 서 있는 시간 동안 나는 내내 살아 있다. 그러니 그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다. 몇 시간이 든다 해도, 그 시간 동안 나는 내내 존재했으니. 나를 먹여 살리는 그 시간만큼은 오롯한 삶의 주체가 된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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